* 이 글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실험 또는 철학 및 인문학 유명인들의 주장이나 저서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다행히도 완벽과는 달리 '완전'은 제가 사용하던 느낌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습니다.
완전(完全)
필요한 것이 모두 갖추어져 모자람이나 흠이 없슴
평소 완전이란 단어를 상당히 가벼운 느낌으로 쓰긴 했습니다. 하지만 완벽의 경우에 비한다면 꽤나 적절하게 써왔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원을 제대로 살펴봐야 알맞게 사용했는지, 아닌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겠죠.
그럼 이제 완전의 어원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完(완전할 완)
앞선 글에서 저는 ‘‘가장이 이끄는 가족’과 ‘안정된 집’이 합쳐져 곧 ‘완전함’을 뜻하고, 더 나아가 ‘삶의 완결’을 상징하는 것, 이것이 完(완전할 완)자가 내포한 진정한 뜻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썼었습니다.
그러나 글을 올린 이후 산책을 하며 사색을 하던 중에 ‘내가 잘못 해석한 거 같은데?’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제가 해석한 게 완전히 틀렸다기보다는 좀 더 정확한 이유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죠. 그렇기에 확실한 해석을 위해서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큰 틀에서 바라볼 필요를 느꼈습니다.
元(원)이 ‘시작’과 ‘근본’을 뜻한다고 이전 글에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탕으로 바라보면, 중요한 것은 ‘가장’이 아니라 ‘가족’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족'과 '집'이 결합해야지만 이뤄지는 ‘가정’으로, 그 의미를 확장해서 봤을 때에야 비로소 ‘완전함’을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일반적으로 한 '가정'을 지칭할 때에는 '부모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가정'을 의미합니다. 이는 부모가 경제적, 정서적 책임을 지고 법적, 사회적 보호자로서 가정을 이끌고 지키는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배우자와 함께 거주지를 구해서 자녀를 양육하는 가정'이란 것의 '주체'가 '부모'라는 것이죠. 이때 자녀는 부모님 가정에 속하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일반적으로 자녀가 ‘어른’이라는 범주에 들어가려면, 진정으로 '독립했다'라고 말하려면 해야 될 것은 무엇일까요?
네, 우리는 보편적으로 '자녀가 자신만의 생활 단위를 만들어 새로운 가정을 형성'해야지 ‘어른’이라고 인정해 줍니다. 단순히 경제적으로, 정서적으로 성숙해졌다고 해서 어른이라고 말하진 않습니다.
즉, 앞서 얘기한 가장으로서 한 가정을 이끌어야지만 어른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말하는 가장이란, 단순히 외부에서 자원을 가져오는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자원을 분배하여 삶을 꾸려가는 사람 역시 가장에 포함됩니다. 한마디로 '부모 모두 가장'이라는 것이죠.
이는 단순히 가장이라는 개념에 있어 누가 더 중요한가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의 역할이 얼마나 조화롭게 작용하는가'로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는 뜻이죠.
물론 이런 해석에 대해 전반적으로 '확대 해석 아니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에 혼자서 살아갈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속하는 것이 가장 쉬운 일이죠.
그리고 공동체 중 가장 작은 단위는 '가족'입니다. 부모의 가정으로부터 독립해 벗어난 자녀가 해야 될 것은 새로운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이죠. 이 중 가장 쉬우면서도 위험이 적은 것은, 바로 이성을 만나 배우자로 삼고 안전한 거주지를 구해 자녀를 낳아 '자신만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에 있어서 동등하게 필요한 일이죠.
그렇기에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인간의 삶에 있어 기초적인 토대로서 작용해 독립된 개체로서 ‘완전함’을 이룰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를 통해 기초적인 토대를 ‘다 이루었다’는 뜻으로의 完 완전할 완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며, 더 나아가 살아가는 데에 있어 가장 기본적인 일을 ‘완결 짓는다’라는 뜻으로까지 연결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까지만 본다면 ‘삶의 완결이 아니라 삶의 시작 또는 근본이 맞는 거 아닌가?' 싶으실 겁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지만 이는 틀린 게 아닙니다.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경제적, 정서적 책임을 지고 법적, 사회적 보호자가 된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자면 ‘어린아이로서의 삶의 완결’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죠.
그렇기에 이는 하나의 삶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가장 기본적인 일을 완결 짓는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어찌보면 ‘완전함’은 경제적, 정서적 보호를 받는 '어린 아이'로서의 ‘삶의 완결’을 짓고, 단순히 개인적인 성취를 벗어나 가정을 이루고 새로운 생명을 책임지는 '어른'으로서의 ‘삶의 시작’을 상징하는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물론, 현대사회에 있어서는 각자마다 자라면서 경험한 상황이 다르고, 그로 인해 갖게 되는 고유의 가치관도 다르기에 위 내용에 동의하지 못하실 수 있겠죠. 특히 요새는 결혼이나 자녀 양육이 선택의 문제로 여겨지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한 가치로 자리잡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저 또한 각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삶을 설계하고, 책임질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는 것을 몹시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제가 말했고 말하고자 하는 바들은 전통적 가치에 기반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얘기죠.
앞서도 얘기했듯, 인간은 태생적으로 공동체에 속하길 원합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가장 작은 단위는 바로 가족입니다. 그렇기에 ‘완전함’을 뜻하는 데에 필수적으로 ‘가정’이 들어가는 것이죠.
여기에 더해,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타인을 이해하고 책임지는 행위 중 가장 기본적이고 일상적으로 할 수 있는 실천 방법입니다. 이는 단순히 직업적 책임이나 사회적 헌신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서는 매일 반복적으로 책임과 사랑을 요구받으며, 순간순간 인간의 이기심을 억누르고, 진정한 이타심과 헌신을 배우기 때문이죠.
게다가 자녀 양육은 일시적이거나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최소 20년 이상 지속되는 장기적인 헌신과 희생을 요구합니다. 이는 일시적인 사회적 활동이나 직업적 책임, 또는 단기적 기여와는 비교할 수 없는 무게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자녀를 학대하거나 방치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들은 단순히 양육의 의무를 버린 것을 넘어, 사회에서조차 책임감 있는 행동이나 자기희생적인 면모를 보여주지 못한 것이기에 '완전함'에 속하지는 못합니다. 이것은 비단 현대 사회에 국한되는 것이 아닌 과거를 포함한 수많은 사례들에서도 쉽게 확인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이것만 보더라도 제대로 된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은 가정에 대한 책임감을 증명하고, 그 과정을 통해 사회적 책임감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는,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경험'이라는 걸 보여주는 겁니다.
또한 제가 말하는 것들은, 당연하게도 모든 사람이 반드시 결혼을 하거나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딩크족이나 독신인 사람들을 존중하지 않거나 그들이 무조건적으로 틀렸다는 말도 아닙니다. 앞서도 말했듯 각자의 선택은 존중받아 마땅하며, 그 자율성 또한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렇기에
'결혼을 하거나 자녀를 낳는 것으로 다른 이를 책임지는 것이 두렵다'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못할까봐, 자녀 양육을 제대로 못할까봐 걱정된다'
등과 같은 이유에 대해서도, 그외의 다양한 이유들에 대해서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 한 가지는 분명하다고 봅니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는 것은 인간이 본능적으로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특성을 넘어서, 타인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며 책임까지 지는 가장 쉬우면서도 강력한 경험이라는 것을 말이죠.
그렇기에 저는 결혼이나 자녀 양육을 선택하지 않은 이들이라면, 적어도 자신이 이러한 본질적 책임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단순히 개인적인 선택의 자유라고 하더라도 그 선택의 바탕이 부담감, 무력감, 공포심 등등 다양한 원인에서 발생한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얘기죠.
물론 자녀 양육 외에도 헌신과 책임감을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가정'은 이러한 책임감을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차원에서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죠.
어른이라는 것은 단순히 나이에 따라 주어지는 명칭이 아니란 것은 모두 다 알고 있을 겁니다. 진정한 어른이란 자신 이외의 생명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보호자가 되는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 것이죠.
나아가 자녀를 양육하지 않는다고 해서 어른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삶의 기초적이자 궁극적인 책임감과 완전함을 온전히 경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점 또한 인정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제가 해석한 完(완전할 완)이 의미하는 ‘완전함’은 '보호받는 자리에서 보호하는 자리로의 이동'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는 책임감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하기에 가장 쉬운 자리가 바로 ‘가정’이라는 것이죠.
쓰던 도중에 어디서 많이 봤다는 생각이 들더니만 ‘동경은 이해로부터 가장 먼 감정이다 2’에서 내렸던 결론과 같은 맥락으로 보입니다. 한 단어가 단순히 한 가지 뜻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상반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측면에서 말이죠.
사실 처음에는 完(완전할 완)이라는 글자 해석에 있어 실수를 한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실수라기보다는 최근에 추구하던 방향과는 다르게, 예전의 제가 했을 법한 선택을 바탕으로 풀었던 것 같습니다. 꽤나 편협적인 사고를 했던 때의 선택 말이죠.
이전 해석은 단순히 표면적인 의미에 머물렀으며, 더 넓은 관점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 글을 쓰며 겪고 있는 일련의 과정들이야말로 ‘완전’으로 나아가는 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만, 이 생각에 확신을 갖기 위해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전(全)'의 의미까지 정확히 알아봐야겠습니다.
全(온전할 전)
‘온전하다’, ‘모두’라는 뜻으로 入(들 입)자와 玉(구슬 옥)자로 이루어진 회의자입니다.
어원을 찾던 도중, 全 온전할 전에 玉(구슬 옥)이 아닌 王(임금 왕)자가 쓰여서 의문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봐도 王(왕)자인데, 어원에서는 玉(옥)자가 쓰였다고 말하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죠. 그래서 구슬 옥과 왕 자가 비슷하게 생겼으니 같은 의미로 사용했을 수도 있겠다는 웃긴 생각을 하며 좀 더 찾아봤습니다.
그 결과, 구슬옥에 있는 점이 빠진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글자 쓸 때의 효율성을 높이려고 간략화가 된 것이라고 합니다.
즉, 玉(구슬 옥)의 상징성만 유지한 채 간편하게 사용하기 위해 王(임금 왕)자로 썼다는 겁니다. 마치 현대인들이 줄임말이나 이모티콘을 쓰는 것처럼 말이죠.
아마 과거에도 복잡한 문자나 기호를 단순화하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사람은 안 변한다?’라는 글을 쓸 때에만 하더라도 그 내용과 정반대의 사례를 이런 식으로 접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농담입니다.
어쨌든 간단한 궁금증은 해결됐으니, 이제 어떻게 해서 들 입과 구슬 옥이 합쳐져 온전함을 의미하게 됐을지 알아봐야겠죠.
일단 入(들 입)자는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단순화한 상형 문자라고 합니다. 여기에 玉(구슬 옥)자를 놓고 생각한다면, 全(전)자는 구슬이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겠죠.
더군다나 당시 옥이 단순한 장신구가 아닌 권력을 상징하는 물건으로도 쓰였으니, 상당히 엄중하고 철저한 곳에 보관했을 겁니다. 그래야지만 물건이 온전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여기까지만 본다면 全(온전할 전)자가 의미하는 바는 단순합니다. '옥처럼 귀중한 것을 보관함에 넣음으로써 온전하게 하는 것'이겠죠.
또한 온전한 상태로 보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들을 구비하는 것이라 한다면 ‘온전하다’와 ‘모두’의 뜻을 가진 것 역시 설명이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낸다면 앞선 실수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놓친 부분이 있거나 여전히 편협한 시각으로 보기에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이겠죠.
그러나 完(완)자와는 다르게 ‘들어간다(보관)’와 ‘옥(귀중한 것)’ 이외에는 더 해석할 여지가 도무지 안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에 ‘긍정과 부정’에서 제가 말했던 것이 떠올랐습니다.
여기까지 해낸 것과 부족하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것에 만족하고 즐기며 한걸음 더 나아가다 보면 원하던 것과 마주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을 말이죠. 그러니 아쉽지만 평소와는 달리 일단 넘어가야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뭘 해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며 제가 쓴 글을 다시 찬찬히 읽던 도중 번뜩 떠오른게 있었습니다.
'완벽'이란 단어의 핵심으로 사용되던 '완전'처럼, '완전'이란 단어에서 핵심적으로 사용되던 것이 '온전'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아마도 온전에 대해 알아보다 보면 完(완)이라는 글자처럼 全(전)자에서 놓친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겁니다.
온전(穩全)
본바탕 그대로 고스란하다. 못된 것이 없이 바르거나 옳다.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이것만 보는 것은 크게 도움이 되질 않았습니다. 느낌만으로는 全(온전할 전)자가 의미하는 것과 별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그럼 약간의 희망과 기대를 품고 '穩 온'의 어원을 자세히 알아봐야겠습니다.
穩(편안할 온)
‘편안하다’, ‘평온하다’, ‘곡식을 걷어 모으다’라는 뜻으로, 禾(벼 화)와 㥯(삼갈 은)자가 합쳐진 형성자라고 합니다.
뜻에도 나와있듯 禾(벼 화)는 '곡식을 걷어 모은다'는 뜻을 의미하기에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㥯(삼갈 은)이 왜 쓰였는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삼가다’라는 말은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한다'는 뜻인데, 의미만 보더라도 편안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것이 왜 禾(벼 화)와 결합하면 ‘편안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지 납득이 잘 되질 않더군요.
하지만 곰곰이 그 시절을 떠올리며 생각해 보니 답은 쉽게 나왔습니다.
아마도 저 글자가 생긴 고대 사회에서는 농사가 1년에 한 번 이루어졌을 겁니다. 지금과 다르게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러니 한 번의 실수나 자연재해는 1년 농사를 망하게 하거나 수확량이 저조해지는 결과를 만들었을 겁니다. 그러면 다음 수확 시기가 올 때까지 생존에 있어 큰 타격을 받는 치명적인 문제가 생기겠죠.
그러니 곡식을 수확할 때에 있어서는 몸가짐이나 행동 자체를 매우 신중하고 또 조심스럽게 해야만 했을 겁니다. 한 톨의 곡식이라고 더 모아야지만 겨울을 버티고 다음 농사까지 버틸 수 있을 테니까요.
여기에 더해 말 또한 조심했어야 했을 겁니다. 본격적으로 인간보다 뛰어난 AI가 만들어지고, 민간인이 우주탐사를 할 수 있는 지금 세상에서도 양파에게 나쁜 말, 좋은 말을 하는 실험을 하는데, 그 당시에는 얼마나 더 비과학적 믿음과 미신적인 신앙심이 가득했겠습니까? 아마 풍요를 비는 노래를 제외하고는 농사짓는 곳에서 입도 뻥끗 안했을 거라고 봅니다.
이러한 시점으로 바라본다면, 곡식을 걷어 모으는 행위에 있어서 언행을 조심해야 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 볼 수 있겠죠.
더불어 그 당시에 㥯(삼갈 은)자는 농사와 관련해서는 필수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글자인 것이죠.
그리고 이 내용을 바탕으로 좀더 확장해서 바라보면 穩(편안할 온)이라는 글자 자체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매우 신중하게, 그리고 조심조심 곡식을 걷어 모으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자연이 노해서 추수하는 와중에 망하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것과 동일하게 볼 수 있죠.
즉, 이미 그 한 해 농사가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는 겁니다. 이는 최소한 다가오는 추운 겨울에 부족한 식량을 구하려고 발품을 팔거나 눈 덮인 산을 뒤집고 헤멜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니 이러한 상황에서는 자연스럽게 마음이 ‘평온’해질 수 있는 것이고, 더 나아가 다가올 겨울을 비교적 ‘편안한 상태‘로 여유롭게 맞이할 수 있는 것이죠.
이는 비단 고대 농경 사회에서만의 일이 아닙니다. 수능을 볼 때 엿이나 찹쌀떡을 선물하는 것이나 개업 전에 고사를 지내는 것처럼, 현대에도 추수에 해당하는 중요한 일을 할 때면 '㥯(삼갈 은)' 자와 같이 미신이나 징크스를 걱정하며 조심스럽게 일을 합니다.
또한 원하는 점수를 얻게 되는 것이나 좋은 대학에 합격하는 것, 안정적인 직장에 들어가거나 많은 돈을 벌게 되면 마음이 ‘평온’해지죠. 물론 그 순간에는 도파민이 폭발해서 흥분하겠지만, 그때까지의 걱정이나 불안이 사라지는 건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러고 나면 세상 ‘편안’히 지내게 되고 여유로워지는 것이 당연한 수순이겠죠.
즉, 단순히 물질적 안정만을 뜻하는 것이 아닌, 각자가 정한 삶의 기본 조건을 달성함으로써 얻게 되는 정신적 평온, 더 나아가 편안한 상태에서만이 할 수 있는 미래를 계획하며 생기는 ’여유‘, 이것이야말로 '穩(편안할 온)의 진정한 뜻'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제 저는 穩(편안할 온)에 제 해석을 바탕으로 새롭게 만들어 낸 뜻, ’여유‘를 중심으로 '온전(穩全)'이라는 단어의 뜻을 다시 해석해야겠습니다. 全(온전할 전)에서 제가 놓친 부분이 어딘지도 알 수 있었고, 제가 얘기해 왔던 많은 것들이 상상도 못할 정도로 많이 달라질 거라는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죠.
이제 필요한 모든 퍼즐 조각들을 다 모은 것 같습니다.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을 때와는 전혀 다른 그림이 완성되는 것 같아 스스로도 매우 놀라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한 글자, 한 글자마다 깊게 파고들 생각이 전혀 없었으니까요.
그러나 ‘이름 따라간다’는 속담처럼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 글의 문장들이 제목따라 제멋대로 자리를 잡고는 존재감을 내비치니 저는 더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물론 제가 해석한 ‘완(完)’, ‘벽(壁)’, ‘전(全)’, ‘온(穩)’이라는 네 글자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지는 글을 써온 저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이 글의 제목에 있는 ‘제언’이라는 고상한 단어에 딱 알맞은 얘기를 하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럼 이제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이들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지 '온전(穩全)'을 시작으로 하나씩 되짚어가며 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