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일기

동몽선습 부자유친(父子有親) 6

by 물음표

* 이 글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실험 또는 철학 및 인문학 유명인들의 주장이나 저서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雖然이나 天下에 無不是底父母라

수연 천하 무부시저부모

父雖不慈나 子不可以不孝니

부수부자 자부가이불효


‘비록 그렇지만 천하에는 善(선)하지 않은 부모가 없는지라

부모가 비록 자식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해석된 내용만 놓고 보면 굳이 이해를 못할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이 해석이 이렇게 읽힙니다.


‘설마~착하지 않은 부모가 어딨겠어, 그치?

그러니까 네가 사랑받지 못했다고 효도를 안 하는 건 안 되는 거야, 알겠지?’


제가 과도하게 비틀어서 해석했을 수도 있지만, 기존 해석 자체가 상당히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기도 하고, 오해가 될 요소가 다분하다는 점에서는 부정할 수 없다고 봅니다.


저는 이전 글들에서도 그랬지만, 위의 해석과 같이 확정적으로 얘기하려면 보다 자세히 얘기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자가 되었든, 이 글을 직접 쓴 박세무가 되었든, 또는 이를 개정한 사람이 되었든 자신이 왜 이렇게 생각하는지를 배우는 사람에게 정확히 알려주어야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제대로 따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러니 '善(선)'한 부모가 어떤 부모인지, 어떤 식으로 해야 '善(선)'한 것인지를 설명해 주고, 사랑하지 않더라도 부모에게 왜 효를 행해야 하는 것인지 알려줬어야 된다는 거죠.


이러한 확신 또는 선언하는 듯한 말들은 많은 이들이 자신의 경험 내에서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기에 너무도 좋은 명분을 줍니다. 이는 자연스레 체벌이 포함된 훈육부터 가정폭력까지, 자식에게 당연하지 않은 행동들도 당연하다 생각하게 만들고, 그것을 자식들은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실제로 한자로 쓰인 원문의 문제인지, 아니면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해석되는 것이 문제인지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이번에도 원문에는 쓰이지 않은 글자의 뜻을 해석에 넣었다는 것이죠.

이는 제가 그간 쓴 글의 내용에 비하면 원문의 문장 자체는 짧지만 해석에 따라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위험이 있다고 여겨져 '나만의 해석으로 시작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다만, 한편으로는 기존의 해석이 제가 대략 알고 있던 유학의 느낌과 매우 흡사하니, 제 나름의 방식대로 활용하며 저에게 박혀 있던 인식을 같이 수정해 나가는 것이 나만의 해석으로만 하는 것보다 좋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일단 '善(착할 선)'과 '愛(사랑 애)'가 원문에는 없는 것이 확실하니, 직역을 시작으로 원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는지라,

부모가 비록 자애롭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다.‘



기존 해석의 '善(선)'보다는 비교적 중립적인 느낌을 주지만 여전히 확신하며 얘기하고 있습니다. 마치 '모든 부모가 옳다'는 것처럼 말이죠.

하지만 이전 글들에서도 적었듯이 '옳지 않은 부모'는 많습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실제로 잘못이라 부를 수 있는 정도의 행동을 저지르는 부모가 아니더라도 무조건 ‘옳다’고 할 수 있는 부모는 많지 않습니다.


왜냐면 이 '옳다, 그르다'는 자신이 아닌 타인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 타인은 자식이 될 수도 있고 또는 그 사람의 부모가 될 수도 있죠. 아니면 친척이나 이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스스로 '옳은 부모'라고 생각할지라도, 그들의 행동을 경험하거나 보게 되는 주변에 의해 '옳지 못한 부모'가 될 수도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여기서 알아봐야 하는 것은 ’어떤 것이 옳은 것이냐?‘입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옳은 것’이 있기에 실상 정확한 기준을 제시할 수는 없습니다. 각자의 경험과 처한 상황에 따라 ‘옳은 것’이 달라지기 때문이죠.


그러나 적어도 이 문장에서 말하는 ‘옳은 것’이 무엇인지는 알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是(옳을 시)'를 알아보는 것입니다. 한자는 표의문자이기에 그것이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무엇을 옳다고 여겼는지가 글자에 나타나 있을 겁니다.

그러니 여기서 사용된 '是(옳을 시)'가 무엇을 뜻하는지 자세히 알아본다면 여기서 정한 기준 또한 알 수 있겠죠.


是(옳을 시)

‘옳다’ ‘바르다’는 뜻으로 쓰이며, '日(해 일)'과 '疋(발 소)'가 합쳐진 글자임


'해와 발이 합쳐진 게 옳은 것과 무슨 상관이지?'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찾아보니 일리가 있었습니다.

일단 사용된 '疋(발 소)'는 '발'이 아닌 '측정하다'의 뜻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특히 여기서는 천을 재는 단위 혹은 도구로 쓰인 겁니다.

그리고 '日(해 일)'은 해를 의미한다기보다는 '불변의 진리'같이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어떠한 '기준'으로 쓰여진 것이라 합니다.

이러한 둘이 합쳐진 '是(옳을 시)'가 의미하는 것은 명확한 기준인 '日(해 일)'에 따라 측정된 '疋(발 소)' 바름 또는 옳음입니다.

즉, '객관성을 가진 기준을 토대로 판별하여 바르고 옳은 것을 구분하는 것'에 가까운 것이죠.


이제 이러한 '是(시)'의 해석을 바탕으로 원문의 ‘세상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는지라’를 보니, 확신에 차서 얘기한 것과는 별개로 '是(시)'가 의미하는 ‘객관성을 띈 기준을 바탕으로 한 옳은 것’이 무엇인지는 알기가 어렵습니다.


내용상으로만 본다면 ’부모는 옳다‘이기에 '부모 자체가 기준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몽선습'에서 정의하는 ’부모‘가 무엇인지를 떠올려 본다면,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누가 보더라도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객관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물론 '부자유친'의 첫 문장에서 ‘낳아 기르고, 사랑으로 가르친다’는 ‘부모의 행동’에 대한 얘기는 있습니다. 이것이 정의이자 기준이라고 한다면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준을 바탕으로 쓰여진 이후 문장들은 기존의 내용처럼 불합리하게 느껴질 정도로 일방적인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육체적으로 낳고 길러야지만 옳은 부모다'

'사랑으로 가르친다는 미명 아래 폭력을 저질러도 옳은 부모다'

이같은 내용으로 해석하며 합리화를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상황을 예상하고 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저는 '부자유친'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자 하는 과정 속에서, 제 나름대로 한자 어원을 파헤치고 갑골문까지 찾아보며 꾸준히 정의해 왔던 기준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보호하고 양육한다’는 것.

이것이 '부모냐, 아니냐'를 가르는 가장 객관적인 기준이라고 봅니다.


물론 이것 또한 ‘보호하고 양육한다’만을 놓고 보면 해석하기에 따라 악용할 수 있고, 합리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몽선습' 내의 문장에서 이러한 일들을 방지하기 위해 부모, 자식 관계가 어떤 식으로 되어야 하는지 조금 더 자세히 얘기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간 그것들을 분석하며 보다 근원적인 방식으로 수정해 왔죠.


'보호'하며 '양육'하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가까이 있는 것, 親(친)'이며

가까이에서 오래 있기 위해서는 '소통, 敎(교)와 諫(간)'으로 서로 맞춰가야 됩니다.

여기에 더해 상대가 나와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오롯이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것.

이것이 제가 그간 얘기해 오던 '옳은 부모’의 기준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준을 바탕으로 본문에서 빠진 부분을 채워, 문장을 완성시키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이해가 가실 겁니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세상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는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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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라 불리려면 자식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옳지 않은 이라면 부모라 불릴 수 없을 것이니,

세상에 옳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



비록 큰 차이가 없는, 같은 내용일지라도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만으로도 확언하는 것이 이해가 됩니다. 이미 '부모'라 불린 순간, 그 역할을 제대로 다 하고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죠.

그러나 앞선 내용들을 해석함에 있어 작은 오류들이 쌓여 버리니, '부모'라는 존재를 자식에게 무소불위의 신처럼 대접하라고 얘기한 것처럼 된 거였습니다.


그동안 제 글을 읽어 오셨다면 자식에게 있어 부모는 복종의 대상이 아니며, 부모에게 있어 자식 또한 무조건적인 아랫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계실 겁니다.

'부모'에게 '자식'은 '나'라는 존재의 '연속성'이자 보완된 '새로운 존재'이며, 소통하여 가르치기도 하고 배우기도 하면서 '같이 성장'해 나가는 관계입니다.

반대로 '자식'에게 '부모'는 오랜 기간 자신을 '보호'해 주고 '양육'해 준 고마운 존재이며, '나'라는 존재의 '근원'이자 출발점이고 더 발전할 수 있도록 앞서 경험해 주고 공유해 줌으로써 '자립'할 수 있게 도와 주는 관계입니다.


이는 즉, '부모'라는 이름이 무조건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역할을 책임지고 수행해 냄으로써 증명되는 자리를 뜻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이미 '부모'라 불렸다면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는 존재이니 '옳지 않은 부모란 있을 수 없다'고 확언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이 바로 이러한 '옳은 부모'의 '자식'이라면 마땅히 해야 할 일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첫번째 해석이 해결된 것과는 별개로 실상 가장 큰 문제가 존재합니다.

‘부모가 비록 자애롭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다'가 의미하는 것은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는 복종을 요구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일단 자애롭지 않다는 것만 보더라도 ‘옳은 부모’의 기준에서 벗어납니다. 그런데도 자식은 효를 행해야 한다니, 이것이 복종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해오던 '부자유친'의 해석을 놓고 생각해 보면 여기서 말하는 바가 무조건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 겁니다.

오히려 부모가 어떠한 마음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얘기하는 것에 가깝겠죠. 그것은 제가 해석해 온 이전 문장 그 어디에도 일방적인 관계에 대해서 얘기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 생각이 틀릴 수도 있지만, 저는 제가 해석해온 유학을 믿습니다. 관계를 함에 있어 한 쪽만을 위한다면 그 관계는 파탄나기 마련이니까요.

그러니 이제 제가 맞는지, 아니면 문장을 보자마자 떠오른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맞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慈 (사랑 자)'를 어원부터 분석해 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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