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일기

동몽선습 부자유친(父子有親) 7

by 물음표

* 이 글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실험 또는 철학 및 인문학 유명인들의 주장이나 저서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雖然이나 天下에 無不是底父母라

수연 천하 무부시저부모

父雖不慈나 子不可以不孝니

부수부자 자부가이불효


‘비록 그렇지만 천하에는 善(선)하지 않은 부모가 없는지라

부모가 비록 자식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慈(사랑 자)

‘사랑’이라는 뜻 외에도 '인정(人情)', '동정(同情)', '자비(慈悲)', '어머니'와 같은 뜻으로도 쓰임


이 원문에서의 '慈(자)'는 문맥으로 볼 때 일반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으로 쓰인 것이겠죠. 이는 '慈(사랑 자)'를 이루고 있는 한자들을 보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茲(자주 자)'는 '무성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되는데, '자라나는 풀'을 뜻한다고 합니다. '心(마음 심)'은 익히 알고 계시듯 '마음' 자체를 뜻하는 것이죠.


처음에는 '자라나는 풀'과 '마음'이 합쳐져 '사랑'이 되는 것에 의아했지만 이내 납득했습니다. 일단 풀이 자라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러한 '자연스러움'에 초점을 맞추고 '마음'과 연결한다면,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마음'이나 '심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죠.


물론 단순히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마음'만을 의미한다면 '분노'나 '질투' 같은 것도 포함될 겁니다. 그러면 '사랑'이나 '자비' 같은 식으로는 사용될 수 없었겠죠.

하지만 여기서 풀이 자라나는 시기를 생각해 보면 답은 간단합니다. 풀이 자라나고, 무성해지는 시기는 봄과 여름입니다. 즉, 따뜻함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죠.

그러니 '慈(자)'가 의미하는 '사랑'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따뜻한 마음'이며, 이를 누구나 알 수 있고 가장 대표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것으로 '어머니의 사랑'을 뜻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가 해석한 것처럼 '慈(자)'가 의미하는 '사랑'이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따뜻한 마음'을 뜻한다 해도 원문의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악화되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부모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따뜻한 마음을 자식에게만 안 준다는 것은 기존의 해석보다 더 큰 충격과 혼란을 줄 테니 말입니다.

게다가 남들에게 자애로울 수는 있지만 나에게는 자애롭지 않은데도 효도를 하라니, 엄청나게 부당한 요구처럼 느껴지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사실 이 부분에서는 꽤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습니다. 일단 앞에서도 계속 반복해서 얘기했지만, 여기서 사용된 '부모'는 '보호'와 '양육'을 하고 있는 것이 당연한, 그 기준에 부합되는 상태입니다.

자식을 이용하거나 때리고, 버리는 이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즉, 앞에서 말한 부모의 객관적 기준을 지키고 있는 ‘옳은 부모’라는 것이죠.


'옳은 부모'는 기본적으로 자애롭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없이 자식을 그저 노동력으로만 생각한다면 최소 10~20년을 무작정 투자해야 하는 것이어서, 이것보다는 일꾼을 사오는 것이 더 편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부모가 자식을 키우는 데에는 자애로운 마음이 기본적으로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이러한 '옳은 부모'가 자애롭지 않다고 얘기하는 걸까요?


사실 이에 대한 답은 '不(아닐 불)'에 있습니다. 한자에서 '부정'을 의미하는 대표적인 단어는 '不(아닐 불)'과 '否(아닐 부)'가 있습니다. 보통 '不(아닐 불)'이 상황에 따라 ‘아닐 부’로도 사용되기에 정확히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특히나 최근 들어 한자의 사용률이 점차 줄어들고 있으니, 더더욱 차이를 알기 어렵죠. 저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단 글자 모양에서 보이듯, 두 글자의 가장 큰 차이는 '口 (입 구)'의 유무입니다. 그리고 어원적으로 들어가 보면 보다 확연히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不(아닐 불)'은 땅속에 뿌리내린 씨앗을 의미하는 갑골문에서 출발한 글자입니다. 즉, 아직 싹을 틔우지 못한 상태라는 의미에서의 ‘아니다‘를 뜻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口(입 구)를 더한 '否(아닐 부)'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저 직역을 하면 '‘아니다’라고 입 밖으로 말한다'가 맞습니다. 그리고 이는 틀린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만 보면 실상 두 단어의 차이를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만 다르게 보면 그 차이는 생각보다 격차가 큽니다.


'不(아닐 불)'은 현재는 아니지만 이러한 상태가 고정됨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미래에는 어떻게 될 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품고 있는 단어라는 것이죠.

반대로 '否(아닐 부)'는 현재 그러하다고 입 밖에 내놓음으로써 '선언'하는 효과를 가집니다. 물론 미래에 바뀔 수 있다는 것은 그때 가서 바뀔 수는 있지만 현재 시점에서는 '확정'을 짓는 단어라는 겁니다.


예를 들어, 머리 속으로 ‘아 배고파. 밥먹어야지.’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당장 밥을 먹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밥 먹을 시간을 정한 게 아니란 것이죠.

그러나 소리내어 "배고프다. 밥먹어야지."라고 말하는 것은 지금 밥을 먹겠다는 겁니다. 아니, 적어도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그렇다는 겁니다.


이를 원문에 넣고 보면 좀 더 확연히 느껴지실 겁니다.

'不(아닐 불)'은 위에 직역한 대로 ‘부모가 비록 자애롭지 않더라도’입니다. 하지만 '否(아닐 부)'를 쓴다면 ‘부모가 비록 자애롭지 않으나’가 됩니다.

차이가 느껴지십니까?

아직 정확히 구분이 안 가신다면, 문장이 말하는 대상인 '자식'을 넣어 보세요. 보다 뚜렷이 아시게 될 겁니다.


不(불)

'네(자식)가 보기에

부모가 비록 자애롭지 않게 느껴지더라도,

너는 효도하지 않을 수 없다'


否(부)

'네(자식)가 보기에

부모가 비록 자애롭지 않으나,

너는 효도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제가 느끼던 강압적이고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否(아닐 부)'였고, 실제 사용된 '不(아닐 불)'은 '네가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는 '이해'의 말에 가까운 거였습니다.

즉, 원문이 말하는 것은 ‘부모가 자애롭지 않아 보일 수 있지만, 그렇더라도 효를 다해야 한다’였던 겁니다.


재밌게도 본래의 의미를 알게 되자마자 물음표가 하나 찍혔습니다.


‘'옳은 부모’라면 자애로운 것이 당연할 텐데, 왜 자식은 부모가 자애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걸까?'


사실 이에 대한 답 또한 간단했습니다.

부모가 그 마음을 언행으로 옮기는 방식이 자식이 원하는 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자식은 맛있는 음식만 먹고 싶은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 입장에서는 편식은 몸에 안 좋고 골고루 먹어야 건강할 수 있으니 맛이 없더라도 먹게 하겠죠.

그럼 이때 자식은 '내가 원하는 걸 못하게 하네'라거나, 또는 '맛있는 걸 안 주니 나를 사랑하지 않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말했듯,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에 오히려 자식이 원하는 것을 막는 것이죠.


이런 예시 외에도 부모 입장에서는 많은 것들을 막거나 못 하게 하는 경우가 많을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행위들은 실상 자신이 생각하기에 자식에게 악영향을 끼치거나 미래에 고생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하는 행동인 것이죠.

그러니 자애로운 마음이 없다고 하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들리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자식이 자신의 부모가 자애롭지 못하다고 느끼는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바로 부모가 자신의 심정이나 마음을 얘기하지 않아도 전해질 거라고 당연히 생각해서 표현을 자세히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모 말을 듣고 자라 성인이 되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는 경우도 발생은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언제나 정답만을 맞추는 것은 아닙니다.

시대도 달라지고 세대도 다릅니다. 환경도 달라지니 실상 모든 것들에서 부모가 겪은 것과 자식이 겪을 것은 다릅니다. 자식이 경험하게 될 상황에서는 부모가 못하게 막은 것들이 오히려 좋은 경우도 빈번하게 일어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자식 입장에서는,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으면서 못 하게만 한 부모의 언행들로 '나를 사랑하지 않는구나'라거나 더 나아가 '나를 미워하고 있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것들은 실상 모든 게 다 오해에서 비롯되는 겁니다. 그렇기에 앞서 ‘옳은 부모’의 기준에 '‘敎(교)'와 '諫(간)'을 통한 소통이 있어야 한다'고 계속해서 말한 겁니다.

부모가 어떤 이유에서 못 하게 막는지, 야단을 치는지를 설명하고 자신의 마음을 얘기해 납득시킨다면 당연히 자식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가 없을 겁니다.


물론 원문에서는 이러한 해결 방법을 직접 얘기해주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저 자식이 해야 할 바를 강조하다 보니 제가 처음에 했던 것처럼 오해를 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겠죠.

이러한 오역을 제가 나름대로 해석한 내용을 바탕으로 바로잡아, 이번 문장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한다면 아래와 같을 겁니다.



‘부모라 불리려면 자식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옳지 않은 이라면 부모라 불릴 수 없을 것이니, 세상에 '옳지 않은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 네가 느끼기에 부모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할지라도 ‘부모‘라면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 부모의 자애가 지금 보이지 않더라도 너를 사랑하고 있음이 분명하니, 너는 그 마음을 믿고 효를 다해 보려 해야 한다’



저도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서 어린 시절 부모님이 못하게 막거나 혼내던 것들을 이해하게 되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부모님들의 사정이나 상황에 의해서도 그렇지만, 발전이 빨라져 현재에는 당연한 것을 그 당시에는 경험하시지 못했었기에 혼을 내시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죠.


그러나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식 입장에서는

‘그러했던 부모님을 이해하는 것’과

‘그럼에도 부모님에게 서운한 것’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겁니다.

저도 왜 그러셨는지는 대략 짐작은 되지만 아직도 서운하고 섭섭한 것은 여전하니까요.


그러나 케케묵었던 이러한 감정을 해결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앞서 계속 얘기한 '소통'을 해보는 겁니다. 저도 이러한 소통을 통해 부모님에게 그 당시에 왜 그랬는지, 어떤 심정이셨는지를 여쭤보고 대화하며, 이해와 납득을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어느 새 서운함도, 섭섭함도 다 사라졌죠.


물론 모든 부모님들이 저희 부모님 같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어떤 부모님은 아예 잊고 있다든가, 그런 사실을 몰랐다는 듯이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또는 역으로 성을 내시는 경우도 있겠죠.

그럼에도 해야 합니다. 나를 위해서도, 나의 자식을 위해서도 이러한 서운함이 계속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말을 꺼내야 합니다.


그리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자식이 먼저 자신에 대해 자세하고 솔직하게 얘기하면 됩니다.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상황을 설명하고, 그 당시 어떠한 감정이었는지를 담담하게 얘기하는 것이죠.


예를 들어, 어린 시절 다들 한번쯤 "넌 왜 이것도 제대로 못하니?"라는 얘기를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실 매우 섭섭하기도 하고 못하는 스스로를 탓하게 만드는 말이긴 합니다. 그러나 이 말에는 보통 부모님도 인지 못하는 속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첫번째로 '잘하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못한 것에 대해 짚어서 얘기하게 되는 것이죠. 그러나 잘하길 바라는 마음 안에는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있고, 그 안에는 잘 돼서 '편안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안 이루어질 거 같다는 느낌이 들어 불안함이 커지다 보니 부모님은 자신도 모르게 딱딱해진 어투와 문장을 쓰게 된 것이죠.

이러한 자애의 마음이 없다면 애시당초 말조차 꺼내지 않았을 겁니다. 미움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관심이니까요.


그러니 부모님에게 말할 때에는 이런 식으로 말하면 됩니다.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그런 말을 들어서 속상했다.

못하는 스스로에 대해서도 속상했지만, 그 순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껴져서 속상했다.’


누군가는 부모님의 기대에 못 미쳐서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을 겁니다. 그 또한 얘기하면 되는 겁니다.


이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부모님도 자식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는 겁니다. 당신들께서도 어린 시절 배우고 경험한 적이 없으니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내고 얘기를 하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아는 사람이 먼저 하면 되는 겁니다. 감정을 담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있었던 일을 얘기하고, 어떠한 감정이 들었는지를 설명하고, 앞으로 어떤 식으로 해달라고 말을 하며, ‘敎(교)'와 '諫(간)'을 하는 것이죠.

당연히 바로 행동 수정이 일어나긴 어렵습니다. 그러나 꾸준히 하다 보면 생각보다 빠르게, 반드시 변화가 일어날 겁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을 스스로 함에 있어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할 것은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래야지만이 스스로가 느끼기에 변화가 느린, 실상은 어느 새 나이가 드셨기에 느린 것이 당연한 부모님을 이해하고 기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자식 입장에서 쉬운 길은 아닙니다. 그러나 부모님 당신 스스로도 눈치채지 못했던, 부모와 자식 사이의 사랑을 알게 된 자식이 그저 어렵다고 회피만 한다면 그거야말로 유학에서 얘기하는 ‘인간이 아닌 짐승’이 된 거겠죠.


누구나 이러한 과정을 알고 겪기에 그 전단계를 먼저 인지시키려고 말하는 문장이 이번 원문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양육'과 '보호'를 아는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해 주신 것을 알게 되어 그 시절의 부모님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며, 감사함을 느끼고, 사랑하며 하게 되는 행동들을 일컫는 단어가 바로 ‘효’와 ‘봉양’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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