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일기

동몽선습 부자유친(父子有親) 9

by 물음표

* 이 글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실험 또는 철학 및 인문학 유명인들의 주장이나 저서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孔子曰 五刑之屬이 三千이로되

공자왈 오형지속 삼천

而罪莫大於不孝라 하시니라

이죄막대어불효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오형(다섯 형벌)의 종류가 삼천 가지이지만, 그 죄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불효보다 큰 것이 없다."라고 하셨다'



드디어 '동몽선습 부자유친'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부자유친 편'을 이렇게 길게 쓰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어린이 교재라기에 쉬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생각해 보면 유학에서 가르치는 핵심 중 하나인 '오륜(五倫)'에 대한 것이니 쉬운 내용일 리가 없겠죠.


다행히도 이번 원문은 기존 해석과 직역간의 차이가 없었습니다. 사실 공자께서 말한 것을 그저 그대로 옮겨 적은 것이라 당연한 일이긴 했습니다.


먼저 공자께서 말한 것을 축약하면 ‘모든 죄 중에 불효가 제일 큰 잘못이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자유친 편'을 하는 내내 오해를 불러일으켰던 '왜 그런지'에 대한 얘기는 여전히 일언반구도 없습니다.


물론 '동몽선습'을 쓴 사람이 생각하기에 '부자유친'에 해당되는 내용들과 공자의 말씀을 보면, 위 문장을 마무리로 사용한 것은 이해가 갑니다. 다만, 원문들의 내용만을 봤을 때에는 어째서 '불효'가 가장 큰 죄인지를 충분히 설명해 주진 못했습니다.

사실 설명해 주지 못한 걸 넘어 '순'임금처럼 강요만 한 것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정한 친한 관계라면서 자식이 해야 할 일만 주되게 늘어놓았으니까요.


제가 그동안 해온 해석을 통해 보더라도 '불효'가 가장 큰 죄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제 해석과 원문과의 차이점은 선행적으로 이뤄져야 하는 게 있다는 겁니다. 바로 ‘부모’가 되는 겁니다.


계속해서 언급했듯, ’부모’란 낳고 기르는 것만 한다고 얻어지는 단순한 이름이 아닙니다. '보호'와 '양육'을 하고, 사랑을 하며, 소통을 함으로써 한 '어린 개체'를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개체'로 만드는 존재인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라는 타이틀이 모든 부분에서 만점을 받아야만 하는 건 아닙니다. 전과목 만점이어야지만 대학을 갈 수 있는 게 아닌 것처럼 말이죠.

여기서 재밌는 점은 ’부모‘를 평가하는 이가 '자식'이라는 점입니다. 왜 이를 재밌다고 표현했냐면 '자식'은 기본적으로 '부모'를 사랑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존재 자체로 '자식'에게는 '부모'가 만점, 그 자체라는 것이죠.

즉, 자식을 키우는 것은 점수를 쌓아 만점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닌, 만점에서 깎이지 않는 방식입니다. 또한 수능 출제 문제처럼 객관적인 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부분에서 많은 부모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가, 점수를 안 깎는 방법이 자식이 원하는 모든 걸 들어주는 거라고 생각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부모 입장에서는 자식이 경험하지 않았으면 싶은 것도 있겠죠. 자신이 경험한 고통이나 또는 예측 가능한 고통들을 내 자식만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걸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모‘라는 글자에도 나와 있듯 부모의 역할은 '보호'하며 '양육'하는 것이지, 경험 자체를 없애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의 보호 아래에서 다치지 않고 다양한 경험을 하는 것'

'그리고 문제가 생길 시 책임을 지는 것'


이게 바로 '부모'가 '할 일'인 겁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부모가 모든 걸 통제할 수는 없습니다. 경험을 하던 중에 고집을 부려서 더 심한 걸 요구하는 자식들도 있을 테고, 경험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자식도 있을 겁니다.

점수가 깎이는 것은 이럴 때 발생합니다. '자식'이 더 심한 걸 요구하니 '부모'는 못 하게 하고, '부모'는 필요하다 생각이 듦에도 '자식'은 안 하려 하니 결국 강제해서 불만이 쌓이는 겁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이미 앞서 얘기했습니다. '가까우니까', '가족이니까' 하며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서로를 착실히 알아가고 얘기를 하는 것이죠. 이것을 하기만 하더라도 나빠졌던 관계는 쉽게 회복됩니다. 그게 '가족'이고 그게 '자식'이니까요.


당연히 고집을 부리는 아이들도 있을 겁니다. 대화를 해도 안 통하는 애들도 있겠죠. 이때 아이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서로 양보하는 식의 협상을 통해 보호 가능한 선에서 경험을 시켜 주면 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부모의 아래에 있을 때, 다양한 경험들을 해야 하는 겁니다. 즐거움도, 고통도, 행복도, 슬픔도 이밖에 수많은 감정들과 경험들을 크게 다치지 않는 선에서 시켜 주는 것. 그리고 그 경험들을 온전히 소화하여 더 이상 '부모'의 '보호'와 '양육' 없이도 스스로 존재하며 살 수 있게 되는 상태, 바로 '성인(成人)'이 되도록 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인 것이죠.


이 방법은 어려워 보이지만 사실 어려운 게 아닙니다. 또 돈이 많이 드는 것도 아닙니다. 아이들이 언제나 외치는 것, 그것 하나만 들어주면 되는 겁니다.


'어린이로 보지 말 것'


자식을 어린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게 필요합니다. 어린이에게 부족한 것은 '지식'과 '정보'지 사고하는 방식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지식'과 '정보'가 부족하다고 어리다고 하지 않습니다. 만약 '지식'과 '정보'가 부족한 게 어린이라면 80살의 노인도 새롭게 늘어나고 있는 AI 계통에서는 어린이라고 불려야 하죠.


어린이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고유한 '사고 방식'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가지고 있습니다.

단지, 그 '사고 방식'에 넣어서 활용할 '지식'과 '정보'가 부족할 뿐이죠. 이를 채워 주고 채울 시간을 벌어 주는 것이 ’부모‘인 것이구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보호'한다고 말하며 '대신 해주는 것'은 절대 해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부모'의 '역할'은 물고기를 잡아 주는 것만이 아니라 낚싯대를 만들기에 좋은 나무를 고르는 법부터 낚싯대를 만드는 법, 물고기를 잡는 법, 잡은 물고기를 손질하는 법 등을 익힐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겁니다.


물론 직접 하게 되면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수도 있습니다. 이때 해야 하는 것은 그 행위를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되는지'를 '자식'을 '보호'하며 알려주는 겁니다. 그렇게 점차 모든 행위에서 부모가 없어도 혼자 해낼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모색하게 된다면 바로 독립할 순간이 온 것이겠죠.


물론 누구는 어릴 적부터 척척 알아서 하기도 하지만 누구는 칭얼대기도 할 겁니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자식이 귀엽게 칭얼대면 부모가 되어 그냥 참기는 힘들겠죠. 그러나 대신 해 주는 것은 안됩니다.

'부모'가 할 수 있는 최대치는 '같이 배우고, 같이 해나가기'입니다. 바로 '교(敎)'와 '간(諫)'을 바탕으로 '소통을' 하여 자식 스스로 끝까지 해낼 수 있도록 기다리며, 자식이 도움을 청할 때에만 돕는 것이죠.


그리고 이렇게 최소 15~20년 동안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는 시절부터 기초적인 지식과 경험을

충분히 하여 자립하는 그때까지 아무 조건 없이 '보호'하고 '양육'해 준 ‘부모’를 둔 자식이라면, 독립하여 자신이 책임지며 살아가면서 자연스레 알아차리게 되겠죠. 부모가 해준 것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그리고 존경하게 될 겁니다.

이에 더해 자신도 가정을 꾸리고 자식을 낳게 되어 부모의 사랑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깨닫게 될 때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것이 '효(孝)'와 '봉양(奉養)'일 것입니다.


그러니 사실 '효(孝)'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연스레 깨닫고 이해하게 되면 하게 되는 것이 '효(孝)'인 것이죠. 그리고 '효'와 '봉양'을 해야 함에도 자신의 편함, 이기심, 귀찮음 등의 이유로 부모를 뒷전으로 미뤘을 때 가장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바로 나의 자식이 이걸 보고 배운다는 겁니다. 이게 문제인 이유는 단순히 나중에 자식이 커서 자신을 무시할 수 있어서가 아닙니다. 바로 스스로의 편함이나 이기심을 위해선 무엇이든 포기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 거죠.


앞서 말한 것처럼, 최소 15~20년을 사실상 자식이라는 이유만으로 '보호'하고 '양육'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그런 조건 없는 큰 사랑을 받았음에도 자신의 이유를 핑계로 부모에게 보답을 하지 않는 것을 정당화한다면, 그보다 작은 감사함을 표해야 될 일들에도 당연히 하지 않을 겁니다.

즉, '불효'는 단순한 의무 위반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재 기반을 부정하는 것인데, 자신의 기반조차 배반한다면 이보다 작은 것들은 더 더욱 자연스레 무시하게 되겠죠.


다시금 말하지만 이러한 '불효'를 저지르지 않는다는 것은 자식이 부모에게 잘해야만 한다는 건 아닙니다. 부모가 ‘부모’답지 못했다면, 또는 과도하게 점수가 깎였다면, 자식 입장에서는 사랑하는 마음보다 미움이 커지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문득 공자가 '효(孝)'를 중시하며 선언하듯 말한 것의 바탕에는 공자의 부모가 ‘부모’다웠고, 바로 그 안에서 공자가 자란 것이라는 확신이 듭니다. 그러니 '효(孝)'가 아주 자연스러운 환경이었을 것이고, '불효'를 저지르는 이들은 도무지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을 넘어 인간으로서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기에 가장 큰 죄로 여겨졌을 수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공자의 생애나 그의 부모에 대해 깊이 아는 건 아닙니다. 실상 제가 공자에 대해 섣불리 평가할 수는 없겠죠.

하지만 앞서 '순'임금의 일화를 인용하며 '효(孝)'의 도리를 찬양한 공자의 태도를 보면, 그 역시 유사한 경험을 했거나 최소한 '순'임금의 행동에 깊이 공감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유사한 경험이란, 단지 상황의 유사성이라기보다, 공자가 지향한 인간 관계의 이상(‘부모‘다움과 ‘효'의 자연스러움)이 '순'임금의 그것과 닮아 있다는 뜻입니다.

그가 자신의 부모로부터 '부모와 자식간의 이상적인 관계'를 충분히 경험한 후 세상에 나와 이후 세상을 돌아보며, 그것이 오히려 드물고 낯선 현실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부자유친’과 같은 가르침을 유난히 강조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공자가 ‘왜 '효(孝)'를 행해야 하는가?’ 또는 ‘부모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풀어냈다면 어땠을까 하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이들이 '부자유친'에서 말하는 그런 ‘부모’ 밑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부모’가 되는 법을 배운 적도, 심지어 제대로 된 '교(敎)'와 '간(諫)'으로 소통하는 것을 본 적도 없을 테니까요.


말 그대로 운이 좋아야지만 ’부모‘다운 부모 밑에서 자랐을 확률이 높을 것이고, 그렇기에 대부분의 자식은 온전히 성인이 되어 '부모'가 되었다기보다는 얼렁뚱땅 살다 보니 부모가 됐을 겁니다. 그렇기에 자신도 자식에게 자신의 부모가 하던 것을 자연스럽게 했겠죠.


'부자유친'은 말 그대로 '부모와 자식은 하늘이 정한 친밀한 관계'임을 뜻합니다. 그리고 친한 관계에서 모른다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아는 쪽에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천천히 다가가면 되는 겁니다. 여기에는 부유하냐 가난하냐, 높은 신분이냐 낮은 신분이냐 같은 세상적인 내용은 필요 없습니다.


'사랑함으로 소통을 통해 서로를 보다 자세히 아는 것'

'이해함으로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것'


이것만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에 있을 뿐입니다.


‘부모’이지 못한 것도,

‘불효‘를 저지르는 것도

잘못이 아닙니다.

잘못은

앎에도 하지 않는 것이며,

잘못이 되는 이유를 알려고조차 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름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 누구도 처음에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이제 ‘부모'와 ‘효’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으니

'선택'은 자신의 몫입니다.


사실 ‘효(孝)’는 이미 여러분의 손 안에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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