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몽선습 부자유친(父子有親) 10
* 이 글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실험 또는 철학 및 인문학 유명인들의 주장이나 저서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사실 이전 회차의 글을 '부자유친'의 '마침글'로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다 쓴 뒤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어 보니, 제가 보통 책을 읽으면서 제일 싫어했던 것을 저도 똑같이 했더군요. 바로 개념이나 원리만 알려주고,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은 알려주지 않는 것 말입니다.
물론 이해를 했다면, 저마다의 방법으로 할 수 있는 것이긴 합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책에서는 작가 스스로가 어떻게 했는지 정도만 알려 주고, 자기 주장의 원리에 대해서만 자세히 설명하죠.
그리고 이 점에서 제가 언제나 답답했던 것은, 작가가 알려 주는 원리를 내 상황에 맞추어 적용하는 것이 몹시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애매모호함'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쓴 '부자유친'의 해석을 각자에게 적용할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생각해 보며 답을 찾아봤습니다.
그리고 톨스토이가 쓴 책 ‘안나 카레니나’의 첫 줄
‘모든 행복한 가족은 서로 닮아 있지만, 불행한 가족은 각자의 방식으로 불행하다’라는 말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닮다
1. 생김새나 됨됨이에 있어서 자연적 또는 우연히 비슷한 상태를 보이다.
2. 본을 삼아 그대로 좇아 행동하다.
'닮다'의 첫번째 뜻인 '생김새나 됨됨이가 비슷한 상태를 보인다'는 것은 제3자의 시선에서의 서술입니다. 즉, 1번의 뜻을 갖기 이전에 2번에 해당하는 '서로가 본을 삼아 그대로 좇아 행동하는 것'이 '닮다'의 우선적인 뜻이지요.
먼저 자신의 '본'과 닮아 있어야 누군가가 봤을 때 닮았다고 표현할 테니까요.
'본을 삼는다'는 말에서 '본(本)'은 '기본'이나 '근본'을 의미하는 한자로 사용되지만, 여기서 말하는 '본'은 보통 '본보기로 삼을 만한 대상'을 뜻하는 단어로 많이 사용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누군가를 본보기로 삼으려면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답은 단어 그 자체에 있습니다.
본‘보기’
즉, '보는 것'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죠.
물론 단순히 '보기'만 해서는 알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하지만 '본을 삼는다'는 것은 한자의 의미를 바탕으로 한 '상대의 무언가를 나의 기본으로 삼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굳이 현대식으로 하자면, '다른 사람의 어떤 면모를 나의 기본 설정으로 둔다'는 것이죠.
대상의 특정한 면모를 기본으로 설정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해'하는 겁니다. '이해'를 해야 나도 그 행동 원리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해'를 하기 위해서는 '봐야' 합니다. 그것도 단순히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세히' 봐야지 '이해'를 할 수 있죠.
그렇기에 ’자세히 보는 행위‘는 단순히 시각적으로 보는 것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보고'
'듣고'
'배우고'
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에서 말한 ‘자세히 보기’ 위해서 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가까이 있어야 합니다.
가까이 있어야지만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가까이 있어야지만 제대로 '들을' 수 있고,
제대로 '배울' 수가 있는 것이죠.
요즘에는 다양한 매체들로 인해 물리적인 거리가 멀어도 괜찮다고 합니다. 그러나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죠.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코끼리를 보는 것과 눈 앞에서 코끼리를 보는 것이 같을까요?
집에서 티비나 핸드폰으로 노래를 듣고 공연을 시청하는 것과 공연장에 가서 관람하며 경험하는 것이 같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현장에서 대상의 표정과 몸짓, 숨소리까지 전부 보고 느낄 수 있다면, 완전히 다른 것을 알 수 있겠죠.
그렇기에 물리적 거리의 가까움은 미디어가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게다가 나의 기본 설정 중 하나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것을 '본'으로 삼기 위해서라면 더 더욱 직접 가서 '보고' '듣고' '배우고' 싶어집니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직접 앞에서 배우는 것과 간접적으로 배우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죠.
그리고 물리적으로 가까이 있고, 상대의 행동을 '보고', 대화를 나눔으로써 '듣고' '배우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더 필요합니다.
바로 '친해져야' 하는 것이죠.
어디선가 많이 본 내용이라 생각이 드신다면, 그 생각이 맞습니다.
'부자유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親(친할 친)’에 대한 설명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親(친)'은 앞서 풀어 설명했지만 '亲(친할 친)'과 '見(볼 견)'이 사용되었습니다. 이전에 '亲(친)'은 '나무'와 '서다'라는 뜻을 바탕으로 한 '성장하여 독립된 존재'를 의미한다 말했었습니다.
그러나 저 또한 놓친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성장하여’가 의미하는 것을 제대로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이죠. ‘성장하여’는 '성장했다는 것을 안다'는 겁니다.
즉, '시간'에 관한 내용인 것이죠.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단순히 성장해서 ‘독립된 상황’만을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시작부터 과정, 결과까지 전부를, ‘성장한 과정을 포함한 지금까지를 보는 것'을 말한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을 볼 수 있다면, 그러한 위치에 있을 수 있는 관계라면 말 그대로 친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것이죠.
그리고 이것을 놓고 본다면, 이 모든 과정을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할 수 있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 관계입니다.
태어나서부터 또는 갓난 아이일 때부터 또는 어리다고 불릴 시기부터 계속해서 가까이서 지낸 ’부모‘와 '자식'이라면 '親(친)'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죠.
아마 이렇기에 '부자유친'의 첫 구절의 해석에서 ’하늘이 정했다‘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거라고 봅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親(친)'에서의 ’보다‘는 단순히 눈으로만 관찰하는 게 아닌 '보고' '듣고' '배움'을 뜻하는 것이죠.
이는 현재 중국어에서 '見(견)'이 일반적으로 ‘보다’라는 뜻보다는 '만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만난다'는 것은 단순히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교류를 통해 '보고 보이고', '말하고 듣는' 행위를 함으로써 은연중에 '가르쳐 주고 배우기'까지 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니 부모 자식은 서로 보고 듣는 것을 넘어,
부모도 자식에게 배우고
자식도 부모에게 배우는 관계를 말하는 것,
이것이 제가 해석하던 '부자유친'과도 의미가 통하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까지만 한다면 공자께서 말씀하시던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원리만 건네준 채로는 적용을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親(친)'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죠.
사실 저는 방법도 얘기하긴 했습니다. 제가 얘기하던 '소통이 더해져야 하는 것'이 그 방법이죠. 여기서 제가 놓친 게 바로 ‘그렇다면 소통은 어떤 식으로 하느냐?’입니다.
아니, 어떤 식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할지를 알려드리지 못한 것이죠.
그래서 이것을 좀 더 세세하게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이 들어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가장 간단한 방법은 세간에서 말하는 '아이 메시지(I message)' 형태를 띄는 겁니다. 물론 요즘 들어 부모 자식 간에 '아이 메시지(I message)' 를 하는 경우는 많을 겁니다. 부모 스스로가 자식을 잘 키우기 위해 여러 방송 매체에서 찾아보고 배우니까요.
그러나 저는 여전히 '아이 메시지(I message)'로만은 부족하다고 봅니다. 내 얘기만, 내 의견만 전하는 것이 '아이 메시지(I message)'여서 그렇습니다.
일반적으로 '아이 메시지(I message)'는 이런 식으로 합니다.
‘나는 ~~하다.
이유는 ~~하고,
그러니 ~~하면 좋겠다.’
아마 익숙하기도 하고 한번쯤은 들어봤을 테니 '이게 뭐가 문제야?' 하실 수 있습니다. '나를 알려야 상대도 알고선 그에 따라 뭔가를 할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죠.
맞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부분이 문제입니다.
'상대도 알고선 그에 따라 뭔가를 한다'
이 부분 말입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한 쪽의 의사만 듣는 것을 '소통'이라 부르지 않습니다. '통보'라고 말하죠. '소통'은 상대의 의견까지를 ‘듣는’ 겁니다.
특히나 이 방식의 가장 큰 문제는 친한 관계에서의 이 말은 '강요'와 다름이 없다는 겁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고 자식도 부모를 사랑한다고 했죠. 이러한 관계에 속하게 되면 서로에게 좋게 보이고 싶은 게 당연합니다. 상대가 나를 더 생각해 주면 좋겠고, 또 상대가 기쁘면 좋기 때문이죠.
이러한 관계에서 '아이 메시지(I message)'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단순히 자신의 생각만을 말하는 거겠지만, 역으로 그들을 사랑하는 이에게, 내가 기쁘길 바라는 이들에게는 '강요'와 다름이 없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아이 메시지(I message)'는 앞서 말한 ‘본다’에 속하는 ‘말하기’만을 할 뿐이지, ‘듣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제가 찾아낸 방법은 간단합니다.
'아이 메시지(I message)' 형태에 '하나'만 덧붙인다면 상대와 '소통'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다.
이유는 ~~하고.
그러니 ~~하면 좋겠다.’
여기에
‘너는 어떻게 생각해?’
이것까지를 묻는 겁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해'라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말하고 가르쳐 주고,
'너의 생각은 어때?'라고 물음으로써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을 듣고 배울 의향이 있다는,
경청할 준비가 됐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이죠.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내가 양보하거나 배려할 수 있슴’을 상대에게 미리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간의 다른 생각을 조율해 나가 합의점을 찾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전에 쓴 ‘건설적인 대화’의 핵심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대화를 나누는 주체 모두가 만족할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내 생각만이 옳지만, 네 얘기를 들어는 줄께'라는 생각이 아니라, 상대의 생각을 듣고 배워서
각자가 생각하는 합의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의견을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제가 말해 오던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떠한 상황에 있어서 '소통'을 하여 합의점을 찾고 같은 목표를 가지게 되면, 그것에 도달하는 방식 또한 같아지게 되니 이를 '닮았다'라고 표현할 수 있게 되는 겁니다.
즉, 톨스토이가 말한 '행복한 가정은 닮아 있다'는 말은 이러한 방식을 바탕으로 형성된 진짜로 '親(친)'한 사이가 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공자께서 미처 알려주지 못한, 또는 공자께서도 몰랐던 세세한 방법이며,
부모 자식 간에 이뤄지게 되면 소위 세상이 말하는
'행복한 가정'이 될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한 가지 간단한 제 일화를 말씀드리자면,
예전에 성년이 된 이후 마트에 가서 제가 먹을 것을 고를 때면 언제나 은근한 스트레스를 받곤 했습니다.
원인은 맛있는 걸 먹고 싶어 사려고 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였지요.
'이걸 어머니도 드시면 맛있게 드시겠지.
드시고 좋아하시면 좋겠네.'
이러면서 저는 제가 먹을 양보다 더 많이 산 겁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접시에 담아 드렸죠. 하지만 어머니 입에는 안 맞는 경우도 있었고, 또 드시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 입장에서 말씀하신 거라 괜찮지만, 문제는 저에게 있었습니다. 그러한 어머니의 말씀에 약간의 실망, 약간의 섭섭함이 생긴 겁니다.
그리고 이것이 쌓이다 보니 '왜 안 드실까? 내가 싫으신 건가?'로 넘어가며 약간의 분노로 바뀌었고, 이후에는 '어차피 안 드시겠지'라며 어머니 몫 자체를 안 사게 됐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재밌는 점은 어머니도 완전히 똑같진 않아도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고 계셨더군요.
이것을 해결한 방법은 정말 정말 간단했습니다.
마트에 가기 전에, 또는 가서 생각이 났다면
바로 전화로 여쭤 보는 겁니다.
'어머니, 저 이거 사려는데 드실래요?'
'저 이거 먹을 건데 어머니도 드실래요?'
이렇게 말이죠. 또는
'어머니, 이거 정말 맛있는데 맛보실래요?'
이처럼 여쭤 보는 겁니다.
어머니도 저에게 동일하게 물어보셨죠.
'아들, 과일 사려는데 너 먹을 거니?'
'저녁에 이거 만들 건데 먹을 거니?'
그리고 그 결과,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받으면서도 거절을 할 때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습니다. 또, 한 공간에서 아무 대화 없이 각자 할 것만 하고 있더라도 불편한 게 조금도 없었습니다.
왜냐면 필요한 게 있거나 나누고 싶은 게 있으면 상대가 말을 할 거라는 '믿음'이 두터워졌기 때문이죠. 즉, 앞서 말하던 '부모 자식 간의 합의점'을 찾은 겁니다.
그리고 나중에 생각해 보니,
‘어머니, 이거 맛있는데 드세요.’처럼 이전에 제가 하던 방식이 '아이 메세지(I message)'였으며, 실상은 이것이 '강요'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게 이전에 얘기한 '순'임금이 하던 것일 겁니다.
아무리 나에게 좋더라도,
그것이 상대를 위함이더라도
'보기'만 하고,
'말하기'만 하고,
'가르치기'만 하는 것은 '강요'입니다.
중요한 것은
'봤으면 보여 주고',
'말했으면 듣고',
'가르쳤으면 배우는 것'.
이것이 바로 '소통'인 것이죠.
그리고 이 '소통'을 통해 정말로 상대와 같이 즐기고,
같은 것을 목표로 삼고,
같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제대로 된 ’부모 자식 관계‘이며,
’효(孝)‘를 행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이전 글에서의 ’효는 이미 여러분의 손안에 있다'는 것은 틀린 게 아닙니다. 그저 제가 그 ’효‘를 부모님께 어떻게 전달하는지를 말씀드리지 못했던 것이죠.
부모 자식 간의 '행복한 가정'은 정말로 거창한 게 아닙니다. 그저 서로 잘 통하고, 잘 맞기만 해도 행복한 게 가정이고 부모 자식 간입니다.
그리고 이는 실상 '부모 자식'이면 이미 가지고 있는 겁니다.
거기에
나를 알리고,
상대에게 물어봄으로써 소통하고,
합의점을 찾으며,
사랑하기에 아주 약간의 양보를 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늘이 정한 '親(친)'한 관계인
'부자유친(父子有親)'
그 자체가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