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긍정과 부정'

by 물음표

* 이 글의 내용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어떠한 과학적 근거나 실험 또는 철학 및 인문학 유명인들의 주장이나 저서 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글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쓰는 기분이 드는 '물음표의 순간들'입니다. 날짜로만 따지면 몇 달 안 지났는데도, 체감상으로는 한 2년은 지난 거 같습니다. 그만큼 제가 꽉찬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거겠죠.


이 글을 쓰는 지금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초여름에 봄비가 내리니 어색하면서도 괜시리 기분이 좋아집니다.

요즘 들어 날씨가 참 재밌는 거 같습니다. 초여름이 다가오는데도 여전히 아침과 저녁에는 추우니 말이죠. 개인적으로는 좋지만, 어릴 적을 생각해 보면 정말 많이 바뀐 거 같습니다.


그 사이, 바뀐 날씨처럼 저도 다양한 변화를 겪었습니다. 앞 글에 적었듯, 제가 쓴 글을 간간이 읽다 보니 그 당시에 놓친 점들이 보이더군요.

그러다 다시금 '물음표의 순간들'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게 된 건, 최근에 운동을 하다가 이전처럼 또 다치게 됐을 때입니다.


'벤치프레스'라는 누워서 팔로 무거운 걸 드는 운동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어떤 남성분께서 저랑 한 10cm 정도의 거리에서 제 머리쪽 거울을 보며 운동을 하시더군요. 서로 다리를 벌리고 있고, 무릎이 닿을랑 말랑한 거리다 보니 매우 기분이 불쾌해지고 짜증이 났습니다.

무시하고 운동에 집중하려던 찰나,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고 그 순간 집중력이 흐트러지며 결국 오른쪽 어깨를 다치게 됐습니다.


아마 글을 쓰기 전의 저였다면, 그 남성분을 욕하면서 운동이고 식단이고 다 내팽개치고 망가진 생활로 복귀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달랐습니다.

오른쪽 어깨만 다친 것이니, 그동안 비교적 약했던 왼쪽 팔과 가슴 운동을 하면서 오른쪽 어깨에는 휴식을 주었습니다.

즉, 다친 것과 별개로 운동과 식단은 계속한 것이죠.


그렇게 한 주 정도, 안 다친 곳은 운동을 하고 다친 오른쪽 어깨는 회복에 집중하며 지내니 금방 다시 운동할 수 있게 되더군요. 이전과 확실히 달랐던 것은 다친 것과는 별개로 운동과 식단을 병행했다는 점입니다.


전과 달라졌다는 자신감이 가득 차오르던 찰나, 다시금 운동을 재개한 바로 그 날에 이번에는 코로나인지 독감인지 모를 병에 걸렸습니다.


이틀을 꼬박 앓으면서 오한과 발열로 거동도 힘들었습니다. 운동은 당연히 못했고, 식단은 커녕 물도 제대로 못 마셨습니다. 그리고 조금 정신이 차려지고 든 첫 생각이

‘아, 나는 살을 못 뺄 운명인가?’였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던 것이, 제대로 된 운동과 식단을 시작한 지 두 주만에 어깨를 다치고, 곧이어 병에 걸려 못 움직이게 된 거였기 때문이죠.


그렇게 좌절하려던 찰나, 문득

'어차피 지금은 움직일 힘도 없으니 운동은 제외하고 식단은 할 수 있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병에서 회복을 하려면 입맛이 없으니 입맛을 돋우는 것을 먹어서 낫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럴 때 먹는 거를 잘 가려서 먹기만 한다면 회복과 식단 둘 다 잡을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실행한 결과, 성공했습니다. 한 주만에 병에서 회복하면서 식단도 유지했고, 운동에도 다시 돌입할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러나 이러한 성공과는 별개로 문득 물음표가 찍혔습니다.


'아팠을 때 한 행동들이 내가 얘기했던 '긍정'인 건가?'


저는 이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다시 처음부터 점검해 보기로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늘 해오던 대로, '긍정'과 '부정'이 무엇인지 다시금 살펴보도록 하죠.


긍정

당연하기에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부정한다고 그것이 사라지거나 결과가 바뀔 리가 없으니까.

그러니 벌어진 일이라면 어차피 받아들여야 하므로, 그것을 괴로워하는 것보다는 즐기는 것이 낫다.

아니 즐기는 것이 좋다.

즉, '긍정'은 '정한 것 또는 정해진 것을 즐기는 것'이다.


이것이 제가 처음 쓴 '긍정과 부정'을 요약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다시 보니 의문이 들었습니다.

'정말로 즐길 수 있을까?'


생각해 보죠.

제가 다친 것을, 아픈 것을 즐긴 걸까요?

아닙니다. 벌어진 일 자체를 즐긴 게 아닙니다.

또 '어떠한 일이라도 즐길 수 있나?'라고 생각해 본다면 좀 더 명확해 집니다.


제가 쓰긴 했지만 이제 와서 보니, 괴로운 것을 즐긴다는 것은 너무 뭉뚱그린 표현이며 누군가에게는 강요가 될 수도, 폭력으로 다가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즐길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죽었다면 즐길 수 있을까요?


'어차피 다시 살아나는 것은 불가능하니 책임질 대상이 사라졌음을 즐긴다?'

'고통이 더 많은 세상, 안 좋은 일을 경험하며 꾸역꾸역 사는 것보단 차라리 일찍 죽은 게 다행이다?'


적어도 제가 아는 범주에서 정상인이라면 이런 말은 하지 못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말을 하고도 살해당하지 않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될 정도라고 봅니다.


위의 예시와 같은 경우를 포함해 누군가에게는 별거 아니라고 생각되는 일이 누군가에게는 인생 전체를 부정당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되기도 합니다. 같은 상황이어도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차이가 발생하지요.


이렇듯 상식적으로 도무지 긍정할 수 없는 상황, 또는 각자마다 다양한 이유로 긍정할 수 없는 상황들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이들에게 제가 해석한 '긍정'은 폭력이며, 오히려 '절망'으로 이끄는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이전에 제가 운동하다 다치곤 우울증에 빠져 온 몸에 튼살이 생기고, 집밖에 두세 달 동안 단 한 걸음도 안 나가게 됐을 때 누군가에게 들었던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과 별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즉, 제가 이전에 정의한 '긍정'과 '부정'은 이론적으로야 맞을 수 있지만 이상적인 결과물에 가까우며, 저조차 현실에 적용하지 못했기에 죽은 지식이 돼버렸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어찌 보면 저도 틀렸던 겁니다.


그렇다면 진짜 '긍정적'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저 이상적인 단어로만 존재하는 걸까요?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에서나 가능할까요?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에서만 가능한 것인가요?


아닙니다. 그럴리가 없죠.

그랬다면 '긍정'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자주 사용되는 일은 없었을 겁니다.


누군가는 자식이 죽으면 절망에 빠져 자살을 하기도 하지만 누군가는 '회복'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 '회복'이라는 게 슬퍼하지 않는다거나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분명한 건 절망에만 빠져 있는 게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고, 다시 웃기도 하는 '회복'을 이뤄낸 이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의 존재만으로도 '긍정'이라는 것이 이상적인 개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죠.


그러니 '긍정'은 실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제가 경험한 일도 긍정적으로 한 행동이기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긍정'이 정확히 어떤 것이며, 어떤 식으로 나의 삶에 적용할 수 있는지 그 구체적인 방법을 알아봐야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니까요.


이전 글 '긍정과 부정'에서는 '긍(肯)'을 '당연하기에 즐기지 않으면 방도가 없다'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러나 좀 더 찾다 보니, 실제로 중국에서 사용되는 '긍(肯)'은 '수긍하다, 기꺼이 받아들이다'라는 의미로 쓴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부분은 저에게 매우 중요한 단서가 됐습니다. 중국에서 '수긍하다'로 발전했다는 점만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한국에서의 의미인 '즐기다'만으로는 해석에 있어 부족함을 느꼈고 한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해석함에 있어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은 어느 한쪽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애시당초 단어 자체에 그 의미가 있었고, 지역에 따라 주되게 사용된 의미가 달라진 것 뿐이죠.


이를 바탕으로 보자면 저에게 주어진 '긍정'이 무엇인지에 대한 힌트가 늘어났습니다.

'긍(肯)'이라는 글자에 '당연하다, 즐기다‘에 ’수긍하다'라는 의미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 것이죠.


그렇다면 단순하게 조합해 보지요.


당연하기에 즐기고 수긍하게 되는 것일까요?

당연하기에 즐거우니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왜 아닐까요?

저도 처음엔 순서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가볍게 지나쳤었습니다. 이게 정답이라고 생각하며 열심히 써내려갔죠.


그런데 그 결과가 이전에 쓴 '긍정과 부정'의 내용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에는 그게 정답이라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습니다.

정답이라기엔 저부터 석연치 않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쓴 내용을 지우고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어느 부분이 틀린 건지를 알게 됐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기에 자연스럽게 지나치게 된 단어가 있었습니다.


바로 ’당연하다‘라는 말입니다.


아마 물음표가 마구 찍히시는 분도 계실 테고, 느낌표가 마구 생성되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네. 그렇습니다.

너무도 당연하기에 ‘당연하다’를 지나쳐 버린 겁니다.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그건 당연한 거지!' 하는 것이 있을 겁니다. 그렇죠?

그럼 그 ‘당연한 것’은 무엇인가요?

이 질문을 듣고 각자마다 떠오르는 ‘당연한 것’들이 있을 겁니다. 그것을 머리 속에 꽉 잡아 놓고 다음 질문을 보시죠.


그렇다면, 그 ‘당연한 것’은 세상 그 어떤 누구라도 단 한 명의 예외도 없이 똑같이 동의를 하며 ‘당연하다’고 말하게 되는 것인가요?

아마 대답은 ‘아닐 것이다’일 겁니다.


물론 누군가는 '아닌데? 모두 다 당연하다고 할 내용인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 간단히 예시를 들어 물어보죠.

'지구는 둥근 게 당연하다 생각하시나요?'


이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과학적 사실을 기반으로 했고, 또 실제 사진과 영상이 있는 내용이기에 모두에게 당연할 겁니다.


그러나 이는 틀렸습니다.

어찌 보면 재밌기도 하겠지만, 미국에는 지구의 모양이 원의 형태가 아닌 평평하다는 것을 아주 진지하게 믿고 신념으로까지 삼는 사람들이 모인 단체가 있습니다.

즉, 이 당연한 걸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고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상에는 당연한 게 없다'는 겁니다.

물론 이 말에는 빠진 단어가 있습니다.

‘모두에게’이죠.


세상에는 모두에게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예외적으로는 있을 수도 있지 않냐?' 싶으시겠지만, 보다 정확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두 또는 다수에게 당연한 것은, 그 ‘당연한 것’이 완벽히 일치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비슷함'을 의미합니다. 마치 '우리는 서로 사랑해요'라고 말하는 연인조차 서로 사랑의 정의가 다른 것처럼 말이죠.


그러니 ‘당연하다’는 객관적이 아닌, 매우 매우 '주관적인' 단어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 '주관적'이라는 것이 '긍정'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 이유는, 당연한 것이기에 수긍하게 되고 즐기게 되는 것만은 아니게 된다는 점입니다.


아니, 실상은 처음부터 당연하기 위해서는 주관적으로 타당하고 논리적이어야 수긍할 수도 있고 즐길 수도 있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당연하다’고 여겨지게 되는 겁니다.


즉, 수긍하게 되니 즐겁기에 당연하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 당연한 것을 보니 즐거워져 수긍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거죠.


그러니 '긍정'은 '정해진 것을 즐기는' 게 아닙니다.

'즐거운 것, 즐길 것을 정한다'는 겁니다.

이 둘의 차이는 명확합니다.

전자는 수동적으로 벌어진 것을 '즐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

후자는 주체적으로 즐기기 위해 노력할 필요 없이 '즐거운 것을 정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제가 해석해서 내린 이 '긍정'의 정의는 합리화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또 다시 죽은 지식이 될 확률이 매우 높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한 것을 즐기다’는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정의였다면, ‘즐거운 것을 정하다’는 악용될, 자의적 해석이 일어나기 너무 쉬운 정의라는 겁니다.


어찌 보면 사자성어인 '감탄고토(甘呑苦吐)'의 내용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다’처럼 즐거운 것만 정하는 게 긍정 아니야?'라고 말하기가 너무 쉬워지는 것이죠.


이것이 잘못된 가장 큰 이유는 '긍정'은, '긍정적'인 것은 이기적인 게 아니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긍정적'인 사람을 보고 이기적이라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미친 사람 취급할 수는 있다지만, 그 취급조차 이기적이어서 미친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당연한 것’을 하지 않기에 그렇게 보는 것이죠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긍정'은 이기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타적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긍정적'인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아지거나 웃음이 나게 되기도 하기에 그렇습니다.


물론 누군가는 '긍정적'인 사람을 보며 ‘왜 불행해 하지 않아? 고통스럽지 않아?’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것은 지금은 다루지 않겠습니다.

지금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긍정'이 무엇인지 명확히 하는 게 우선이기에 그렇습니다.


다시금 돌아와서, 위에 언급한 이유로 현재 나온 '긍정'에 대한 해석에는 놓친 부분이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해석 자체가 틀렸다고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는 겁니다.


이는 이전에 쓴 '긍정과 부정'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적용하기 어려운 죽은 지식이지만 틀렸던 게 아닙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당시의 저에겐 너무나도 ‘당연해서’ 활용하는 방법을 생각조차 못했다고 봅니다.

아마 이 글의 마지막 즈음에는 이전에 한 해석까지 활용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그렇다면 제가 놓친 부분은 무엇일까요?

‘즐거운 것을 정하다’에 빠진 부분은 무엇일까요?

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긍정’이 필요한 상황은 언제일까요?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되는 상황은 언제였죠?


네. 맞습니다.

'부정적'인 상황입니다.


우리는 평상시나 즐겁거나 행복할 때에는 '긍정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긍정' (즐거운 것을 정한) 상태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긍정’이 필요한 순간은 ‘부정적'일 때입니다.

그리고 이 말은 ’긍정‘이란 단어 자체가 ‘부정’에서 나온 말이라는 겁니다.

'이 무슨 엉터리같은...'

이런 생각이 드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모두가, 저조차 놓치고 있던 사실이 바로 현재 사용하는 '긍정'이 '부정'을 전제로 해야지만 이뤄진다는 겁니다.

즉 실상은 거절하고 싶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상황이 '먼저'라는 것이죠.


일전에 든 예시처럼 제가 운동을 하다 다친 상태가 아니라, 잘하고 있고 제가 원하던 몸을 만들었어도 그런 저를 보고 친구가 '긍정적으로 생각해'라고 했을까요?

절대로 그런 말을 하지 않았겠죠.

이번에 제가 다치고 아팠을 때 한 행동들과 판단들이, 안 다치고 안 아팠다면 필요했을까요?

전혀 아니겠죠.


이렇듯 '긍정'이 사용되고 필요한 순간은 무조건 '부정적'인 상황인 겁니다. 즉, 제가 한 해석에 놓친 부분을 더한다면

'긍정'이란 ‘부정적인 상황에서 즐거운 것을 정하다‘인 것이죠.


그런데 말입니다.

'부정적'인 상황에서 '즐거운 것'이 있을까요?

자신에게 당연한 것을 수긍하는 것은 누구나 하겠지만, 당연한 것이 없는 상황에서 수긍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또다시 죽은 지식을 만들어 낼 뻔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죠.


앞서 '당연한' 것은 '주관적'이며, 그에 따라 '즐거운 것을 정한다'는 뜻은 '주체적'이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니 '긍정'은 '주체적'인 단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제가 ‘주체적’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유는 이게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말하죠. '당연한' 것은 '주관적'인 생각입니다.

'즐거운 것을 정할 수 있다'는 것은 '주체적'인 행동입니다.

그렇다면 '긍정'은?

'주관적인 생각과 주체적인 행동을 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주관적으로 '당연하다' 생각드는 것,

그렇기에 즐거운 것을 ‘할 수 있다’는 것,

그게 바로 ‘긍정’입니다.


즉, '내가 정하고 할 수 있다'는 말은 ’선택권은 여전히 나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즐겁지 않은 것을 거부하다’


여러분 너무 재밌지 않습니까?

제가 썼지만서도, 쓰면서 속이 시원해져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긍정'인데 '거부'를 하다니요.

'즐겁지 않다고 거부를 하다'니요.

저는 정말로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긍정적'인 사고에 ’거부‘가 들어있다니요.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거부’는 '부정'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부정’부터 다시 뜯어가며 알아봐야 합니다.


이전 글 '긍정과 부정'에서는 '부정'을 '제3자 입장인 것처럼 내가 관여하지 않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내가 선택하고 나로부터 발생한 일임에도 내가 관여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죠.


이는 이전 글에서 해석했던 '긍정'처럼 ‘부정’ 또한 죽은 지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론적으로 틀린 건 아닙니다. 현실에 적용하기 힘들기에 틀린 것에 가깝게 느껴지는 것이죠.


예전에 친형이 차를 몰고 밤에 고속도로를 가다 사고가 난 일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터널에서 잘 가던 앞차가 갑작스럽게 차선 변경을 하기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찰나, 눈 앞에 거대한 물체가 보였고 급하게 차로를 변경하려 했지만 물체에 걸려 차가 뒤집혀졌다고 합니다.

차는 완파됐지만, 정말 천만다행이게도 형은 조금만 다쳤으며 불구가 되거나 영구적인 장애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이 사고에서 잘못은 형에게 있을까요? 아닙니다.

전혀 아니죠. 그 물건을 떨어트린 사람에게 원인이 있습니다. 형은 말 그대로 사고를 당한 겁니다. 물론 전방 주시 태만이라고 말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잘 가던 앞차가 갑자기 차선 변경을 한다면 잠깐이나마 시선이 따라갈 수는 있는 것이죠. 특히나 밤에 한적한 도로고 익숙한 길이라면 누구나 그 정도의 실수를 할 수 있으니까요.


즉, 일어난 사고에서 아예 형의 책임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실수가 이해 못할 범주도 아니며, 원인 자체가 형은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나 만약에 형이 그 사고로 죽었다고 해보죠.

제가 덤덤하게 받아들였을까요? 아니었을 겁니다.


처음에는 형 탓을 했겠죠.

'그러게 진작 낮에 출발하지, 조심 좀 하지' 하면서 더 이상 못 보는 형이 그립고 보고 싶어서 죽은 형에게 화를 냈을 겁니다.


그리고 이내 제 탓을 하겠죠.

'내가 일찍 깨웠다면... 운전 조심하라고 말이라도 할 걸... 내가 운전할 걸...' 같이 말입니다.


또 형이 살아남긴 했지만 장애가 생겼다면, 형도 비슷했을 겁니다. 처음에는 그 물체를 떨어뜨린 이를, 그 다음엔 갑자기 차선을 바꾼 앞차를, 튼튼하지 못한 차를 욕하겠죠.


그러고선 끝내

'일찍 갈 걸... 조심 할 걸... 이상하다 생각했으면 뭐때문인지 빨리 살펴볼 걸...' 같이 자책을 했을 겁니다.


이처럼 부정적인 상황이 발생한 후에는 보통 후회를 하게 됩니다. 왜 후회를 할까요?


일이 벌어지고나면 이전에 할 수 있던 것들, 내가 하지 않았던 것들을 깨닫게 되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들을 한다고 사고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고는 확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확률 자체는 낮아지긴 했을 겁니다.


그러니 이전에 얘기했던 '긍정과 부정'에서 '제3자의 입장에서 본다'고 말한 것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단지, 부가적인 설명이 매우 부족한 표현이었을 뿐이죠.


그리고 이 부족한 설명이 이전의 해석을 받아들이기 어렵게 만든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즉, 앞서 '긍정'에 대해 말한 거와 같이 '부정'에 대한 이전의 해석 역시 이상적이고 비현실적인 얘기인 것이죠.


실제 세상에 외부로부터 발생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제가 이번에 운동하다 다치게 된 이유나 형이 겪은 일처럼 실질적으로는 외부에서 발생되어 피해를 입는 경우가 대다수이겠죠.


그렇기에 제가 이전에 쓴 '부정'은 이론적으로는 타당할지라도 죽은 지식입니다. 현실에서 적용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적용하기 위해선 한 발 더 들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한 발은 앞서 '유학?일기'에 적은 '否 아닐 부'에 대한 추가 해석을 더해 보는 것이겠죠.


'부정(否定)'에 쓰이는 '아닐 부(否)'는

'현재 아니라고 입밖에 소리내어 선언하는 효과를 가진다'고 말했습니다.

미래에는 바뀔 수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 확정되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겁니다.


즉, 벌어진 상황을 제3자 입장에서 보며,

내가 정한 게 아니라고 선언하며 말하는 것.

이것이 ‘부정’인 겁니다.


이전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일까요?

그러나 여기에는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습니다.

아니라고, 내가 정한 게 아니라고 말한다 한들 실상은 내가 정한 게 없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분명 누구나 찰나라도 후회를 했을 겁니다. 그리고 후회를 한다는 것은 내가 정한 것에도 실수가 있다는 겁니다.

당연히 중심이 되는 원인은 다른 곳에 있지요.


처음 제가 다치게 된 예시의 그 남성분이나, 제 형의 사고에서 거대한 물체를 떨어트린 사람처럼 직접적인 원인은 따로 있습니다.

하지만 말로는 다른 것이 원인이라고 말하면서도, 한 번쯤은

‘그 때 그 자리에, 그 순간에, ~~하지 않았더라면’

하고 후회하게 된다는 것이죠.

여기에 더해 실제 피해를 본 것은 자신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자신과 문제의 실제 원인 중,

상황이 벌어지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내가 '바꾸기 쉬운 것'은 어느 것일까요?'


자신입니다.


누군가 갑자기 나를 공격한다 했을 때 '그 장소로 안 가는 것'과 '그 사람이 나를 때리지 못하게 하는 것'을 놓고 생각해 보면 쉽게 답이 나옵니다.


이것만으로 끝이라면, 제가 엄청 큰 차이가 있다고 얘기하진 않았을 겁니다. 앞서 말한 '긍정'이나 지금 말하는 '부정'이나 둘 다 기본적으로는 '부정적인 상황'에서 발생합니다.


이 '부정적인 상황'이란 자신의 영향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본적으로는 나를 제외한 외부로부터 발생한 원인 때문이라고 느끼기에 '부정적인 상황'이라고 표현하는 것이죠.


그리고 앞서 말한 '긍정'의 숨은 뜻인 ‘즐겁지 않은 것을 거부하다’와 '부정'은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둘의 차이는 '상황을 해결하는 방식'에 있습니다.


‘거부‘하는 것은 벌어진 일에 있어서 '자신의 영향이 있음'을 '인정'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결'은 '내가 원하는 식으로 하겠다'는 겁니다.


이는 일어난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나'에게로 가져와 '주체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이죠.


’부정‘하는 것은 벌어진 일에 있어서 '자신의 영향이 없음'을 '선언'하는 겁니다.

그러니 '해결' 또한 '남이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죠.


이것은 일어난 상황에 대한 '주도권'을 '포기'하는 행위에 가까운 겁니다. 그리고 이는 '주체성'을 '거부'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낳게 됩니다.


‘자신은 이 일에 상관없다고.. 너 때문이니 네가 해결하라'고 선언하는 것이니 말이죠.


이러한 선택은 점차 주변인들이 자연스럽게 내게 선택권을 주지 않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없음을 선언한 이에게 누가 선택권을 줄까요?

선택권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죠.


이 '부정'의 편리함은 점차 스스로를 세뇌하게 되고, 같은 일이 반복되더라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즐겁지 않은 것을 거부할 수도 없게 됩니다.


이때부터는 '상황에 의해' 내 행동들이나 사고방식이 '고정'되고 '결정'되기 시작합니다. 그럼에도 주체성을 이미 포기한 상태이기에 벗어날 방법이 생각조차 나지 않게 되는 겁니다.


정리하자면,

'부정'은 '내가 정하지 않았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부정'은 주변에게 나의 주도권을 내줌으로써 실상은 '나'까지 포함되어 있기에 벌어진 일인데도, 내가 완전 '남'이 되는 '제3자의 자리에 서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는 결국 나에게 있던 '선택권'을 '포기'하는 것과 같아지는 것이죠.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이제 다시 '긍정'으로 돌아가보죠.


'긍정'은 '부정적'인 상황일 때 필요한 겁니다.

내가 정하지 않았고, 선택권이 없는 상태일 때

내가 '주체적'으로 움직이는 것.

이것이 바로 '긍정'인 겁니다.


반대로, 같은 상황에서 선택권이 없으니 주체성을 포기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부정'인 것입니다.

예전에 쓴 예시인 운동하다 다쳤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죠.


내가 다치려고 운동을 한 게 아닌데 결과적으로는 운동 때문에 다쳐버렸으니 '운동 자체를 쉬자, 이참에 막 먹자' 같은 도망치는 선택지만 보게 된 겁니다.

결국 더 뚱뚱해지고, 더 자신감을 잃게 되었죠.


더 뚱뚱해진 게 운동 탓일까요?

아니죠. 제 탓입니다.


제가 선택한 것 아니냐구요?

맞습니다. 제가 선택해서 살이 찐 거죠.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는 것을 포기한 건 누구죠?

그 또한 접니다.


제가 포기했기에,

'어깨를 다쳤으니 하체 운동을 하자,

허리를 다쳤지만 덜 먹자'

이런 것을 '선택할 권리'를 '포기'한 건

바로 '나'라는 뜻이죠.


이처럼 그간 '부정적'인 사고를 해왔을 때, 단 한 번도 좋은 결과를 얻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처럼 비교적 사소한 일에서도 즐거운 것을 정하는 '주체적인 선택'을 하기란 매우 어렵다는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즐거운 것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전과 똑같이 운동하다가, 그것도 진짜 외부로부터 발생한 부정적인 상황에 의해 부상을 입었음에도 운동을 쉬거나 식단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일 년 전과의 차이라면, 단 하나뿐입니다.

바로 '제가 즐거운 것을 정하고 실행했다'는 겁니다.


'다쳤기에 즐겁지 않은 운동을 안한다'거나

'식단을 포기해 다이어트를 실패한다'를

'선택'한 게 아니란 것이죠.


그러나 사실 '긍정'에서 제일 어려운 것은 '정하는 것'이 아니라, '즐거운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도대체 '즐거운 게 무엇이냐'는 겁니다.

즐거운 것을 정확히 모르니 떠오르지도, 정하기도 매우 어려워지죠.

그러니 비교적 쉽고 편한 '부정'을 선택하게 되는 겁니다.

그 결과가 자기파괴적 행위로 이어진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렇기에 지금부터 '즐거운' 게 뭔지 제대로 알아봐야겠습니다.


즐겁다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흐뭇하고 기쁘다


국어 사전에 나온 '즐겁다'의 뜻입니다.

저도 처음에는 '흐뭇하고 기쁘다'에만 초점이 맞춰져서 ‘즐거운 게 즐거운 거지’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게 바로 제가 늘 경계하던, 느낌으로만 단어를 사용하던 것이라는 것을 이내 깨달았죠.


여기서 주의깊게 봐야 할 부분은 '흐뭇하고 기쁘다'가 아니라 '마음에 거슬림이 없다'입니다.

거슬림이 없기에 흐뭇하고 기쁜 것이죠.

그저 아무 것도 없이 흐뭇하고 기쁜 것이 즐거운 게 아니라는 겁니다.


거슬리다

순순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언짢은 느낌이 들며 기분이 상하다


이것을 바탕으로 '거슬림이 없다'는 것을 본다면,

이는 '순순히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즐겁다'는 '마음에 순순히 받아들여져 흐뭇하고 기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부정적'인 상황에서 마음에 순순히 받아들여져 흐뭇하고 기쁠 일이 뭐가 있을까요?


앞서 말한대로, '부정적'인 상황에 자신의 영향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그 상황이 마냥 흐뭇하고 기쁠 수는 없습니다. 이미 피해를 봤기에 더더욱 그렇죠.


이렇기에 여기서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는 대상은 그 상황 자체가 아닙니다. 흐뭇하고 기쁜 것과 도저히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죠.


'그렇다면 흐뭇하고 기쁠 일이 뭐가 있을까?'


우선 '흐뭇하고 기쁜' 게 무엇인지부터 알아보겠습니다.


흐뭇하다

마음에 흡족하여 매우 만족스럽다


기쁘다

욕구가 충족되어 마음이 흐뭇하고 흡족하다


'흐뭇하다'와 '기쁘다' 둘 다 대략적으로 보면 전하고자 하는 내용에 큰 차이가 없게 느껴집니다. 어찌 보면 '흐뭇하고 기쁘다'는 것은 그 의미가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러나 딱 하나가 다릅니다.


바로 ‘욕구가 충족되다’라는 부분이죠.

그리고 이것이 '즐거움'에 있어 핵심이 된다는 걸 알아차렸습니다.


욕구(欲求)

무엇을 얻거나 무슨 일을 하고자 바라는 것


사실 '욕구'는 한자에 따라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위에 언급한 것처럼 '무언가 실현되길 바라는 이성적, 의식적 바람'을 의미하는 것이고,

두번째는 '감정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리고 '기쁘다'에서 사용된 ‘욕구’는 당연하게도 본능적인 욕망이 아닌 전자의 의미인 '바람'을 나타내는 것이죠.

즉, 욕심에서 기반되는 것이 아닌, 이성적이고 의식적으로 바랐던 것이 충족되어 마음이 흐뭇하고 흡족한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앞서 설명했던


'거슬림이 없다'는

'마음에 순순히 받아들여짐'을 의미하고,


'흐뭇하고 기쁘다'는

'이성적이고 의식적으로 바랐던 것이 충족되어

마음이 흐뭇하고 흡족한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이제 이 둘을 합쳐 본다면 '긍정'에서의 '즐거운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죠.


'이성적이고 의식적으로 바랐던 것이기에

마음에 순순히 받아들여져

흐뭇하고 흡족한 상태'


이것이 바로 '즐거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부정적'인 상황이 발생하면 우리는 이성적이고 의식적이지 못하게 된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는 그 상황에 당황하며 감정적이고 본능적으로 판단을 내리고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죠.

앞서 말씀드린 예전 예시처럼 다친 것에 분노하며 운동을 쉬고 제가 먹는 걸 선택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기에 문제가 발생한 바로 그 순간에는 이성적이고 의식적으로 사고하여 ‘새롭게 바라는 것’을 찾는 방법은 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아니, 그 순간에 새롭다고 생각되는 것은 오히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미 감정과 본능에 오염돼 있을 확률이 높죠.

그렇다면 '긍정'은 불가능한 걸까요?


아닙니다. 다만,

그 순간에 해야 할 것은 새로운 것을 찾는 게 아닙니다.


바로 그 일이 발생하기 전,

내가 바랐던 것,

가장 이성적이고 의식적이던 때에 원했던,

바로 그것을 다시금 떠올리는 겁니다.


여행을 가는 도중 차 사고가 났다고 해보죠.

차 사고가 나기 전에 내가 이성적이고 의식적으로 바랐던 것은 여행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 차 사고라는 '부정적' 상황 이후에는 새롭게 할 것을 찾기보다는, 이전에 바랐던 여행을 재개할 방법을 생각해 보는 것이죠.


물론 차 사고라 함은 누군가는 크게 다치기에 거동조차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여행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는 것이죠.

일반적으로는 이런 사고 방식에 빠져 도저히 '긍정'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성적이고 의식적으로 바랐던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보죠.


기존에 설정한 목적지를 가는 것이 ‘여행’일까요?

아니면 어딘가로 떠나는 것이 ‘여행’일까요?


네, 목적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기존에 있던 곳을 '벗어나 떠나는 것'이

'여행'입니다.


이번에 제가 한 선택도 같은 선상에 있습니다. 제가 운동을 하고 식단을 하는 이유는 살을 빼기 위해서였습니다.

살을 빼는 것이 주된 목적이며 이를 위해 선택한 행동들이 운동과 식단인 것이죠.

이때 제가 다침으로써 예전에는 운동과 식단 둘 다를 포기한 겁니다. 감정적으로 행동하고 선택한 것이죠.


반대로, 이번에는 똑같이 다친 것에 분노했지만

제가 이성적으로 의식적으로 바랐던 것인 '살 빼는 것'을 바로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식단조차 실패할 수 있었던 병에 걸려서도 마찬가지였죠.

제가 '즐거운 것'(살 빼는 것)을 하기로 정했기에, 둘 다를 현재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겁니다.


즉, '즐거운 것'이란

부정적인 상황이 벌어지기 이전에

내가 처음 목표로 삼았던 것,

평온한 상태일 때 바라던 것,

그것이 바로 '즐거운 것'입니다.


그렇기에 '긍정'이란

'부정적'인 상황임에도 감정과 본능에 휩싸이지 않고

내가 정말 원하고 즐거운 것을 정하는 것,

그리고 이러한 사고 방식을 하는 게

바로 '긍정적' 사고인 것이죠.


여기에 더해

‘즐거운 것을 정하는 긍정’을 하면 이전에 말한

‘정해진 것을 즐기는 긍정’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금 정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긍정'은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상황에서 발생합니다.

그러니 그 상황의 내가 '부정적'이게 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오히려 '부정적'인 상황인데 '부정적'인 사고를 하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할 수 있죠.


그러나 그 결과는 즐겁지 않습니다. '부정적'인 사고 방식의 결과물은 언제나 자기파괴적인 현실을 마주하게 만들죠.

이 또한 원하던 것이 아니며 바라던 것이 아닙니다.

즉, 후회를 하게 만든다는 것이죠.


'긍정'은 '부정적'인 상황에서 '즐거운 것'을 ‘새롭게’ 찾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적' 상황이 발생하기 이전의 평온한 내가

이성적이고 의식적으로 바라던 것. 바로 최초의 욕구,

그것으로 돌아가 다시금 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러한 '긍정'이라면, 초반에 들었던 예시인 자식이 죽은 부모도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즐거운 게 있을 수 없을 겁니다. 단언컨대 사람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부정적인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럼에도 한번 떠올려 보도록 노력해 보죠.

평온한 상태, 즉 자식이 살아 있을 때 자신이 가졌던 최초의 욕구, 이성적이며 의식적으로 바라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말이죠.


아마 대부분의 부모들이 바라는 것은 '자식이 행복했으면 좋겠다'일 겁니다. 자식이 오래 사는 것도, 건강하길 바라는 것도, 잘 되길 바라는 것도, 전부 자식이 행복했으면 좋겠기에 바라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자식이 행복한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부모님이 행복한 것입니다. 자신이 사랑하는 부모님이 행복하게, 오래도록 건강하시길 바라는 것이 자식의 행복입니다. 그러니 자식이 죽었더라도, 자식의 행복을 위해서는 자식이 사랑해 마지 않는 부모 자신들이

행복하게, 오래 건강하게, 다 즐기며 사는 것.

이를 통해 오래도록 세상에 나의 자식이 존재했음을 기억하고 알리는 것.


이것이 최악의 상황에서 유일하게 최초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이며 '긍정'입니다.


이 밖에도 수 많은 사람이 다양한 '부정적'인 상황을 경험할 겁니다. 거기에는 최악인 경우도 많을 겁니다. 또, 같은 상황이라도 사람마다 다르게 받아들이겠죠.


그럼에도 후회할 일,

감정적이고 본능에 맡겨 결국 스스로를 파괴하게 되는,

즐겁지 않은 것을 거부하는 것.


그럼에도 즐겁기 위해

설정했던 목표를 잊지 않고 다시금 정하는 것.


그럼에도 정해진 것을 온전히 즐기는 데 집중하는 것.


외부에 의해 막히고 가려질지언정,

'나'라는 존재가 가지고 있고 온전히 누리는

'나'의 주체성을 잊지는 않겠다는 선언.


이것이 바로 '긍정'입니다.


제가 해석한 ‘긍정’ 그 어디에도 '일어난 상황에 의한 감정을 거부하며 즐거운 것만 생각하라'는 말은 없습니다.

'부정'도 마찬가지죠.

내가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고 방식으로 '제3자의 위치로, 선택권조차 내팽개치고 도망가지는 말라'는 겁니다.


그러니 슬프면 마음껏 슬퍼하십시오.

울고 싶으면 펑펑 울어도 됩니다.

화내고 싶으면 실컷 화내고,

짜증이 나면 짜증을 내도 됩니다.

이 모든 감정 또한 그 순간에 충실하다는 의미니까요.

당연한 겁니다.


그러나 끝난 뒤에는 잊지 않고

내가 원했던 자리로,

즐거웠던 자리로,

내가 정했던 곳으로,

다시금 가는 겁니다.

제자리로 가면 되는 겁니다.


내가 즐기려고 정한 것은,

내가 정했기에 즐기려는 것은,

감정이 아니니까요.


부디 제가 알아낸 '긍정'이

미약하게나마

도움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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