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의 작은 메모들
부모님의 맞벌이로 인해 나는 할머니의 손에 자랐다. 아침 준비부터 학교 준비물, 심지어는 숙제, 목욕, 잠자리까지 모두 할머니의 몸이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할머니를 의지했다. 부모님처럼 의논하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도 이야기했다.
하지만 내가 자라면서 할머니도 점점 나이가 드셨다. 시력도 나빠지고 귀도 잘 들 리지 않아 내 목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머리가 하얗게 변했는데도 할머니는 어깨가 아프시다며 염색할 엄두를 못 내고 계셨다. 나는 내가 할머니 염색을 도와 드린다 고 했다.
집 앞에 있는 마트에 염색약을 사러 갔다. 돌고 돌아도 무엇을 사야 할지 몰랐다. 아무리 봐도 뭐가 뭔지 몰라 직원에게 짚어 보이는 것으로 달라고 했다. 나는 염색을 하고 나면 십 년은 젊어 보일 할머니를 생각하며 육상 선수처럼 달렸다. 집에 돌아와 햇볕이 잘 들어오는 창가에 의자를 놓았다. 할머니는 기꺼이 나에게 머리를 맡겼다. 흰머리가 보였다. 숲에 염색약을 묻혀 흰머리를 넘겨가며 발랐다.
머리는 점점 예쁜 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할머니는 엄청 좋아하셨다. 손자가 커서 염색도 해 준다며 흐뭇해하셨다. 일색을 마치고 머리를 감고 나온 할머니는 갑자기 말이 빨라지며 말도 쿵쿵거리는 것 같더 니 급기야 소리를 질렀다. 욕실에도, 할머니 머리에도, 온통 붉은 꽃이 피었다. 질 어 보이는 책을 달랬더니 내가 염색하는 줄 알고 점원이 빨간색을 준 것 같다. 확 인 없이 그냥 염색을 하는 바람에 할머니는 빨강 머리 앤이 되어버렸다.
그 이후에도 나는 계속 할머니 머리를 염색해 주었다. 우리 반 친구들을 보면 할머 니가 집에 오는 길 싫어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냄새 난다고 싫어하고 잔소리 한다 고 싶어하고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싶어하고 이유가 많았다. 냄새나도 좋고 잔소리 해도 좋다. 곁에만 계신다면
할머니는 지난봄에 내가 입색해 준 까만 머리를 하시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지금은 할머니를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다. 마음이 아프다.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내가 슴 속에는 할머니와의 추억이 담긴 또 다른 일기장이 있다. 맑음도 있고 흐림도 있 다.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고 추억으로 만난다. 검은 머리를 하신 길가의 할머니들을 볼 때마다 빨간 물이 들며진 할머니의 뽀글 머리가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