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화의 작은 메모들
우리 집의 풍경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있었다. 칠흑 같은 밤이면 인간의 본능을 잃은 채 기어들어오던 아버지. 내게 세상에서 가장 강하고 멋있던 아버지는 회식을 마치면 가장 초라한 어른이 되어있었다. 하루와 하루가 겹쳐지는 경계의 시각. 아버지는 집에 들어서자 내 이름 대신 술을 먼저 찾았다.
맥주 한 병 가져와라는 늘 똑같은 말과 명령. 멀쩡한 쇼파 위에 앉지 않고 앞에 기대는 아빠의 자세도 늘 한곁같았다. 알람소리처럼 반복되는 소리에 잠결에서 끌려나온다. 눈을 뜨니 옆에 자장가를 부르다 자기 목소리에 안긴 채 이미 잠든 어머니가 보인다. 아버지는 허기를 참지 못한 짐승처럼 같은 말을 끈질기게 되니었다.
“맥주... 맥주...”
꿈결의 잠들었던 공기의 파동이 일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의 무궁무진한 호기심도 깨어났다. 나는 엄마가 깨지 않게 사뿐사뿐 마루로 나갔다. 양복은 소파 손잡이에 걸쳐있었지만, 정작 기대고 있어야 할 아버지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하루의 중력에 패배한 모습이었다. 문뜩 물음표가 생겼다. 맥주가 대체 무엇이기에 몸 하나 가누지 못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걸까. 말썽만 부리는데 이상하게 미워지지 않는 짱구처럼 자꾸 눈길이 가는걸까. 한 번 먹기 시작하면 끝이 없는 사과 맛 젤리처럼 계속 찾게 되는 걸까. 굉장히 맛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아는 단어는 많지 않았다. 세상은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것들로 가득했다. 숫자 역시 백을 넘어서면 그 너머는 상상 속으로 흩어졌다. 그게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의 크기였다. 하지만 ‘맥주’라는 말은 어딘가 익숙했다. 기억을 더듬는다. 얼마 전 텔레비전 먹방 프로그램에서 노란색 물 같은 것을 맥주라고 부르던 장면이 떠올랐다.
나는 기억 하나를 꼭 쥐고 부엌으로 향했다. 찬장 위, 싱크대, 냉장고에도 노란색 물은 보이지 않았다. 까치발을 있는 힘껏 세워 정수기에 손을 뻗었다. 버튼을 이것저것 눌러보았지만 모두 투명한 물뿐이었다. 장난감 버튼이었다면 진작에 답을 찾았을 텐데. 어른들의 장난감은 어렵고 재미도 없다. 노란색은 물을 무엇일까. 머리를 쥐어짜본다. 문득, 오줌도 노란색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하얀 거품도 일어난다. 왜 그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이에게 세상은 단순히 연결된다.
나는 컵 하나를 들고 정수기 버튼을 눌렀다. 내려오는 물에 뽀득뽀득 닦는다. 깨끗해진 컵을 보자 마음도 맑아진다. 바지를 내렸다. 있는 힘껏, 내가 가진 성의를 전부 쏟아 컵을 가득 채웠다. 컵 안에 노란 액체 위로 기뻐할 아버지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두 손으로 들고 아버지에게 내밀었다.
“캬, 역시 우리 아들이 최고다이!”
아버지는 아무 의심 없이 컵을 비웠다. 그러나 목을 타고 내려간 순간 세계는 즉시 붕괴했다. 걸걸한 기침과 함께 노란 물이 아버지의 입에서 바닥으로 쏟아졌다. 컵은 힘없이 깨져 마루 위에 내팽개쳐졌다. 액체는 사방으로 퍼져 바닥에 스며들었다. 깨어진 유리 조각들마이 그 자리에 초라함을 증명하고 있었다.
“아이 이게 뭐야!”
나는 아버지가 미웠다. 내가 짜낸 성의를,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이렇게 쉽게 내던지다니. 다음에는 절대 주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어른이 되는 연습을 이상한 방식으로 시작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