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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결핍은 성장의 가능성

by 흐름 Feb 04. 2025

  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어느새 막내작가로 일한 지 1년이란 시간이 빼곡히 채워지고 있던 날이었다. 보통의 회사에서는 3년, 6년, 9년 단위로 이직 욕구가 피어오르고 실제로도 이직을 가장 많이 하는 연차라고 하지만 방송작가도 동일하게 적용되는지 궁금해졌다. 이대로 3년을 채운다면 여기서 뭘 더 배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막내 작가 자리를 소개해준 언니와 점심시간을 쪼개 커피 한 잔 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보통 막내 작가는 얼마나 해요? 저는 여기서 얼마나 더 있어야 될까요?”라는 질문에 

“너 하고 싶은 분야 있어?” 되려 반문해 온다. 한 번도 던져 보지 않은 질문이었기에 꽤나 당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특정하게 뭘 하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은 마음만은 분명했다. 일이란 건,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익숙함은 일을 수월하게 처리할 능력은 갖출지 몰라도, 성장과 변화를 도모하는 힘은 약해지는 법이니까.


다양하게 해 볼 수 있는 기회는 연차 낮을 때가 유리하다며 너무 오래 있지 말라는 언니의 조언은 나를 더 흔들리게 만들었다. 하루아침에 야망을 위해 떠나겠다고 선언하고 뒤돌아 떠날 배짱은 없어서 메인 작가님께 면담을 요청했다. 마주 앉은 메인 작가님의 표정은 ‘요 놈이 무슨 얘기를 꺼낼까?’ 궁금해하는 눈치와 함께 폭탄선언은 아니길 바라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길지 않은 나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 메인 작가님의 얼굴 근육은 이완되고, 표정이 부드러워지는 게 눈에 보였다. 마치,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지 생각하는 승리자의 표정으로 말이다. 두 사람이 동등하게 가지고 있던 긴장감이 오롯이 한 사람의 몫이 되었다. 그 한 사람은 물론 나였다. 


다행히도 메인 작가님은 나의 고민에 대해 반박하며 설득하기보다 공감해 주셨다. 지금 시기의 그 고민은 당연한 것이며 시기적으로도 나를 놓아주어야 하는 게 맞다고. 무릎 위에 다소곳이 올려놓고 열 손가락을 서로 엇갈리게 바짝 깍지 끼고 있던 손의 힘이 조금이나마 풀렸다. 그렇다면 대화는 자연스레 끝지점에 대해 흘러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메인 작가님은 전혀 다른 카드를 꺼내 보이셨다. 그 카드는 나를 또 다른 걱정과 설렘이 공존하는 경계선으로 데려갔다. 카드명은 바로 ‘입봉’. 입봉이란 피디, 작가, 감독이 자신이 주체가 되어 ‘독립적으로’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여 선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그 첫 작품을 입봉작이라 한다. 방송 업계에 발을 들여놓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온갖 야근과 밤샘, 변수, 때로는 수모들을 견뎌 이겨내는 이유이다. 나만의 작품, 내가 주체가 되어 완성한 그 첫 작품이라니 생각만 해도 설렌다. 입봉, 단어 그 자체로 꿈과 푯대가 되어주는 그런 단어다. 


팀을 떠나더라도 너의 원고를 써보고 나가라고 하신 것이다. 지금, 내일 당장 나가도 되겠지만 원고를 써보고 나가는 것과 그냥 이 상태로 나가는 건 아마도 많이 다를 것이라는 게 이유였다. 작가계의 선배로서 경험을, 팀의 메인 작가로서 기회를 주는 선물처럼 느껴졌다. 혹여 어설픈 이유로 붙잡는다면 뒤돌아보지 않고 Say Good-bye의 타이밍을 고민했을 텐데 오히려 붙잡힐 이유만이 되돌아왔다. 


‘성장과 기회’. 바라 왔던 것인데 순간 덜컥 겁이 났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나는 사실 걱정 인형이다. 무언가를 선택하고 시작하고 저지르기에 앞서 굉장한 고뇌를 하는 타입이다. 이왕이면 최선의 선택을 하고 싶어서, 이왕이면 잘할 수 있는 능력, 지식과 같은 ‘자격’을 갖춘 뒤 도전하고 싶어서. 말은 그럴싸하지만 속내는 사실 굉장히 지질하다. 실패하기 싫어서, 패배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즉, 어떤 모양이든 못난 순간의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겁쟁이다.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로비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지나가는 자동차들을 바라봤지만 실상 속마음은 천사와 악마의 썰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성장하고 싶다며? 근데 막상 기회가 오니까 두려워? 앞으로 비슷한 기회가 왔을 때는 할 수 있을 거 같아? 다그치는 것 같지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는 T의 천사. 

두려우면 하지 마~ 지금 네가 그럴 실력이야? 괜히 어설프게 시작했다가 잘할 수 있겠어? 

마음 깊은 곳 내재되어 있는 두려움을 대변해 주는 천사의 얼굴을 한 악마. 


다행히도 후회 없는 선택을 했다. 팀에 남기로 했고, 입봉 기회를 붙잡았다. 과정 중에 모자란 나를 마주하는 것도 두려웠지만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주어졌을 때 같은 이유로 반복할 회피할 나를 더 버티기 힘들 것 같았다. 회피야 말로 성장과 반대편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고속도로일 테니까. 


몇 년 뒤 다른 팀에서 만난 메인 작가님이 음악 쇼 프로그램을 기획할 건데 같이 하자고 연락을 주셨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역시나 두려움이 앞섰고 걱정하는 그 마음 그대로 내색했다. ‘작가님,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나름 잘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독려를 기대한 푸념이었는데 작가님의 목소리의 온도가 급격히 냉각되었고, 푸념이 잘못된 것임을 직감했다. “누구야, 나는 고민하는 친구보다 열심히 하겠다고, 잘하겠다고 확신 있는 친구랑 일하고 싶어” 바로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를 약속드렸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란 말이 있지만, 굳이 실패하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왕이면 단번에 성공하고 싶은 게 모두의 마음 아닐까. 그런데 인생의 어느 순간들을 실패와 인생이라는 이분법으로만 나눈다면 이 잣대 앞에서 우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을까. 

처음 살아보는 인생에서 잘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겠냐 이 말이다. (급발진, 맞습니다) 


하는 것마다 잘하면(잘 되면) 너무 좋겠지만 우리는 AI가 아니다. 로봇이 아니다. 챗GPT가 아니다. 어딘가 모자라고, 허술하고, 부족하고 가끔은 실수도 하는 인간으로 태어난 게 우리의 존재이다. 완벽할 것만 같은 사람이 그러지 못한 면모를 보일 때 인간적이라고 말하기도 하지 않는가. 무심코 보인 그 틈을 야유하기보다 반가워하며. 


모자람, 부족함, 허술함, 엉성함 같은 결핍은 인간이 가진 성질이다. 그러니 괜찮다. 지금 우리가 가진 어떤 불완전함은 거부할 무엇이 아니다. 어느 순간 나의 결핍이 괜찮게 여겨졌다. 때로는 좋기도 하다. 결핍은 성장의 가능성이란 걸 깨닫게 된 뒤부터, 모자란 나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지지 않았다. 


실패와 성공이란 단어 대신 과정과 성장으로 대체해 보는 것은 어떨까. 애초에 인생에 정답이 없는데 실패한 인생도 성공한 인생도 있을 수 없지 않을까. 우리는 그저 모두 저마다의 성장 궤도에 서 있는 가능성 그 자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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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마카세] 화요일 : 읽히지 않은 인생

작가 : 세렌디피티

소개 : 긴 시간을 살진 않았지만 깨달음 중 하나는 야심 찬 계획은 기꺼이 어그러지며 삶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통제되지 않는 인생의 파편들은 마음에 흉터를 내기도 하고 의욕으로 곧게 서 있는 두 다리를 꿇어앉히게도 합니다 마음의 흉터는, 꿇어앉은 다리는 ‘인연, 우연, 기회’라는 전혀 다른 모양과 색깔의 가능성을 만나 아물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 걸어갈 힘을 얻으며 인생이란 팔레트에 스스로 낼 수 없는 다채로운 색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만났던 그리고 여전히 만나고 있는 ‘인연, 우연, 기회’를 들려드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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