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까똑’, 주말 이른 아침 명랑한 목소리가 아침잠을 깨운다. 메인 작가님으로부터 온 메시지라는 걸 확인하자마자 비몽사몽 잠결의 정신이 말끔해진다.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노트북 앞에 앉았다. 고생했다는 격려와 함께 내가 보냈던 원고 파일에 _2라는 숫자가 붙어 돌아왔다. _2는 한 번의 검토와 수정을 거쳤음을 의미한다.
언제 그만두어야 할지 고민하던 나를 붙잡았던 제안, 입봉. 40분 분량 방송 중 8~10분짜리 VCR을 쓰는 것이었다. 한편 방송의 분량을 오롯이 다 쓰는 것은 아니었기에 입봉이란 단어는 너무나 거창하고 대단하다. 그저 계단 하나를 올라선 정도의 변화와 도전이라고 명명하고 싶다.
감사하다는 답장을 보내고, 떨리는 마음으로 _2가 붙은 한글 파일을 저장 후 열기 버튼을 누른다. 화면 반쪽에는 내가 보냈던 파일을 열어두었다. 두 개의 원고를 비교해 가며 무엇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나름의 공부를 위해서다. 메인 작가님이 보내주신 파일이 열리는 순간 화면 반쪽을 차지하고 있던 수정 전 버전 파일의 닫기 버튼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비교 따위는 필요 없을 만큼 한 땀 한 땀 적었던 원고에 취소선이 쫙쫙 그어져 있고 빨간 글씨로 피드백 내용이 잔뜩 적혀 있었다. 주홍글씨나 다름없었다.
- 왜 이 순서로 구성했을까?
- 해당 내레이션 구간에서 더 보여줄 수 있는 그림은 없을까?
- 인터뷰 질문이 포괄적이다. 조금 더 첨예한 질문으로 바꿔볼까요?
- 이 인터뷰가 이 그림 뒤에 붙는 게 맞을까?
- 에필로그에 처음 보는 표현이다! 좋다!
- 같은 단어가 중복되는 표현들, 이건 자주 많이 써봐야 연습이 되는 것들이어요!
방 안에는 나 혼자 뿐인데 얼굴빛이 붉어지고 귀가 화끈거렸다. 한 번에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같은 건 하지 않았지만 주홍글씨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도 못했다. 마지막 칭찬은 바짝바짝 타 들어가는 마음을 달래는 톡 한 방울 떨어지는 작고 소중한 물방울 같았다.
다행히도 부끄러움은 바람처럼 잠시 머물다 떠나갔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며 며칠에 걸쳐 쓴 첫 원고를 채운 곳곳의 취소선과 빨간 글씨는 선배가 후배에게 하사하는 응원과 진배없었다. 후배의 첫 시작에 대한 선배의 관심, 결코 완벽할 수 없는 처음의 부족함을 보살피는 애정, 부족함을 나무라기보다 채워주는 따스함, 한 계단 올라선 발걸음이 두 계단 세 계단 더 올라갈 수 있도록 힘을 보태어주는 보살핌 같은 것을 취소선과 빨간 글씨가 대변해주고 있던 것이다.
후배의 작업물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짧은 말 한마디도 하지 않는 선배들도 더러 있다. 묵묵히 수정하신 깔끔한 대본을 돌려주실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선배의 침묵은 철창 속에 가두는 자물쇠처럼 느껴진다. 옴짝달싹 한 치의 움직임도 허락하지 않는 침묵.
현재의 부족함은 부끄럽지만 그 자체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계속 그 상태로 머물러 있는 제자리걸음이 두려울 뿐이다. 그래서 매주 _2, _3의 숫자들과 함께 돌아오는 취소선과 빨간 글씨들이 좋았다. 시간이 한참 지나 이만치 멀리서 돌아보니 취소선과 빨간 글씨에 아니 감사할 수 없다. 나도 후배에게 취소선과 빨간 글씨로 응원하고 힘을 보태고 성장을 견인해 줄 수 있는 선배가 되면 좋겠다. 나도 결코 혼자 크지 않았으니까.
[요마카세] 화요일 : 읽히지 않은 인생
작가 : 세렌디피티
소개 : 긴 시간을 살진 않았지만 깨달음 중 하나는 야심 찬 계획은 기꺼이 어그러지며 삶을 복잡하게 만든다는 겁니다 통제되지 않는 인생의 파편들은 마음에 흉터를 내기도 하고 의욕으로 곧게 서 있는 두 다리를 꿇어앉히게도 합니다 마음의 흉터는, 꿇어앉은 다리는 ‘인연, 우연, 기회’라는 전혀 다른 모양과 색깔의 가능성을 만나 아물기도 하고 다시 일어나 걸어갈 힘을 얻으며 인생이란 팔레트에 스스로 낼 수 없는 다채로운 색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만났던 그리고 여전히 만나고 있는 ‘인연, 우연, 기회’를 들려드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