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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퐁피두? 그게 뭔데요?

전시따라 이십삼만 리 : 전시가 어느 날 갑자기 나를 파리에 데려다주었다

by 흐름

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전시 하나 보러 비행기를 끊어 본 적이 있나요

저는 있습니다. (당연함, 있으니까 이 글을 쓰고 있음) 작년에는 파리와 런던을, 올해는 도쿄를 다녀왔다. 내년에는 독일이나 네덜란드를 가고 싶다는 생각은 있지만 확실하지 않고, 아마 어디든 그때 나의 심장이 향하는 곳으로 훌쩍 다녀오게 될 것 같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제는 어딘가를 갔는데 전시를 안 보고 오는 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전시를 못 본다면 적어도 다른 진한 문화행사라도 즐겨야 본전을 뽑는 기분이다. 가끔은 내가 이러려고(=전시 차력쇼 하려고) 여행 왔나 싶기도 한데, 어쩌겠는가. 저 미술관 안에 내 도파민이 있는데•••.


퐁피두에 맺힌 한을 9년 만에 풀다

-저, 3월 말에 6일정도 연차를 써도 괜찮을까요? -음..바쁠 것 같진 않아요. 혹시 멀리 여행 가시나요?
-네. 파리요. 퐁피두 센터 가려고요.
-포…퐁? 그게 뭔데요?


우연히 퐁피두 센터가 5년간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연차를 6개 연달아 사용해도 되겠냐는 허락을 받았고, 그날 퇴근하자마자 미리 찜해두었던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사실 파리에 가 본 적은 있었다. 돈도 없고 제대로 된 긴 여행도 가본 적 없던, 여행 경험치 레벨 1의 아기 대학생 시절에 말이다. 친언니와 한 달간 영국과 프랑스만을 여유롭게 가는 일정이었는데, 파리와 런던 일정의 반 정도를 미술관과 박물관에 썼던 것 같다. 언니도 미대를 나왔기 때문에 둘의 니즈가 맞아떨어져 넉넉하진 않아도 나름 감성이 충만한 그럭저럭 즐거운 여행이었다.


하지만 언니가 영국에서 프랑스로 넘어가는 버스 안에 유로 현금이 들어있는 가방을 두고 내리는 바람에 조금 상황이 복잡해졌다. 사실 부모님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너무 어린 둘은 이로 인한 상심이 매우 컸고 이 일을 부모님께 괜히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프랑스부터는 계속 여행 경비가 빠듯했기 때문에, 마지막 일정인 파리에서는 거의 하루 종일 바게트 샌드위치 하나와 스타벅스에서 기본으로 제공하는 리필용 우유로 배를 채우며 다녔다. (근데 그땐 그게 진심으로 좀 젊은 시절의 낭만처럼 느껴졌다. 정말 웃겨..)


그런 상황인지라, 무려 17유로쯤 하는 퐁피두 센터의 티켓을 감히 구매할 수 없었다. 그래서 퐁피두 센터 앞 광장을 한참 돌아다니면서 알록달록한 기둥을 눈에 담다가, 다시 오면 꼭 저기를 가야지, 하면서 씁쓸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왠지, 저 기묘하게 생긴 알록달록 철제 건물이 영원히 저 모습 그대로 이 도시에 남아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예상이 틀렸다는 건 9년 뒤에 알게 되었다. 퐁피두 센터가 2024년 하반기부터 순차적으로 리노베이션 준비에 돌입하여 2025년부터는 완전히 문을 닫아 5년간 새 단장을 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17유로가 없어 씁쓸하게 뒤를 돌아야만 했던 나에게 한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맥북 캘린더 앱과 메모장을 켰다. 비행기를 찾아보니 3월 말이 가장 저렴했다. 연차를 6개 쓸 수 있다면 약 열흘 정도를 낼 수 있었다. 두 도시만 간다면 조금 빠듯하더라도 직장인에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정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회사에서는 당장 크게 급한 일은 없는 상황이었고, 나는 이 8박 10일의 여행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일도 감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 좋다-.

8박 10일의 여행을 위해 거의 비슷한 기간만큼의 야근을 해내고, 드디어 파리. 디자인을 배우고 나서 온 파리는 조금 더 특별했다. 하루 평균 2만 3천보를 걸어다니며 파리를 샅샅이 헤집었다.

“아, 좋다-.”

한국어를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도시에서 내가 생각의 거름망 없이 가장 많이 새삼스레 내뱉었던 말이다. 책에서나 보던 것들이 온전히 생생하게 내 눈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르코르뷔지에의 건축물, 가보지 못했던 미술관들, 미술 도구 가게, 예술 서적과 독립 출판물을 취급하는 서점들, 편집숍… 발길 닿은 모든 곳의 물건이 나를 반갑게 맞이해주는 것만 같아 내가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빌라 사보아 두둥등장, 충격 빌라 사보아 실존…! 생각보다 쁘띠했다. 햇살이 좋은 날이 아니었음에도 테라스과 가로창을 통해 바깥에서 빛이 들어오는 집 안 풍경이 정말 아름다웠던 르코르뷔지에의 역작. 하지만 실제로 살기는 좀 불편하다고 한다.)

(서촌에도 분점(?)이 있는 Ofr Paris. 정말 멋진 책이 많다. 간혹 한국의 작가 도록이나 한국의 그래픽 디자인 사례를 다룬 책을 마주치기도 한다.)

(오픈 n주년 기념 행사가 열린 merci를 방문한 날, 너무 좋았어서 기억하고 싶어 적은 일기. 열정적이고 다정하고 발랄한 게 진짜 쿨한 태도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하던 짓을 똑같이 파리에서도 한다. 그것은 바로 돈을 종이 혹은 종이묶음과 바꾸는 짓이다…)


그리고 대망의 파리 3일차, 나를 이곳으로 향하게 해준 퐁피두에 가는 날이 되었다. 파리의 3월은 벌써 완연한 봄 공기로 가득 차 낮에는 더웠기 때문에, 하루 종일 마실 생각으로 몽마르트르 언덕 어딘가에서 큰 병에 담긴 착즙 오렌지주스를 사서 가방에 넣고 퐁피두로 향했다.


17유로쯤 하는 한이 맺힌 티켓을 쿨하게 카드로 긁어 9년 전의 나부터 성불시켰다. 이제 남은 건 빠짐없이 전부 마음에 담는 일뿐이다. 기대를 한껏 안고 바깥이 보이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 모든 작품을 꼭꼭 천천히 씹어 먹듯 감상했다. 발바닥이 두세 조각으로 갈라질 것만 같은 아픔을 마비시킬만큼의 도파민이었다.

(그 유명한 몬드리안의 작품 근접 사진. 사진으로 보면 정말 컴퓨터로 뽑은 듯 선명하고 차가운 직선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붓의 결이나 스케치의 흔적, 물감의 갈라진 질감, 마스킹 테이프를 붙였다가 뗀 흔적 같은 것들이 느껴진다. 사람이 직접 손으로 했기 때문에 티가 나는 이런 부분들을 나는 ‘모더니즘의 상냥한 구석’이라고 부른다.)

(보통은 이걸 아름다운 옵아트 작품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디자이너들은 ‘아니 이걸 어도비 일러스트레이터와 플러그인 없이 했다고?’ 라는 충격에 사로잡힐 것이다..)

(물론 이런 이상한 셀카도 빠뜨리지 않고 꼭 찍기)


노을의 맛 오렌지주스

두세 시쯤 들어갔던 퐁피두를 전부 눈에 담으니 일곱 시가 되었다. (항상 느끼는 건데 이런 대형 미술관은 정말 시간이 따로 흐르는 것 같다..) 관람을 마친 층에는 외부 테라스가 있어 밖으로 나가 경치를 구경할 수 있었다. 계속 실내에만 있으니 답답하기도 해서 바람이나 쐬려고 무심코 테라스 문을 열었다가, 우연히 영원히 잊지 못할 풍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퐁피두는 주변 건물들의 높이가 비슷한 파리 구시가지에 위치하는데, 그 사이에서 거의 제일 높은 건물이라 앞이 트여 광활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정말 육성으로 “와-!” 하고 소리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약간 구름이 낀 하늘, 눈부신 석양, 오늘의 명을 다한 햇살이 구름을 이리저리 헤집고 나오다가 온갖 색으로 멍든 아름다운 하늘, 멀리서 반짝이는 에펠탑, 이제 막 켜지기 시작한 켈빈 값이 낮은 따뜻한 가게 조명.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이었다.


“아, 오렌지주스!”

한참을 멍 때리고 석양만 바라보다가, 전시를 보느라 완전히 까먹어버린 오렌지주스를 가방에서 꺼냈다. 콧등을 찡긋 구길 정도로 진한 오렌지 향이 내 몸을 가득 채웠다. 내가 보고 있는 저 석양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상상을 했다. 아, 석양은 오렌지 맛이구나•••.


목이 탄 것도 잊었었던 것 같다. 뒤늦은 갈증을 해소하려 석양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하늘이 완전히 푸릇해질 때까지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야말로 따봉.. 아니 트헤비앙입니다. 절대 잊지 않겠어 이 조명 온도 습도•••. 이 기억을 주마등 첫 번째 컷으로 임명합니다. 보통 얼굴이 나온 사진을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잘 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사진은 여행을 다녀온 이후에도 한동안 그대로 두었답니다.)


전시를 보고 숙소로 오니 피로감이 확 몰려와 거의 기절하듯 잠들었기 때문에 그날의 여운을 그날 바로 곱씹지는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영원히 기억할 순간이 얹히니 정말 이제는 내 기억 속의 퐁피두 센터를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시 작품은 내 취향인 것도 많았지만 아닌 것도 정말 많았고(소장품 목록만 보자면 런던 테이트가 오백 배 정도 더 취향이긴 하다), 잘 모르는 작가도 워낙 많아서 (당연하다, 원래 아는 게 그렇게 많지는 않으니까..) 전시를 봤던 경험 그 자체에 대해서는 파리보다는 런던이 더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에게 이렇게나 따뜻하고 발랄하게 인사를 건넨 곳을 좋지 않게 기억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니까.

(퐁피두 꼭대기층에는 무료로 입장할 수 있는 도서관이 있는데, 아주 쾌적하고 아름답다. 프랑스어를 모르는 게 아쉬울 정도로, 소장 도서도 다양했고 앉을 수 있는 공간도 충분했다. 공공도서관의 이데아를 만나고 온 기분이었다.)


(사실 퐁피두는 아트북과 그래픽 노블 맛집입니다. 프랑스어를 몰라 저 아름다운 책들을 집에 데리고 가 봤자.. 라는 사실이 야속했으나 지갑만은 지킬 수 있어 다행이었다.)


###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할 수 있는 것도 복이니까


누가 보면 ‘그렇게까지?’라고 생각할 이 여행은 사실 내게도 도전이었다. 기대한 만큼 대단한 경험이 아니라면, 그때의 실망감을 견딜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몇백만 원을 8박 10일 만에 태워버리는 게, 계산기를 들이밀면 무조건 손해 보는 셈이라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이 여행은 ‘사랑할 수 있을 때 그 사랑에 최선을 다하는 태도’를 내게 새기기 위함이었던 같다. 마침 퐁피두의 리노베이션 소식을 더 늦기 전에 알게 되었고, 마침 연차가 남았는데 회사가 바쁘지 않았고, 마침 여행을 떠날 수 있는 돈이 있었고, 마침 전시를 더 깊이 볼 만큼의 지식이 조금 쌓였고, 마침 며칠은 쉬지 않고 2만 보를 걸어도 괜찮은 체력이 되었고, 마침 전시 보는 것을 사랑하는 상태인 것. 이 모든 우연이 한 번에 발생할 가능성은 상당히 귀하다.


사랑도 때가 맞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투자할 수 있는 자원을 모두 끌어다가 사랑해 마지않는 것에 과감하게 투자하는 것이 나를 위해 가장 좋은 선택일지도 모른다는 직감을 따랐고, 그 선택은 옳았다. 나를 더 큰 세상으로, 더 많은 가능성으로 데려다주었으므로.

(정말 전시만 미친듯이 본, 최근 다녀온 도쿄 여행. 라임색이 전시 관련 계획, 연보라색이 쇼핑 계획이다. 원래 서점이나 문구점 투어를 더 하려고 했으나 다닐수록 가고 싶은 전시가 추가되면서 쇼핑은 3박 4일 중 딱 세 시간 했다.)


이제 다음엔 어디를 가게 될까. 나는 이제 어디를 가고 싶어 하게 될까.


미래의 나는 더 미래의 나를 어디로 던져 놓을까.


좋아하는 것을 진심을 다해 좋아해 본 경험은 나를 살릴 것이라는 믿음이, 영원히 유효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코너 속 코너] 지금 당장 보러갈 만한 전시를 추천해 드립니다

<하종현>, 국제갤러리(서울 종로구 삼청로 54), 5월 11일까지


종로구 소격동에 위치한 국제갤러리에서 5월 11일까지 진행되는 하종현의 개인전을 추천합니다. 대표작인 <접합> 연작을 포함해 작가가 물성을 탐구하며 창작한 작품을 폭넓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 이후부터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가장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마대자루를 캔버스 대신 사용해 왔습니다. 마대자루는 성긴 짜임 때문에 물감을 쉽게 통과시키는데, 이 특성을 활용해 작가는 마대자루의 앞뒷면에 물감을 바르고 압력을 가해 독특한 질감을 만들어냅니다.


현재 국제갤러리 근처에 위치한 아트선재에서도 하종현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데요, 근처인 만큼 함께 감상하시는 것도 추천합니다. 그리고 국제갤러리에서 같은 기간동안 진행하는 최재은 작가의 <자연국가> 전시도 (이왕 간 김에) 보시는 건 어떨까요?


햇살 좋은 날 정갈한 한옥에 고요히 걸린 하종현의 작품과 얼굴을 맞대고, 재료와 손길이 만들어낸 보이는 숨결과 함께 호흡하는 시간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디지털 프로덕트(앱/웹)를 만드는 사람이다보니, 이렇게 생명이 느껴질 만큼 물성이 극대화된 무언가를 보면 괜한 감동을 느끼게 됩니다. 너무 좋아서 고개를 쭉 빼고 한참을 보다가 가까이서 찍은 사진.)



[요마카세] 토요일 : 전시 왜 봐?

작가 : GARDEN

소개 : 주말마다(사실 평일에도..) 전시를 보러 다니는 직장인의 전시 보는 이야기입니다. ‘전시 왜 봐?’ 라는 질문에 짧게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을 상상해도, 무엇이 펼쳐져도 이상하지 않은 공간, 미술관에서 보낸 시간들을 글로 풀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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