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의 이별 : 덧없고 덧없는 인생에 진정한 자유란
이 글은 [요일마다 바뀌는 주인장 : 요마카세] 연재물입니다.
Rrrr....Rrrr....
새벽 5시 전화벨이 울린다.
엄마로부터 걸려온 전화다.
Rrrr....Rrrr.....
또 다시 걸려온다, 이것은 잘못 누른 것이 아니다. 분명 나에게 전화 온 것이 맞다.
느낌이 이상했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나?’
정정했던 할머니께서, 할머니, 할아버지,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중 가장 젊으신 할머니께서 벌써 별세하실 일은 없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2번의 전화를 받지 못하고, 다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 ......”
“여보세요? 왜?”
흐느끼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린다. 대체 왜 이 시간에 우시는 걸까.
“할머니 돌아가셨다.”
인간의 육감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이 감각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그러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한 마디가 아직 와닿지는 않는다. 다음 주에 할머니 뵙기로 했는데,, 다음 주에 할머니한테 가기로 했는데,, 몇 주 전부터 내가 보고 싶다는 할머니의 전화에 바쁘다는 이유로 계속 미뤄두었던 친가방문이 다음 주였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니..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너 지금 어디야? 지금 우리 장례식장으로 갈 거야, 너도 지금 와.”
펼쳐진 텐트를 바라보며, 아직 술에서 덜 깬 나의 머리는 또 어찌나 지끈거리는지.
“지금은 못 가. 여기 정리하고 갈게.”
지금 당장 뛰어가 할머니 장례식장에 가는 게 맞는지, 펼쳐진 텐트를 걷고 정리된 상태로 장례식장으로 가는 것이 맞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모든 것이 그저 받아들여지지 않은 상태였다. 사실 이때 나는 슬프지 않았다. 나에게 슬프겠다며 위로하는 남자친구와 달리 나는 너무 멀쩡했다.
내게 맞이하는 두 번째 죽음의 순간이었다. 그것은 장엄하지도 쓸쓸하지도 않은 그저 그런 것이었다. 한 번 경험했기에 나는 장례식 경험자인 줄만 알았다--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보기 전까지 말이다. 관 속에 누워 계셨던 외조부의 시신을 상기시키며 할머니의 모습 또한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장례식을 머릿속으로 예행 연습했다. 차갑고 굳어버린 할머니의 시신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을 미리 그려보았다.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애썼다.
할머니의 부고를 듣고도 나는 아침을 먹고, 텐트를 치고, 느긋하게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그렇게 일상적인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장례식장에 도착했다. 마치 할머니와의 이별을 리허설이라고 하고 온 냥 자신 있게 입장했다.
그러나 거기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영장사진 앞에서 나는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내가 그렸던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쓸쓸한 그녀의 시신이었건만, 어찌나 환하고 예쁘게 웃고 계시는지, 예상치도 못한 마주침이었다. 할머니와의 모든 추억이 주마등 스치 듯 내 머리를 스쳤다.
“할머니~” 하면 “왜 불러~” 하던 우리들의 대화는 이제 없다.
“이 년아, 너는 할머니한테 전화도 안 하니?” 하면 “할머니, 사랑해요~”라고 재롱 필 대상이 사라졌다.
이제 나는 더 이상 할머니에게 전화할 수도, 안길 수도, 만을 건넬 수도 없게 되었다.
바로 다음 주에 할머니 뵙기로 했는데 말이다.
순식간에 없어진 것에 대한 그리움은 마치 스치는 바람을 안으려는 것만 같았다. 아무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것을 잡으려 애쓰니 슬픔만 커져갔다. 생각해 보면 할머니의 죽음은 갑작스럽지 않았다. 할머니는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오고 계셨다. 어렸을 때 나를 키워온 그리움 때문인지 몇 달 사이 나를 계속 찾으셨다.
“다정이는 요새도 바쁘대?”
유독 최근 몇 달 나를 그렇게 찾으셨건만 어찌나 그리 급히 떠나셨는지. 불쌍한 우리 할머니, 그립던 손녀딸도, 애타게 찾던 가족도, 얽히고 설긴 매듭을 제대로 풀지도 못한 채 얼마나 가슴에 한이 많으실까.
모든 죽음이 외조부의 마지막처럼 한없이 잘 닳은 비누와 같은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의 죽음은 얽히고설킨 목걸이를 풀다 만 채 장엄히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 버린 금속과도 같았다. 꽃 피지 못한 채 갑작스레 한 줌의 잿더미로 만들어 버린 생과 사의 필연을 야속하게 여길 수밖에. 할머니의 죽음은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덧없고 무상했다.
장례식장은 갑작스레 떠난 할머니를 불쌍하다며 붙잡으며 울부짖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불쌍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 자유를 얻었다. 더 이상 가족들의 전화를 애타게 찾을 필요도 없었고, 더 이상 보고 싶은 누군가를 눈물 삼키며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이제 훨훨 날 수 있는 하얀 나비가 되었다.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 된 것은 아닐까?
불쌍한 것은 아직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였다. 그리고 나는 이제 할머니의 냄새, 할머니의 온기, 할머니의 잔소리, 그리고 그녀의 그 모든 것들은 이제 경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이제 경험하지 못하는 것은 그녀의 육신뿐이었다. 나의 할머니는 여전히 나의 할머니로 그곳에 있을 뿐이다. 그녀가 근 80년 함께해 온 그 육신은 생명을 다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거기 있다.
생명과 죽음이라는 것은 참 애매모호하기 짝이 없다. ‘나’라는 것이 과연 이 육신을 통해 발산되는 것일까? ‘나’의 애씀과 집착이 과연 ‘나’의 것일까? 내가 탈처럼 쓰고 있는 이 육신이 없으면 ‘나’ 또한 없는 것일까? 그럼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다시금 숙고하게 된다. 육신이 사라지면 ‘나‘마저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인간은 덧없고 덧없는 인생에 불필요한 집착들로 애태우고 있다. 그저 모든 이가 자유롭고 평온하기를 바란다.
[요마카세] 수요일 : 집착과 노력사이
작가 : 요기니 다정
소개 : 국제 정치 배우다 요가 철학에 빠지게 된 사연
삶이 고통스러운 것은 집착을 내려놓지 못해서라고 하는데, 내가 잡고 있는 것은 집착일까 노력일까 방황하며 지냈던 세월을 공개합니다. 누구나 힘들 수 있고, 누구나 고민할 수 있는 그 질문들을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