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을 연주하고 나서
적이라고 하면 무엇이 떠오르세요? 우리와 싸우거나 우리를 해코지하려는 사람이나 나라쯤으로 말할 수 있겠지요. 처음부터 적인 사람이나 나라가 있을까요? 없어요. 저는 적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지피지기 백전불태란 말이 떠올라요. 이때마다 어째서 지적지기가 아니고 지피지기라고 했을까 궁금했어요. ‘적’이라고 하지 않고 ‘피’, 저쪽이라고 한 까닭이 있을 것 같았거든요.
다비드 칼리가 글을 쓰고 세르주 블로크가 그림을 그린 <적>에 그 까닭을 짚을 수 있는 이야기가 담겼더군요. 앞뚜껑 안에 총을 든 병사들을 헤아려보니 224명이네요. 35번째 병사 앞에 네 잎 클로버가 있어요. 전쟁. 사막처럼 쓸쓸한 들판에서 마주 보는 참호 두 개. 참호마다 병사 한 사람씩 살아남아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모습이 남과 북으로 갈라져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우리나라 같았어요. 주인공은 네 잎 클로버를 갖고 있던 35번째 병사일 거예요.
이대로 참호에 갇혀 늙어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리던 병사는 어서 이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나 명령을 내리는 사람들은 어떤 말도 해주지 않는다고 진저리칩니다. 이 글 아래 그림에는 훈장을 잔뜩 단 이들 두 장군이 히죽거리면서 와인 마시는 모습이 나와요. 이걸 보면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군인 스메들리 버틀러가 쓴 책 <전쟁은 사기다>가 떠올랐어요. “전쟁은 사기다. 언제나 그랬다. …이득은 달러로 계산하고 손실은 인명으로 계산하는 유일한 사기이기도 하다.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를 희생하면서 실행된다.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소수가 돈을 번다.”
이 책 <적>은 서로 마주 보던 참호에서 맞섰던 두 병사가 “이 순간부터 전쟁을 끝낸다.”란 글을 적어 페트병에 담아 힘껏 던지는 것으로 끝납니다.
한 번 적이라는 생각이 깊이 박히면 뒤집기 어려워요. 그래서 손자병법에서 ‘적’이라고 하지 않고, ‘피’ 곧 저쪽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지피지기를 깊이 하면 역지사지가 된다고 생각해요. 역지사지해보면 적이라고 여기던 그대에게도 ‘사랑하는 아내와 토끼 같은 아이가 있구나.’하고 알 수 있어요. 우리 주적은 전쟁이지 남조선이나 미국이 아니라고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도 말했잖아요. 그래요. 김 위원장 그만 싸우자고요. 다른 눈치 볼 것 없이 남북이 뜻을 모아 “이제 싸우지 않는다.”하고 휴전선 걷어내고 오가면 좀 좋아요? 아이들이 평양가서 아르바이트하여 의주로 가고, 의주에서 일하여 베이징도 가고 블라디보스토크도 갈 수 있도록 이요.
이 책은 꼬마평화도서관사람들 엄지 신현주 살림지이가 꼽은 평화 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