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그런가 보다
예전부터 가수들이 노랫말 따라 팔자가 된다는 우스갯소리를 들었다. 말의 힘은 믿었지만 무슨 노래가 그럴까? 하고 믿지 않았다.
그런데 맞나 보다.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이상하게도 죽은 자의 글이 끌렸다. 옛날 선비들은 다 죽었으니 당연히 죽은 자의 글이겠지만, 그중에서도 유독 죽은 자를 기억하고 추억하는 묘지명에 관심이 갔었다. 특히 박지원의 글에.
빌어먹을.
팔자인지, 언어의 힘인지, 아니면 본능이 끌린 것인지.
2주 만에 글을 한 편 썼다.
돌아가신 우리 아부지의 글이었다.
가난 때문에 학교 근처에도 못 가본 울 아부지는 평생이 글이 고팠다. 독학으로 한글도 배우고, 기본 한자도 터득하셨지만. 못 배운 고통은 평생을 갔다. 동네 이장을 보면서도 어린 나에게 검수를 받으면서 힘겹게 사회생활을 하셨다. 그것을 알기에 나도 열심히 공부를 했다. 처음에는 즐거워서였지만, 중반을 넘으면서는 굳이? 이 고행을 끝까지 해야 하나? 반문하면서 그 길을 갔다. 특히 다 되기 직전 90% 앞에서는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 굳이 학위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미 공부가 즐거우면 되었지... 이런 고민에 휩싸인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눈에 밟힌 것이 울 아부지의 서러운 눈망울이었다. 자식을 통해 대신 살 수밖에 없는 울 아부지의 설움이 발목을 잡았다. 10년 공부를 꾸역꾸역 마무리했을 때 울 아부지는 춤을 췄다. 하지만 최종 글이 성에 차지 않았던 나는, 일을 핑계로 졸업식에도 가지 않았다. 지금은 그것이 그렇게 후회가 된다. 아무리 바빠도 모시고 가서 학사모 한번 더 씌워 드릴걸...그걸 못 해 드렸다.
작년 12월에 갑작스럽게 아버지를 보내고.
남들은 슬픔에 겨워할 때, 난 마음이 바빴다. 살아생전 회고록을 쓰자며 인터뷰를 대여섯 번 했던 자료가 그득했기에 눈물 흘릴 시간이 없었다. 아부지 49제 전에 책을 묶어서 간단하게라도 올려드리고 싶어서였다.
징그럽게 죽은 자를 기리는 글만 분석하고 좋아하더니...
내 첫 글이 돌아가신 울 아부지를 담는 글이 되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묘지명 말고 다른 글을 좋아할 것을.
내 지독한 취향이 오늘을 만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맘이 편하지가 않았다. 2주 동안 숨도 안 쉬고 아버지만 떠올리며, 지극히 아빠의 눈으로 80 생을 되돌아봤다. 인터뷰 내용과 성장하면서 들었던 아버지의 푸념을 섞어가며 정신없이 글을 썼다. 아마도 아부지 생의 1%도 담지 못했겠지만 부족한 딸년의 최선이라... 더는 어찌해드릴 수 없는 막바지에 왔다. 그리고는 남들보다 늦게 눈물보가 터졌다. 왜 계실 때는 그 큰 사랑을 못 알았을까?
"항상 당연한 것은 없어"라고 해놓고. 정작 나는 아부지의 사랑과 헌신 속에서 무탈하게 이 나이를 먹었다. 영원할 것 같다는 착각을 하며.
어젯밤에는 간만에 일찍 누워서 잠을 잤다. 쪽잠을 자며 꿈속에서 자전거를 탔다. 자전거 손잡이가 딱 반토막이 나서 균형을 잡지 못하고 낭떠러지에 걸리는 꿈을 꿨다. 왼쪽 손잡이 없이 오른쪽 손잡이로만 움직이려 했더니 자전거가 반파되었다. 너무 끔찍해서 진땀을 흘리면서 새벽 2시에 깨었다. 더는 잠이 오지 않아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렇지. 지금 내 처지가 딱 그런 자전거지.
장례식 때 지인 분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이제 어디서 그런 사랑을 받아보겠니..."
이제는 없을 것 같다. 울 아부지의 막내를 향한 일방적이고 오롯한 사랑을 어디서 받겠는가? 어제 아버지 3제를 지내고 집으로 올라오면서 미친년처럼 혼자 대화를 했다. 울 아부지가 다 들어주고 계신 것 같아서..
"아빠? 뭐 먹고 싶어? 뭐 사다 드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