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즐겨보는 드라마가 있다. '연인'. 처음에는 드라마 '인연'의 아류인가 싶어서 관심이 안 갔다. 하지만 티져가 나오고 남궁민의 새초롬한 연기를 보면서 흥미가 급 동하였다. 붉은 노을을 배경으로 홀로 서 있던 한복 차림의 선비. 미쳐 싸움을 준비하지 못했는지 갑옷도 입지 못하고, 평상복 차림으로 장검을 부여잡고 서있던 장면이, 너무나 많은 서사를 상상하게 만들었다. 텅 빈 여백을 채워가는 재미?
- 왜 무사가 아닌 선비가 칼을 들어야 했을까?
- 어쩌다 홀로 많은 적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까?
- 그중에 저 절박하고 애절한 눈빛은 누구를 향한 것인가?
혼자 생각의 꽈리를 틀고 퍼즐을 채워갔다.
드디어 맛본 연인은 '지독히 절실해서 슬프다'가 첫 느낌이었다. 혼롓날 내린 첫눈. 오랑캐가 쳐들어 왔다는 비보. 애잖하게 얽히는 연인의 분주한 시선과 눈빛. 처음부터 최고는 아니지만 정갈한 맛에 흥미가 돋워지는 묘한 짠내가 났다.
역관 정명수! 딩굴딩굴 잘 굴러다니는 눈초리와 숨길 수 없는 거만함. 가슴에 분통 하나는 차고 다닐 것 같은 고약한 성깔과 표독함이 참 잘 묘사된 인물이었다. 정명수의 악명에 대한 평은 일반적이며, 소수의 사람들만 노비 출신(평안도)의 전쟁(정묘호란) 포로의 처지에서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인다. 과정이 어찌 되었든 역관이 된 후 정명수는 악명 높은 악행을 더해갔다. '인조실록'에 소현세자가 청으로 끌려가다 걸음을 멈추자 정명수가 채찍을 휘두르며 모욕적인 말로 재촉하여 경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637년 2월 5일) 이후로도 정명수의 호가호위는 용골대와 도르곤이 죽은 뒤에 효종 때(1651년 6월 3일) 악의 근원으로 지목되어 재산을 몰수당하고 다시 노비로 내쳐지게 되며 화려한 막을 내렸다. 최고의 매국노(賣國奴)를 보자, 조선시대 억울했던 충신인 이확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확 李廓 (1590, 선조 23 ∼ 1665, 현종 6)
낯선 이름일 것이다. 박지원의 '연암집'에 실린 '가의대부행삼도통제사증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시 충강 이공 신도비명'의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무슨 작품 이름이 이렇게 길까 정이 뚝 떨어지는 느낌이 먼저 들었지만, 사실 앞에 있는 말들은 다 관직명이다. 가의대부, 삼도통제사, 자헌대부, 병조판서, 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이었던 사람. 죽은 후에 시호를 '충강'으로 받아 추존된 이공의 신도비명이라는 뜻이다. 이토록 긴 수식어가 있지만 사실 '이공을 기리는 글' 이것이 전부이다. 큰 추석선물 세트를 받아 신기하고 부담스럽고 기대도 되어서 까봤더니 단출한 사과 5알 들어 있는 느낌? 그래서 참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이확은 평생을 의심만 받다가 죽은 이후에 추존을 받은 충신이다. 어이없지만 생전에는 '충신'이라는 말을 듣지 못하고 항상 '역적이 아닌가? 불충이 아닌가? 간신배가 아닌가?'라는 의론의 중심에서 살던 불운한 자이다. 오죽하면 박지원이 그의 생애를 '疑(의심할 의)'를 써서 풀어낼 정도였다. 그리고 사후 100년이 지나 중국의 역사서인 '일통지'와 '어제준운시'를 통해, 역적으로 판단한 것이 오해였음이 규명되어 사후추존받을 수 있었다. 무슨 인생이 이토록 기기묘묘한 것인지. 풍운의 시절을 살던 충신의 운명 너무 가혹한 것이 아닌가? 이확은 생전에 인조반정(1623)과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을 당했다. 이토록 순차적으로 시련이 휘몰아치던 시기가 또 있었을까? 참 박복하다 싶을 정도로 태풍의 핵 속에 살았다. 문제는 스쳐 지나가지 않고 모든 사건이 이확의 불충을 의심하는 여론 속에서 당해내야만 했다. 이건 당한 것이다. 목숨을 다해 충을 실천하여도 돌아오는 것은 불신이니. 이 환장할 판국에 이확의 고충을 더한 것이 바로 정명수다!
두둥! 둘의 운명적인 만남은 시절의 풍파 속에 더 뒤엉켜버렸다.
때는 병자년(1636, 인조 14)! 사신으로 찾아온 영아아대와 마복탑이 도리어 패악을 부리고 거만하자, 들불 같은 조선의 사대부와 유생들은 사신의 머리를 베어 버리라 상소를 빗발치듯 올렸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자 영어아대 일당은 국서를 버리고 꽁지가 빠지게 본국으로 도망가버렸고, 결국 그들이 버리고 간 국서를 가지고 심양에 들어가야 하는 희생양이 필요했다. 목숨을 내던지고 오로지 충심(忠心)으로 버틸 사신이 필요했고, 아니 웬걸 그토록 미워하던 이확이 회답사로 충원되고 말았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평생의 충심을 의심하더니 목숨이 경각이 놓여 누구도 가지 않으려는 자리에는 왜 충심을 이유로 당첨이 되고 마는지. 하지만 이확은 죽을 자리라는 이유로 피할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결국 회답사로 심양에 가게 되었고, 그곳에 천추의 원수인 정명수를 만났다. 같은 조선인이나 만주족보다도 교활하고 악랄했던 정명수의 세치 혀는 도리어 이공의 충성심을 극도로 끓어오르게 만들었다.
칸이 교외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조선 사신을 배열하도록 명하였으나
"내 머리를 가지고 가라"
를 외치며 만주족 수십 기병이 위협을 해도 도리어,
"내 오늘에야 죽을 자리를 얻었나 보다"
하며 초연할 수가. 세상에서 제일 답 없는 것이 '배를 째시오'이니 만주족도 참 난처했을 것이다. 결국 팔 다리를 들고 제단으로 끌려갔고, 그날 칸은 '대청'이라 칭하며 연호를 '숭덕'이라 바꾸는 역사적인 업적을 진행하였다. 절하지 않겠다며 버티는 이공을 발로 차고 때리니 구경하던 자들도 놀라서 혐오스러움을 참을 수 없었다는 전언이다. 이공에게는 얼마나 굴욕적인 날이었을까?
그리고 다음날 다시 제사를 지낼 때도 눈을 부릅뜨며 항거하자 칸이 승자의 배려심을 보이며 서신을 써서 조선 사신단을 살려 보내주었다. 허나 칸도 보통은 아니었다. 끝까지 항거하여 떳떳하다 생각하던 이공 일행이 들고 온 서신에는 청나라 국쇄가 찍혀 있었으니, 이걸 들고 가는 순간 그들은 조선에서 '용서받지 못한 자'가 되는 것이었다. 이토록 고약하며 넉넉한 복수가 또 있을까? 진짜 몸싸움에 두뇌 싸움으로 응수한 최고의 허(虛)다!
결국 이공은 서신을 중간에 버리고 돌아왔으나, 이미 조선에는 '굴욕적인 외교'를 했다는 소문이 파타 하였고, 또다시 '역적의 탈'을 쓰고 배척되고 말았다. 말년에 임종까지도 이 억울한 누명은 벗겨지지 않았고, 그가 죽은 뒤 100여 년 후에 중국 역사서를 통해 비로소 증명되었으니 무슨 이런 삶이 있을까? 이토록 억울할 것이라면 차라리 양심을 팔고 나라를 팔아서 무위도식한 정명수의 삶이 나은 것 아닌가? 이야기를 들은 사람조차도 억울하여 불충스러운 말을 덧붙여 본다. 의심도 정도가 있지. 위급할 때 지켜주고 나니까 뒤통수치는 격이다. 부디 우리 드라마 '연인'의 정현 도령은 이확 같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