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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내 사랑 (5)

대환장 결혼식과 도피, 별밤

by 나노

몇 주가 지나고 선 볼 날짜가 잡혔다. 부산에 있다던 손녀가 전주에 와서 짬이 났다고 했다.

나도 모르게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가르마를 정리하면서 자꾸 신경을 썼다. 참 이상했다. 누구를 만나도 그저 덤덤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싱숭생숭한 것이 낯설기만 했다. 타고난 길치라 약속 장소를 찾아가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시골 버스는 딱 한 대인데, 전주는 무슨 버스가 이렇게 많은지. 시외버스 터미널을 기준으로 다시 되찾아서 겨우 약속 시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빠른 걸음걸이가 아니었다면 처음부터 실수를 크게 할 뻔했다. 할머니의 지인 댁이라는 곳에서 처자를 기다렸다. 지난번에 뵈었던 고모 이외에도 다른 분들이 여럿 계셨다. 어찌나 눈으로 뜯어보고, 또 뜯어보던지 얼굴이 닳아지는 줄 알았다. 그리고 밖에서 인기척이 나더니, 키가 작고 얼굴이 뽀얀 처자가 들어왔다. 머리도 볶지 않고 깔끔하게 묶은 것이 세상 때가 묻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하얀 얼굴에는 분도 하나 바르지 않았고, 발그레한 볼까지 참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눈은 매서워 보였지만 포동한 볼 살이 날카로움을 감추고 있었다. 화장실 쪽으로 들어가는 옆모습을 보니, 뚜벅뚜벅 걷는 모습에 자신감이 넘쳤고 겁 없어 보였다. 할머니의 날카로운 인상과 고모의 고운 선을 골고루 닮았다. 그나저나 키는 참 작았다.
방에서 처자를 정식으로 맞이하는데 순간 ‘이만하면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생활력도 있어 보이고, 눈동자를 봐도 영리해 보였다. 이것저것 물어도 입을 다물고 그저 웃기만 하는 것이 참 귄이 있었다. 어른들은 둘이 대화할 시간을 주기 위해 자리를 비워주셨다. 궁금한 것이 있는가를 물어도 그저 웃기만 하고,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래도 웃는 것을 보면 내가 싫지는 않은 눈치였다. 잠시 후에 할머니가 들어오셔서 옆으로 바짝 앉으면서 물으셨다.
“어찐가. 마누라감이 되겄는가?”
역시 뒤끝이 없는 어르신이다. 나도 단숨에 여쭸다.
“할머니는 어쩐가요? 할머니 사윗감이 되면 저에게 주세요. 밥 해 먹기 귀찮아 죽겠어요.”

라고 대답했다. 처자는 우리의 대화를 듣고, 눈을 똥그랗게 뜨더니 놀라서 나를 바라봤다. 눈으로 지긋이 웃어주자, 부끄러운 듯 얼른 고개를 숙였다. 역시 귄 있다. 할머니가 우리 둘을 바라보며 호쾌하게 웃으시며

“그러게. 데려가게!”

하셨다. 나중에 들었지만 처자의 부친은 선을 보러 가서 하룻밤 자고 온 여동생을 호되게 혼냈다고 한다. 그곳이 어디라고 함부로 자고 와서 딸의 신세를 망치냐며 훌훌 뛰었다고 한다. 그런데 맞선 당일 나를 보시고는 두말하지 않으셨다. 그 뒤로 결혼은 일사천리였다.


그즈음 검단사 스승 휘하로 제자가 한 분 들어왔다. 나이는 나와 동갑인 부산 출신이었다. 그때부터 나를 오빠라 불렀다. 한 스승 밑에 먼저 들어온 제자가 손윗사람이 되는 관례를 따른 것이다. 다행히 스승님을 보좌할 사람이 있어서 결혼을 하면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동네에서는 33살이나 되는 늦깎이 신랑이 결혼한다고 아주 떠들썩했다. 인근 처자들은 모두 마다하고 3년을 돌아다닌 끝에 얻은 ‘전주 처자’라고, 아짐들의 눈초리가 아주 매서웠다.

결혼식 당일이 어떻게 지나갔는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하루 종일 웃고 다녔던 기억만 난다. 동생들도, 검단사 선생님도, 지관 어르신도, 동네 마을 사람들도 모두 흥성흥성하니 큰 잔칫날이었다. 사진사를 불러서 사진도 찍고, 없는 살림에 시집와 준 내 각시 ‘김춘화’를 위해서 아낌이 없었다. 맞선을 보고 혼례날 보는 각시는 참 더 고왔다. 한 달 남짓 사이에 볼 살이 더 빠져서 얼굴도 갸름하니, 뽀얀 얼굴에 살짝 찍은 연지곤지까지 더 예뻤다. 지금까지 왜 그렇게 장가를 안 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던 것인지?

이렇게 좋은 것을...

26살이라는데 어찌나 동안인지 갓 스물을 넘은 것처럼 귀엽기만 했다. 동네 어른들이 각시가 귀할수록 티를 내면 안 되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어찌 마음을 숨길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렇게 잔치를 하고 해가 넘어갈 무렵, 사달이 나고 말았다.

아침부터 막걸리를 잡수시던 대전 보살님이, 아니 양어머니가 술이 취해서 신부를 내어 놓으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시는 것이 아닌가? 신부가 얼마나 예쁜가 보시겠다며 마구잡이로 신을 신고 방에 들어오시니, 참 이런 고약한 일이 있을까? 상황을 설명할 사이도 없이 장인어른과 장모님, 할머니와 고모님들까지 다들 봉변을 당하고 있었다. 평소 대전 보살의 성격을 잘 아는 문 보살이 눈짓을 하며, 신부를 데리고 뒷문으로 피하라고 하셨다. 혹여나 신부가 해코지를 당할까 싶어서 어쩔 수 없이 말씀을 따랐다. 춘화는 눈이 땡그래져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감도 못 잡는 눈치였다. 미안하고 안쓰럽지만 일단 데리고 몸을 숨겼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밖이 잠잠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복잡해 보이는 춘화를 보자니 큰 죄를 짓는 것 같았다. 대전 보살님은 자신이 소개해준 처자를 거절하고, 곧장 결혼을 하는 것이 내심 괘씸하셨던 모양이다. 좀 잘 풀어드릴 것을. 이렇게까지 마음에 담고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도 각시는 이해시켜줘야 할 것 같아서, 대전 보살님을 양어머니로 삼은 시절부터 32번째 선까지 줄줄이 다 이야기해 주었다. 한참 뒤에야 상황 파악이 되었는지, 소리 없이 눈물을 훔치는 것이 아닌가? 이러려고 한 것이 아닌데. 참...

시작부터 눈물 바람이라니.. 속이 짠했다.

귀한 처자를 더 귀하게 맞이하고 싶었는데...



한참 후, 춘화의 얼굴에 눈물이 그쳐서 밖으로 데리고 나와 마루에 앉혔다. 날이 싸늘하니 추워서 이불을 어깨에 덮어줬다. 하늘을 보니 달이 떠 있었고, 그 옆으로 북두칠성이 보였다. 하늘을 가리키며 북두칠성 자리를 설명해 주자 각시는 가만히 들었다. 그리고 팔에 세긴 북두칠성을 보여주면서 이런저런 말을 해주었다. 고개를 끄덕여가며 잘도 들어주었다. 고민 끝에 당부도 했다. 성질이 급하니까 화나 있을 때는 아무 말도 말아 달라고. 혹시라도 홧김에 맞기라도 하면 서로 속상하니, 그 고비만 넘기고 나면 다 들어주겠노라 부탁을 했다. 이 귀한 각시를 다시는 울리고 싶지 않아서, 스스로에게 한 다짐이자 결심이었다. 절대 내 각시 눈에서 눈물 나는 일을 만들지 않겠다는! 그리고 이 약속은 한평생 지켰다. 자식도 손찌검해 본 적 없이 그렇게 가정을 꾸려왔다. 전부 현명한 우리 춘화 덕분에 조율이 잘 된 결과이다. 대신 화를 낸 다음날은 조막만한 각시에게 조곤조곤 혼이 났다. 남들은 모르는 우리 부부만의 서약이니, 내 급한 성미에 대한 꾸지람을 기꺼이 들었다. 무려 50년 가까이. 지금 생각해도 혼례날 그 봉변은 미안하기만 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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