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번의 맞선, 운명의 여자
30살이 넘으면서 절을 찾는 어머니의 발길이 잦아지셨다. 더 늦기 전에 장가를 들어야 한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오셨다. 이제 동생들도 장성해서, 내 길을 찾아가도 된다고 하셨다. 검단사에 들어온 이후로 생각도 안 해보던 이야기라 처음에는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스승님의 은근한 말씀과 어머니의 간곡한 애원에 모르쇠로 일관하기도 어려웠다. 절밥을 18년 가까이 먹고살았는데 결혼이라니.
어쩔 수 없이 어머니 손에 끌려 첫 맞선을 봤다.
수더분하니 걱실걱실한 처자였지만 상황을 설명하고 퇴자를 놓았다. 아니 퇴자를 놓아 달라 부탁을 했다. 수도승으로 살고 싶다는 말에 고맙게도 뜻을 이해해 줬다. 그렇게 어머니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 두 번 세 번 더 맞선을 봤다. 그러면서 어머니는 절 밑 마을에 빈 집이 났다면서 덜컥 재가를 내주셨다. 두 동생을 절 밑 마을로 보내서 농사를 짓게 하셨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셨지만, 동생들 일에는 무조건 나서는 것을 아시기에 볼모로 보낸 것이었다. 그때부터 남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으며, 절 살림을 함께 보았다. 주변 어른들이 한마음으로 처자들을 자꾸 소개해줘서 참 난감했지만, 어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렇게 몇 년 더 끌려 다니다 보니 32번째 선 자리를 가게 되었다. 한번 고집하면 절대 무르는 법이 없는 어머니의 성품 덕에 원 없이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32번째 맞선은 대전 보살님이 소개한 처자였다.
버스를 두 번 갈아타고 찾아가니, 해가 이미 뉘엿뉘엿하였다. 양어머님 말씀을 전해 듣고 찾아왔다고 했더니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아마도 처자의 부친이신 듯한데, 흡족한 미소로 안방 아랫목을 내어주셨다. 버스 시간이 촉박하다는 말씀을 드려도 상관하지 않으시고는 푸짐한 저녁상을 차려주셨다. 이 시절 나는 절 살림에 이골이 나서, 밥상만 봐도 이 집의 살림 솜씨를 알만했다. 정갈한 백김치에 딱 맞게 졸여진 된장국까지 아주 남달랐다. 아마도 부엌에서 그 처자가 차려준 밥상일 것이다. 버스를 놓칠 것이 염려되었지만, 사람의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어서 아주 맛있게 먹었다. 간도 딱딱 맞고 살림 솜씨가 제법이었다. 그리고 상을 물리자 처자가 들어왔다. 유순한 얼굴에 부끄러워하는 모습까지 괜찮았다. 짧은 눈인사를 뒤로 하고 어르신과 담소를 나누다 하룻밤을 그 댁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서둘러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만 하면 참 괜찮은 상대인데 왜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인지... 선을 보러 출발하기 전, 어머님께서
“이제 어지간만 하면 그만 고르고 좀 장가 좀 가라!”
하시며 볼멘소리를 하신 것이 마음에 걸렸다. 이제는 가야 하는 것인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이렇게 몇 년을 포기하지 않고 계시는 어머님의 소원을 들어줘야 하나? 참 마음이 무거웠다.
집에 돌아가면, 가게 집 사모님이 소개해 주시는 33번째 손님이 기다리신다. 농번기를 피해서 선을 보러 다니다 보니, 겨울이면 잠시도 짬이 없었다.
동네 어귀에 도착하자 가게 집 사모님이 달려오신다.
“승근이~ 손님이 오셨어!”
걷는 듯 뛰어서 가게 집 문 앞에 서자, 낯선 어른 두 분이 가만히 서서 내 얼굴과 전신을 뜯어보신다. 일단 허리를 굽혀 인사드리며
“많이 기다리셨어요?”
하고 인사를 올리자, 나이가 지긋하신 할머니가 아침 버스를 타고 도착해서 내처 기다렸다고 하신다. 가느다란 눈매에 앙다문 입술까지 보통 분은 아니시다. 작은 키에 말랐어도 강단이 느껴졌다. 그리고 다른 분은 누가 봐도 도시 사람이었다. 파머를 해서 머리를 올렸고 얕은 화장을 해서 시골에서는 볼 수 없는 고운 얼굴이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데 누웠다가 일어났는지 머리가 한쪽으로 눌렸다. 아마도 산골 버스를 타고 오느라 멀미를 한 모양이다. 점심이 지난 때라
“시장하시지요? 괜찮으시면 저희 집에 가서 식사를 하시죠?”
라고 하니, 단발머리의 젊은 여자분이
“나는 좋아요. 엄마 나는 멀미가 나서 오늘 버스는 다시 못 타겠어요.”
하신다. 아하! 둘이 모녀 관계인 것이 할머니와 고모나 이모 되는 분인 것 같다. 그제야 가게 집 사모님이 두 분을 소개해주셨다. 33번째 맞선을 볼 처자의 할머니와 고모 되시는 분들이라고. 할머니는 못마땅한 눈치셨으나 딸이 일어나지 못하고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는 내 청에 응하셨다. 아픈 분을 부축해서 집으로 모시고 와, 서둘러 상을 차렸다. 평소 검단사에서 하듯, 흰 수건을 이마에 둘러 머리를 단정히 한 후, 무김치를 쫑쫑 썰어 된장을 넣어 끓이고 흰 쌀에 보리를 섞어 솥단지에 밥을 지었다. 어르신의 연세가 있으니 조금은 무르게 밥을 지어 한 그릇 담았다. 우물에서 깨끗한 물을 떠서 밥상에 올리고 간장을 가운데 놓아서 입맛에 맞게 드시도록 준비했다. 안방에 밥상을 들고 들어가자 할머니는 놀라는 눈치였다.
“차린 것은 부족해도 맛있게 드세요. 어르신.”
이렇게 인사를 올리고 함께 저녁을 먹었다. 남녀유별이지만 어디 그럴 수 있나?
손녀 사윗감을 먼저 선보고 싶어 전주에서 곰티재를 넘어오셨는데, 충분히 뜯어볼 시간을 드려야 했다. 대화가 오고 가자 차츰차츰 어르신의 눈이 호를 그렸다. 고모 분도 상냥하게 분위기를 맞춰가며 이것저것 물으셨다. 가감 없이 솔직하게 다 말씀을 드렸다. 제일 궁금해하신 것이 아직까지 장가를 가지 않은 이유였으나, 그것 또한 있는 그대로 말씀을 드리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고도 질문이 끊이지 않았고, 처음 봤는데도 익숙하고 친근한 느낌이 들었다. 어젯밤과는 사뭇 다른 마음이라 나 또한 이상하다 싶어질 정도로 편안했다. 만약 이 분의 손녀딸도 이렇게 편안한 사람이라면? 그러면 또 마음이 생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 조카는 찌깐허니 호주머니에 넣고 댕겨야 허네.”
하면서 고모님의 내 눈치를 살피셨다. 혹여 작은 키가 약점이 될까 싶어 은근하게 떠보는 모양이었다. 허나 내 키가 크니 상대의 키가 작은 것이 무슨 대수일가? 해서
“할머니 어디 제가 손지 사위가 될 만한가요?”
하고 도리어 질문을 던졌다. 그랬던 할머니가 두말도 않고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되었다.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아직 상대를 본 것도 아닌데, 이런 엄격하고 야무진 할머니 밑에서 자란 큰 손녀라면, 결혼해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불쑥 올라왔다. 참 희한한 일이다. 상대를 보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밤이 새도록 세상 이야기, 자라나 온 이야기, 절에서 살아온 이야기, 농사짓는 이야기 등을 하염없이 나누었다. 처음 본 할머니가 왜 이렇게 편안한 것인지 마치 알고 지내온 분 같아서 속에 있는 이야기를 허물없이 털어놓았다. 참 지금 생각해도 평소의 나답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고모 분은 멀미를 걱정 걱정을 하시며 버스를 타셨다. 혹시 속이 안 좋아지면 드시라고 칡뿌리를 조금 잘라 담아드렸다. 그렇게 두 분은 전주로 돌아가셨다. 다음에 손녀 만나는 날짜를 받아 오겠다고 하시면서. 그날 밤 절로 돌아와서 대전 보살님이 소개해 주신 분은 인연이 아닌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다. 매서운 눈초리가 영 마음에 걸렸지만, 아무리 좋은 처자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을 어쩔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날 대전 보살님의 부아가 나중에 큰 화가 될 줄은 상상도 못 하였다.
오뉴월의 서리가 되어 내릴 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