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어서와!"
어려서부터 내 호칭은
"막내야~"
2남 2녀 중 4번째라서 이름보다 차례로 불렸다.
큰아들, 작은아들, 큰딸, 막내.
왜 작은딸이 아니냐고 묻자, 막내는 원래 막내라고 하셨다.
우와! 이런 무! 논! 리!
엄마는 여차하면 우기기를 잘했다. 논리가 없어지면 원래 그렇다고 하셨다. 원래는 언제부터가 원래인지. 그래서 내 이름으로 불리던 공간은 학교뿐이었다. 그곳은 내 이름 석자를 살아 움직이게 해 주었다. 그러다 호칭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임용고시에 합격한 순간부터였다. 갑자기 20년 이상 막내로 불리다가, 선생님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직장에서야 당연한 호칭이지만, 아니 왜 집에서도 선생님이라 부르시는지. 처음에는 극렬하게 저항했지만, 머지않아 그 이유를 알아버렸다.
식당에서 어린 딸을 선생님이라고 부르면, 모두 내 직업을 알아채고,
"아이고 어르신. 따님이 선생님이신가 봐요?"
하면서 인사를 건네오셨다. 그럼 울 아부지 눈이 방끗하면서 내 이력을 탈탈 털어서 한 입에 넣어주셨다. 우와 이 할리우드 액션이라니. 난 부끄러워서 쥐구멍을 찾아다녔지만, 우리 아버지의 대본이 다 끝나야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원한 빛이 어디 있겠는가? 자랑이던 막내딸이 마흔이 넘도록 시집을 못 가자, 집안의 자랑에서 순식간에 아버지의 수치가 되었다! 그 뒤로 아버지는 어디 가서 딸 이야기를 참기 시작했다. 정말 한순간이더라.
빛이 빚이 되는 것은!
(울 엄마는 계모임에 가면 시집 못 간 딸이 쪽팔리다 했다.)
호칭의 변화는 그 뒤로 십여 년 후에 다시 발생했다! 공부에 지쳐서 학업을 마무리하고 '의리를 인증하는 증서'인 논문을 쓰고 나서는, 다시 박사님으로 불리었다. 참 '전을 뒤집듯' 대접은 하루아침에 달라졌다. 그 뒤로 증서를 풀어 먹지 못하자, 아부지는 박사님에서 다시 선생님으로 선회하셨다. 정말 솔직한 순도 100%의 호칭이라서, 어느 때는 서운하기도 했지만... 그것이 울 아부지의 염원이라 생각하니 짠하기도 했다. 나를 부르는 호칭은, 평생 못 배운 것이 한이 된 울 아부지의 염불이었다. 언어는 분명 힘을 갖고 있다. 그것을 주술성이라 표현하기도, 참언이라 하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이 인간이 품은 간절함이라 말하고 싶다. 정말 간절하셨다.
직장에서 가끔 전화를 드리면, 항상
"잘 참어야 혀. 애들 잘 품어주고! 참어!"
아부지의 주문은 언제나 내 격한 성정을 눌러주었다. 시시비비를 따지는 대쪽 같은 성질머리를 꾹~~~~ 눌러내려 주셨으니. 모두 교사로서 마땅한 조언이라 할 말은 없지만, 딸인 나는 화가 났다. 내 맘도 몰라주고. 맨날 애들만 위하고
그러면 나는
"내가 닭이야! 품게?"
그럼 허허 웃으셨다.
내 첫 교직생활에도. 울 아부지는 내 지휘봉을 직접 깎아서 만들어주셨었다. 그 투박한 솜씨로. 요즘 세상에 누가 지휘봉을 들고 다니겠는가? 캐릭터로 된 귀여운 것도 많은데... 그래도 그 간절한 마음이 느껴져서 열심히 들고 다녔다. 울 아부지 사랑이니.
아빠는 항상 나를 보면, "참어야혀!"를 주문처럼 외우셨다. 최선을 다해 참고 있다. 나도 내가 휴화산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진앙의 깊이를 가늠하면서 참아 내고 있다. 일주일 잘 참고 시골집에 가면, 아부지는 마당에 주차 중인 딸을 바라보며 항상 말씀하셨다.
"선생님~ 어서 와!"
귓전에 쟁쟁한 저 소리가 이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