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와 기적, 상상
울 아버지가 많이 급격히 안 좋아지신 것은 작년 가을이었다.
3년 전부터 폐가 안 좋아서 대학병원을 다니셨고, 희귀병 진단을 받아 1년 정도를 전적으로 매달렸다. 신약이라는 것도 썼지만, 잃은 폐를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다만 악화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매달 피검사와 엑스레이 검사, 기관지 검사를 병행했고, 날마다 한주먹씩 약을 드셨다. 물론 입원도 하셨다.
처음에는 일주일이면 퇴원이라던 병원에서 간수치가 나쁘다며 추가 검진에 들어갔고, 잠복 결핵균 때문이라며 독한 약을 드시면서 일주일 만에 야위어 갔다. 그리고 기관지 치료를 엄청 고통스러워하셨다. 병원 입원 2주가 될 때 가족회의를 했다. 10킬로 가까이 빠진 아버지를 퇴원시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다.(솔직히 퇴원시켜서 돌아가시면 어쩌냐는 우려도 컸다.) 하지만 병원에 계신 아부지 눈빛에서 죽음을 보았기에 멈출 수 없었다. 일단 식사량이 현격하게 줄었고, 언제나 반짝이던 눈빛이 흐려지면서 살고 싶다는 의지가 안 보였다. 옆자리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우울증과 공포감이 극에 달하셨기에, 고모의 권유를 빌미로 퇴원을 시켰다. 그리고는 그때부터 체력이 소진되어 아무것도 못 하셨다. 그때 고모는 아버지의 생 의지를 북돋기 위해 시골집에 전원주택 짓기 프로젝트를 감행하셨다.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오빠를 옆에서 돕겠다는 일념으로 5개월 만에 집을 짓고 시골로 들어왔다.
참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유별난 우리 엄마의 아빠 사랑 덕에 아부지는 그 뒤로 1년 반을 더 사셨다.
기적이었다.
강퇴를 시킬 때 주치의는 말했다.
"호흡이 가빠지시면 무조건 엠블란스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오세요!"
그분의 눈빛은 연민과 안타까움이었다. 음식을 전혀 못 드시는 울 아부지는 그곳에서 절망을 맛보셨다. 그런데 엄마와 고모의 지극정성으로 하루 3끼와 과일, 간식을 날마다 맛나게 드셨다. 아부지의 남은 시간은 사랑받고 이쁨 받는 보은의 시간이었다.
나와 언니는 매주 주말이면 집으로 갔다.
타 지역에 있었지만, 주말 일정은 오로지 아부지였다. 이것저것 드리고 싶은 것을 사서 가면, 대형 마트 장바구니가 한가득이었다. 나도 언니도 아끼지 않았다. 이걸 사다 드리면 잡수실까? 이런 마음으로 무리하고 또 무리를 했다.
어떤 주는 둘이 합쳐서 50만 원을 쓰기도 하고, 30만 원 정도를 쓴 때는 외식으로 또 10 만원 이상을 쓰기도 했다.
부자도 아니지만 아끼지 않았다. 그렇게 1년 반은 나도, 언니도, 엄마도. 고모도. 본인의 삶이 없는 시간이었다. 네 여자의 연합작전이 시작되었다. 주말에는 언니와 내가 밀착 마크를 했다. 그래도 지팡이가 있으면 걸으실 수 있었고, 간이 의자를 들고 뒤를 따르면 열 걸음에 한 번씩 의자에 앉아 쉬셨다. 조마조마했지만 운동은 필수 조건이었다. 그래야 장 운동도 되고, 다리 근육도 유지할 수 있고, 소화도 가능했다. 아부지는 우리 딸 년들의 잔소리를 다 잘 들어주셨다. 편식도 못하게 숟가락에 반찬을 올려주면 다 드셨고, 힘들어도 우리와 돈가스집이며 짜장면집이며, 커피숍이며, 소고기집이며 다 다녀주셨다. 본인은 힘들면서도 함께 추억을 선물해 주셨다. 그중에 아버지의 팔순과 작은 아버지 칠순 잔치를 했고, 정말 나날이 이벤트인 시간을 보냈다. 그중에 아부지가 제일 좋아하신 것은 불공드리는 시간이었다. 집 가까운 절에 가서 울 아부지가 올리는 불공을, 딸년들이 함께 하였다. 그것을 제일 좋아하셨다. 그렇게 한 시간을 하고 나면 지치셔서 누워야 했고, 그때 옆에서 해드릴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바구였다.
병석에 누운 환자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환상 고문"
이었다. 내년 봄에는 산에 있는 절에 가시자. 조만간 손녀가 결혼하니 가을에는 결혼식을 가자. 다음 주에는 돈가스를 잡수러 가자. 내가 결혼해서 애 낳으면 키워달라. 부모님 결혼 50주년에는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가자.
터무니없는 헛소리인 것을 나도 알고, 아부지도 알고, 엄마도 알고, 언니도, 고모도 알지만. 그것이 유일한 선물이었다. 때로는 옛날이야기로 시간을 보내는 것인데, 가난한 농사꾼의 과거 이야기는 치유보다 상처가 많아서 효과가 적었다. 그러니 미래의 불확실한 그림을 옆에서 계속 말씀드릴밖에..
박지원의 '백수 공인 이 씨 묘지명'을 배울 때, 누워 있는 큰형수에게 환상을 선물하는 마음을 알지 못했었다. 워낙 글을 잘 쓰는 사람이니 말도 잘해서 기쁘게 하는 것이려니 했다.
"담장에는 빙 둘러 뽕나무 천 그루를 심고, 집 뒤에는 밤나무 천 그루를 심고, 문 앞에는 배나무 천 그루를 접붙이고, 시내의 위와 아래로는 복숭아나무와 살구나무 천 그루를 심고, 세 이랑 되는 연못에는 한 말의 치어를 뿌리고, 바위 비탈에는 벌통 백 개를 놓고, 울타리 사이에는 세 마리의 소를 매어 놓고, 아내는 길쌈하고, 형수님은 다만 여종을 시켜 기름을 짜게 재촉해서, 밤에 이 시동생이 옛사람의 글을 읽도록 도와주십시오."
(백수 공인 이 씨 묘지명 일부 인용)
가난한 사대부가의 맏며느리 생이 얼마나 고되었을까? 그리고 옆에서 이런 환상의 세계를 꿈꾸게 해주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일까?
끝이 보이는 사람에게 가장 힘이 되는 것은 환상 약빨이었다.
모두 다 아는 불가능이라도,
그것을 꿈꾸고
그려보고
상상하는
그 순간이 행복하기에..
글을, 입으로 눈으로 10년 넘게 공부했지만. 울 아부지를 보내드리는 속에서 '언어의 힘'을 증험하고 있었다.
"아부지
올봄에는 검단사에
엄마랑 같이 가서,
사진도 찍고 불공도 올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