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막눈의 절 생활
절 생활은 쉽지 않았다.
지주 스님은 산속에서 도만 닦고 수련한 분이셨다. 평소에 말씀이 별로 없으셨고, 출가 전에 가정을 꾸려서 인근에 처자식이 있었다. 선생님의 본가인 아랫마을에서 쌀도 배추도 가져다줘서 부족한 절 살림을 유지했다. 서릿발처럼 무섭지만 잔정이 많은 대전 보살님이 공양주였다. 호되게 심사가 틀어지는 날이면 밥 얻어먹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절에 큰일이 있을 때 찾아와서 도와주는 문 보살님이 계셔서 한결 수월했다. 일이 고되거나 눈칫밥을 먹는 것은 별일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일손을 돕고 한 입이라도 덜어서 어머니를 도울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아버지를 보내고 어머니는 절에 와서 지극정성으로 불공을 올리셨다. 그 간절함을 알기에 정성이라도 함께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그렇다고 스님이 되는 절차를 밟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도 먹고 사는 지원은 가능해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감히 그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그저 절일을 돕는 일꾼이 되어서 귀동냥이라도 하며 지내는 것이었다.
큰 형님이 가구 가게에서 머슴살이를 하며 집에 돈을 보내오듯, 나도 이 절에서 먹고살며 일손을 돕고 어머님의 정성을 돕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불공을 올리고 돌아가실 때, 쌀 한 되박이라도 보내서 동생들 밥을 먹일 수 있었다.
절에서 살기로 다짐한 이상 울력을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니. 하지만 불경을 읽을 수 없는 것은 참담했다. 불경은 온통 한자였다. 그나마 한글 밑받침은 동네 야학에서 배운 적이 있었다. 동네 할아버지들과 밤에 일주일 배운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소리 나는 대로 적을 수는 있지만, 받침이 있는 글자를 읽고 쓰는 것은 아직 이었다. 한자는 몇 해 전 동네 서당에 딱 한 달 다닌 것이 전부였다. 하늘 천 따지를 따라 하니 서당 훈장님이 불러서 일손을 도우면 가르쳐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한 달 만에 주변 사람들의 송사에 휘말려 쫓겨나야 했다. 못 배운 설움이 절에서 더 깊어졌으나, 절에서도 어디 글자를 외우고 받아 적을 짬이 있었겠는가?
까막눈이 경을 배우는 방법은 딱 하나였다. 스승님의 불경 소리를 통으로 기억하고 암기하는 것이었다. 더디지만 유일했다. 그런데 문제는 잠시도 서 있을 틈을 주지 않는 것이었다. 빗자루질을 하면서 조금이라도 경을 더 외울라치면, 양어머니로 모시는 대전 보살은
“승근아”
를 외치셨다.
아! 검단사에 들어와서 달라진 것은 ‘승근’이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흔히 법명을 받는다지만 스승님께서는 사주팔자에 맞는 다른 이름을 하나 더 지어주셨다. 그래서 현승근이 되었다. 양어머니가
“승근아!”
를 부르시면 무슨 일을 하고 있더라도 던져두고 달음질을 쳐야 했다. 성격 급한 대전 보살의 화를 돋우면 절이 하루 종일 시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양어머니는 남들과 달랐다. 짤막하게 가까운 미래를 점쳐주기도 했다. 처음에는 소름이 돋고 무서웠지만, 아무에게나 해주는 말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불경을 외울라치면 꼭 일을 시키셨다.
절은 새벽 4시에 새벽 예불을 올린다. 스승님의 예불을 흥얼흥얼 따라 잠시 읊다가 6시 아침 공양을 짓기 위해 부엌으로 간다. 샘물을 길어서 부엌 문간 밖에 놓아두고 잔심부름을 하면 해가 살포시 떠오른다. 7곳의 단(壇)마다 공양을 올리고 법당에 들면 7시쯤 식사를 한다. 뒷정리를 하고 설거지를 한 후 본격적인 울력을 하다 보면, 아랫마을로 내려가서 짐을 두어 번 오르내릴 때도 있고, 절 뒤 텃밭에 배추를 심고 풀을 뽑을 때도 있다. 검단사는 멀리서 찾아오는 보살님들이 많아서 그 짐을 지고 왔다 갔다 하다 보면, 10시 사시 불공은 거의 참석하기가 어렵다. 귀동냥이라도 듣고 싶어 발을 재게 옮겨도 쉽지 않았다. 11시 점심 공양을 짓기 시작하면 더 바빠졌다. 땔감도 옮겨야 했고 찾아오는 보살님들을 모시는 일도 전담해야 했다. 혼자 동분서주하다 보면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저녁 공양을 준비해야 했다. 그 사이 짬을 내어 장작도 패고, 빨래도 하고, 밭도 일구고... 할 일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절에서 축지법이 필요한 이유를 너무 알만했다. 그리고 6시 저녁 예불을 올리고 뒷마무리를 하면 10시가 다 되어서야 비로소 뭔가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그럼 그 귀한 시간에 한글 공부를 했다. 3년을 계획하고 시작한 독학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낮에 들었던 경도 잊지 않기 위해 읊어야 했고, 한글 이름 석자도 쓰고 읽을 줄 알아야 했다. 어디에도 배울 곳은 없으니 혼자 고민하고 또 궁구하여 답을 찾아야 했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기 위해 상에 바늘을 세워두었다. 꿈뻑 잠들고 나면 새벽 3시가 되기를 여러 번 한 후 내린 강구책이었다. 덕분에 이마는 성할 날이 없었다. 그래도 찬물 세수보다 훨씬 효과가 좋았다. 그렇게 절 생활에 조금씩 적응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머니가 찾아오는 날이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다. 접때보다 더 앙상하게 마른 얼굴로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산날맹이로 걸어오시는 날이면, 심장이 저만치 떨어져 나갔다. 반갑기 그지없지만 억장이 무너지고, 또 꾸역꾸역 참았던 그리움과 설움이 치솟아 올랐다. 그래도 눈물을 꾹 참고 달려가 짐만 받아 손을 꼭 잡아 드리면, 매번 그렇게 섧게 울음을 삼키셨다. 그때 두런거리면서 우리 어머니를 맞이해 주던 분이 바로 대전 보살이었다. 그렇게 그 두 분은 서로 마음을 나누셨다.
어머니께 전해 듣는 동생들의 이야기는 반갑고 그리웠다. 동생이 학교를 다닌다는 이야기가 더없이 부럽기도 하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절에 들어오기 전에 떠듬떠듬 읽어 드리던 ‘회심곡’을 동네 아짐들이 그리워한다는 이야기도 전해주셨다. 다음에 집에 가게 되면, 꼭 한글을 다 터득해서 제대로 읽어 드리고 싶다는 마음이 한가득 이었다. 어머니는 늦은 밤에 오던 길을 되짚어 상전으로 돌아가셨다. 어린 동생들만 두고는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을 알기에, 동틀 때까지 기다렸다 가시라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렇게 눈물길을 다시 걸어가시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럼 어김없이 대전 보살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버지 묏자리를 봐주셨던 지관 어르신도 한 번씩 절을 찾아오셨다. 절 근처 마을에 사셔서 스승님과 담소를 나누시고, 이것저것을 물어보셨다. 외숙 어른 덕분에 지관 선생님으로 모시고 아버지의 묘를 편안한 곳으로 옮겨드릴 수 있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스승님의 심부름으로 댁에 가서 찾아뵙기도 하고, 때로는 하룻밤 지관 선생님 댁에서 묵기도 하였다. 어린 동생들이 여럿 있었는데 다들 손끝이 야물었다. 엄부자모 슬하에 자라는 아이들의 따수운 모습에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울 아부지가 살아 계셨다면 우리도 저럴 수 있었을 텐데...
해가 갈수록 도(道)를 통하였는지는 몰라도, 예전과 다른 것들을 느낄 수는 있었다. 이곳에서 어머니와 동생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있어서 하루해가 더 짧게 느껴졌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 마음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것도 때때로 위로가 되었다. 그사이 여동생을 19살에, 저보다 8살 많은 사람에게 시집을 보냈다. 아픈 엄마를 대신해서 부엌살림만 죽도록 하다가. 그래도 배곯지 않을 넉넉한 남편감을 묶어주니 마음이 한결 놓였다. 평소에 따숩게 품어주지 못하고 엄격하게만 대했던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귄 있는 아이라 남편에게 사랑받을 것을 알아서 한시름 놓였다.
선생님은 앞으로 세상에 대해 이런저런 귀한 이야기를 해주셨지만, 모두 기억하지를 못하니 그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다음 세상까지 내다보는 혜안이 있으셔서, 해주시는 말씀을 신도들이 다들 믿지 못하고 한 귀로 흘려보내던 것이 참 마음 아팠다. 나 홀로 가슴에 담아두었다. 그러다 24살에 군에 입대했다.
4년 동안 38선을 지켰다. 동부전선에서 야간 보초를 서는 것이 주 업무였다. 69년에 동부전선은 무법천지였다. 언제 적이 쳐들어 와도 이상하지 않을 무방비 시절이었다. 그래서 야간 보초가 두렵고 공포 그 자체였다. 다른 동기들보다 늦은 나이에 입대하고 보니 상병이 나보다 5살은 어렸다. 뭐 군에서는 계급이 하늘이니 자존심이 상해도 다 따랐지만, 기강을 잡겠다며 이유 없이 조인트를 깔 때는 패 죽이고 싶었다. 사람이 악랄해도 어찌 그렇게까지 못된 것인지. 동기들 모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김없이 포탄이 떨어지던 날이었다. 어딘지 모를 곳에 포탄 터지는 소리가 났고, 우리는 우두망찰 해서 숨을 곳을 찾지 못했다. 이곳에서 이렇게 죽는 것인가? 가장 눈에 밟힌 것이 우리 어머니 최순례 여사였다.
아.
이렇게는 아닌데...
그 와중에 야간 보초를 서라는 명이 떨어졌다. 하필 오늘 밤. 내 차례다. 낮에 떨어진 포탄이 또 어디서 떨어질지 알 수 없는 상태인데, ‘죽는 길이구나’ 하며 초소로 갔다. 달도 안 뜬 밤이라 시간도 모르겠고 사방이 캄캄하니, 천수경을 속으로 외워도 공포감이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발끝이 간질간질하고 머리가 쭈뼛쭈뼛 서는 것이 괴상망측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화장실을 핑계로 무작정 달렸다. 이런 공포감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이것이 명령 불복종인 것을 알았지만 견딜 수가 없어서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펑”
광폭한 소리와 뜨거운 화염에 고개를 돌려보니 보초가 포탄에 사라지고 불구덩이만 남아 있었다. 세상에나... 그 뒤로 조사를 받았지만, 그날의 기묘함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4년을 군에 있으면서 말 못 할 이상한 기시감은 때때로 위기에서 나를 구했다. 그 시절은 너무 아득하고 기괴해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제대할 때 정말 기뻤던 감정과 어머니를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행복함만 명확하게 기억난다.
제대 후 검단사에 찾아갔더니 스승님이 울면서 두 손을 벌려 맞아주셨다. 얼굴을 손으로 쓸어주시면서
“애썼다. 애썼어.”
를 찾으시는데, 어디서 그런 눈물이 나는지. 한참을 하염없이 소리 내어 울었다. 울 아부지가 돌아가시던 때도 참았던 눈물이 그날은 어찌 그렇게 났는지. 뒤에 대전 보살님도 눈시울이 붉어져서 내려다보고 계셨다. 이 법당에 다시 살아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 꿈만 같았다.
한참 후에야 대전 보살님께 들었다.
포탄이 떨어지던 그날 밤, 스승님께서 칠성단에서 내 공을 올리다가
“승근아”
를 목청 놓아 외치셨다고 한다. 두 번 세 번. 그 소리에 법당 안에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고개 들어 봤었노라고. 그리고는 곧장 상전 어머니를 불러서 대전 보살님과 1000명의 시주를 받아 공양을 올려야 내가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다고 하셨단다. 그 길로 어머님과 대전 보살님이 한 집 한 집 사정을 설명하고, 쌀 한 줌씩 천 가구를 돌아서 ‘천인의 공양’을 올리셨다고 한다. 그 말씀을 듣고는 그저 말문이 막혀 고개만 끄덕거렸다. 아... 그날의 기시감이 스승님의 부름이셨구나. 이날 후로 나는 온 마음을 다해 스승님과 절에 찾아오시는 보살님들을 섬겼다. 은혜를 갚을 길이 없어서 온 마음을 다하는 것밖에는...
아직도 스승님의 따뜻한 손길이 문득문득 그리워진다. 나이를 먹어도 마음은 그대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