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성장기
22살 겨울, 난생처음 소개팅을 하게 되었다.
친구가 양보한 자리였다.
카페에서 만난 그는 처음엔 무난했다.
그러다 갑자기 말했다.
"요즘 겨울 왕국이 그렇게 재밌대요."
나는 무심코 "그게 그렇게 재밌대요?"
라고 되물었다.
그는 곧장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래서 보고 싶네요."
"그럼… 친구랑 보러가세요."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 겨울 왕국 보고 싶다. 아~ 같이 안 보러 가줘서 못 보네~"
나는 당황했다. 설마 이게 애교인가?
22살 남자가 카페에서 고음으로 떼를 쓰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기 시작했다.
"아~ 진짜 보고 싶은데~ 왜 안 가줘~"
2절이 시작되었다. 이번엔 더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나는 아메리카노를 후루룩 마시며 시간을 벌어보려 했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혼자 가면 재미없잖아~ 같이 가자~"
3절 돌입. 이제 옆 테이블 커플이 대놓고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는 척하며 도망칠 핑계를 찾았다.
"아, 미안해요.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네요."
"에이~ 그럼 다음에 겨울왕국..."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게 내 첫 소개팅이었다.
그때 깨달았다.
'소개팅 상대가 떼를 쓰면 즉시 도망쳐야 한다'는
인생 첫 번째 교훈을.
23살 봄, 두 번째 소개팅. 상대는 두 살 많은 연상이었다. 대화는 밋밋했다.
다만 그가 커피를 계산하자 괜히 마음이 쓰여 내가 밥을 사겠다고 했다.
그가 안내한 곳은 시끌벅적한 삼겹살 노포.
그의 지인들까지 있었고, 내 코트는 고기 냄새로 절여졌다.
'내가 밥 샀으니까 됐지. 연락 안 하면 돼.'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집으로 향했다.
그때 카톡이 왔다.
"지은 씨, 좋은 사람이지만 저랑은 안 맞는 것 같아요.
우리는 여기까지가 맞는 것 같아요."
나는 당황했고 화가 났다. 나라고 뭐 자기가 마음에 든 줄 아나.
얘길 들은 친구는 이 상황을 두고 "0고백 1차임"이라며 배꼽 잡고 웃었다.
그날 두 번째 교훈을 얻었다.
'밥을 사주는 사람이 먼저 차일 수 있다'는 것을.
25살, "사람이 정말 괜찮다"라며 대학 동기가 소개해 준 남자.
기준이 없던 나는 "성격만 좋으면 된다"고 했다.
만난 지 10분 만에 그는 자신의 병력을 쏟아냈다.
공황장애, 교통사고 후유증, 불안정한 상태까지.
"간호학과라고 하셨죠? 이런 건 어느 과로 가야 해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친구가 "세 번은 만나봐야지"라고 해 억지로 한 번 더 만났다.
하지만 그는 한 시간 넘게 직장에서 겪는 공황 증세를 이야기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정도면 상담료 받아야겠다.'
이야기를 토해낸 그는 후련한 얼굴로 물었다. "다음에 언제 뵐까요?"
"어… 제가 요즘 바빠서요." 나는 버스로 몸을 던지듯 도망쳤다.
세 번째 교훈을 얻었다. 내가 나를 속이고 있었다.
'성격만 좋으면 된다는 말은 거짓이다.'
27살 여름, 마지막이다 다짐하고 나간 소개팅. 그는 청남대 산책을 제안했다.
나는 가벼운 산책을 생각해 원피스에 구두를 신었는데, 웬걸 땡볕 속 등산이었다.
구두 때문에 발뒤꿈치는 까지고, 땀은 줄줄 흘렀다.
그는 내 앞을 성큼성큼 지나가며 혼자 선풍기를 꺼내 쐬었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자, 민망한 듯 물었다.
"잠깐 드려요?"
"아뇨." 그 한마디로 내 마음의 문은 닫혔다.
산행이 끝날 무렵, 그는 돌화분에 담긴 스투키를 내밀었다.
낯선 사람에게 집을 알리기 싫어 대로변에 내렸는데
내 손엔 묵직한 화분이 들려 있었다.
뒤꿈치는 까지고, 날은 덥고, 집까지는 15분.
나는 그 길을 걸으며 속으로 온갖 욕을 퍼부었다.
마지막 소개팅에서 얻은 교훈은
'산책이라는 말을 함부로 믿지 말 것.
선물은 상대방이 받고 싶어 할 때 주는 것'이다.
네 번의 망한 소개팅 덕분에 나는 소개팅에 대한
로망도, 미련도 없는 완벽한 솔로가 되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 인생 최고의 교육과정을 이수했다.
겨울 왕국 남자 덕분에
떼쓰는 남자에 대한 면역력을 얻었고
0고백 1차임 사건으로
받는 것을 어색해하지 말자 다짐했으며
정신과 상담사 역할을 하며
건강에 대한 중요성을 다시 깨달았고
돌 화분 남자로부터는
배려의 진정한 의미를 역설적으로 터득했다.
그때는 몰랐다.
이 모든 황당한 경험들이 내게 '이상형이 뭔지'
정확히 알려주는 소중한 반면교사가 될 줄은.
지금 생각해 보니 그들 모두에게 감사하다.
덕분에 나는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한 사람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났을 때
그 소중함을 제대로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