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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에서 덕장 유비와 간웅 조조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익주목 유장의 부하 장송을 만나며 다른 태도를 보여주며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지요.
충효와 인덕을 중시하는 성리학 사조와 맞물리며 유비가,
쫓겨가는데도 수많은 백성들이 따라 올 정도로 좋은 군주로 묘사되었습니다.
관우가 죽고, 장비가 죽고, 유비가 죽고, 제갈량이 죽을 때
삼국지를 덮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들이 지금까지의 주인공이었지요.
하지만, 조조만이 정사에서 유일한 왕가로 대우 받았고,
유비, 관우, 제갈량을 포함해 수많은 영웅들은 인물별 별전이었다는 걸 보면,
실제 주인공은 조조이고, 난세인 그 시대가 조조 같은 인물을 원하지 않았느냐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한, 2023년 현재도 중국 유적의 중심이 유비 삼형제와 제갈량, 그 중에서도 관우였는데,
조조 관련 유적들이 점점 늘어나는 것도 주목할만한 점이기도 합니다.
오늘은 조조의 대표적인 책사인 순욱과 가후를 비교해보려 하는데요.
그 전에 최근에 책을 보고 강의를 듣다 알게 된 흥미로운 이야기로 먼저 시작해 보려 합니다.
여포의 여인 초선에 대해 들어보신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삼국지 미인계와 러브 스토리의 핵심이지요.
그런데, 이 초선이 정사에는 나오지 않는 삼국지연의의 가공 인물이라고 합니다.
중국 4대 미녀라고 일컬어지는 초선이 허구라니 참.
참고로, 중국 4대 미녀는 서시, 왕소군, 양귀비와 초선입니다.
4대 미인을 가리켜 '침어낙안(浸魚落雁)의 용모, 폐월수화(閉月羞花)의 아름다움'이라고 일컫는데,
그 중 폐월(閉月)이 초선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초선은 거의 초나라 항우의 여인 우희의 패왕별희에 견줄 정도로,
동탁 제거 등 비중 있는 인물이고, 미인계의 대표 격인데 허구라니 허탈합니다.
서서의 어머니의 자결이 허구라는 점과 함께, 소설에서 남녀 관계, 죽음과 같은 내용을 장치로 참 잘 써먹은 것 같습니다.
다만, 완전한 창작은 아니고, 삼국지 정사 위서 여포전에 이런 말이 있다고는 합니다.
“여포가 동탁의 시비와 사사로이 통정하여, 이 일이 발각될까 두려워 하여, 마음 속으로 불안해 하였다.”
공부는, 특히, 역사 공부는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몰랐던 내용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알게 되는 재미가 있고, 계속 공부를 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
이제 본격적으로 조조군의 대표적인 책사인 순욱과 가후를 비교해 볼까 하는데요.
두 사람 모두 조조군의 핵심 책사입니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에는 순욱과 그의 조카 순유 그리고 가후가 조조의 모사 중 가장 뛰어나다고 보아 같은 권에 들어가 있고, 이 중에서도 순욱을 제일 앞에 넣었다고 합니다.
솔직히 제일 앞에 넣었다고 순욱이 가장 뛰어났다고 보기보단 조조군 합류 시점까지 고려한 것이라 개인적으로 생각도 했었는데,
중국의 역사가들이 유비의 제갈량, 손권의 주유라면, 조조 옆의 사마의보다 순욱이라고 평한다고 합니다. 곽봉효 (곽가)와 삼국지 최후 승자 사마의 마저도 실리는 챙겼으나 명분을 살리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고 하네요. 중달 사마의는 지금도 겉과 속이 다르고 배신하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으니 제갈량의 호적수였다고 해도, 역사가들의 평가에서는 순욱보다 아래인 것 같습니다.
혹자는 순욱이 실리와 명분을 모두 얻었고, 가후는 처세는 뛰어났지만 자신의 안위만을 생각했다고 평을 하기도 합니다.
정말 그러한지 이제부터 그들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들어보시지요.
순욱의 자는 문약(文若)으로 왕좌지재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왕을 보좌하는 인재라는 뜻이지요.
오늘날 한국의 직제로 보면 대통령 비서실장 정도 될 것 같습니다. 아니면, 킹 메이커 라는 말도 비슷한 것 같구요.
일찍부터 조조군에 합류해서 책략을 많이 내놓았고, 조조가 출정했을 때 뒤를 맡긴 인물이었지요.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순욱을 한 고조 유방의 책사 중 소하에 빗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조조는 순욱을 장자방이라 칭했다고 합니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정도전을 장자방이라 부르고 총애했던 사실과 비교해 보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겠지요.
이렇게 장량과 소하 두 명의 이름을 모두 차지했으니 조조군 최고 책사라 할 수 밖에 없겠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고의 지략가를 제갈조조 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비슷한 뉘앙스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순욱도 원소의 휘하에 있다가 조조군으로 넘어 왔다고 하네요.
원소가 하북을 점령하며 한때 천하에 가장 가까웠고, 명문가 출신이었으니 인재들이 많이 모여 들었던 것 같습니다.
조자룡도 그 밑에 있었다고 하는데, 원소가 의심 많고 자질이 부족해서 그렇지, 진정 뛰어난 인물로 영웅호걸들의 진정한 지지와 존경을 받고, 인재를 알아보며 적재적소에 썼으면 위촉오 삼국 시대와 사마의의 후손 사마염이 세운 진나라는 없었을 수도 있겠습니다.
순욱은 원소와의 결전에서 수적 열세 등으로 불안해 하는 조조를 아래와 같은 말로 안심시킵니다.
· 도량: 원소는 겉으로는 관대하나 남에게 일을 맡겨도 그의 마음을 의심하지만, 조조는 재능으로서만 그 마땅한 바를 맡긴다.
· 모책: 원소는 지지부단하여 결단이 적어 후에 기회를 잃는데, 조조는 대사를 결단하며 임기응변으로 정해진 방법이 없다.
· 무력: 원소가 비록 사졸들이 많다고 해도 군대를 거느림에 관대하고 느슨하여 법령이 제대로 서지 않으니 그 실상은 쓰기 어렵지만, 조조는 비록 사졸이 적지만 법령이 분명하고 상벌을 반드시 행하여 모두 죽을 때까지 싸운다.
· 덕: 원소는 선대의 자금에 힘입어 꾸미고 명예를 거두어 들이기에 선비들 중 능력은 작지만 묻기 좋아하는 자들이 많이 그에게 귀부하는데, 조조는 천하의 충정과 실효가 있는 선비들은 모두 기용되길 원한다.
곽가도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요. 아마 조조군 책사들끼리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분석한 내용을 공유했을 것 같습니다. 그걸 조조는 불안하니 자신이 믿는 책사들에게 개별적으로 혹은 함께 있을 때 물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해가 됩니다. 건곤일척의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자신이 후의 원소 꼴이 된다는 것이었을 것이고, 병력 수 등의 세력에서 사실 조조군은 밀리고 있었으니까요. 조조군의 책사들도 원소를 객관적으로 분석하여 대응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불안해 하는 조조와 군사 전체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이런 생각을 펼치고 주입시켜서 ‘이길 수 있다’ 는 마음을 갖게 한 것 같습니다. 머리가 좋네요.
또한, 순욱은 과거 원소군에 몸 담은 적이 있어서 그런지, 적에 대한 파악과 판단도 상당히 정확했지요.
원소를 비롯해서 원소군의 책사와 장수들에 대해 객관적으로 분석했고, 결과적으로 맞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래서 내부에 있던 뛰어난 사람을 적에게 뺏기면 큰 코 다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 원소: 병력은 많으나 법령이 정비되어 있지 않음.
· 전풍: 강직한 성품을 지녔으나, 윗사람을 거스른다.
· 허유: 탐욕이 심하여 자기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 반드시 배반할 것이다.
· 심배: 독단적이며 계획성이 없다.
· 봉기: 과단성이 있지만, 스스로의 판단에만 따른다.
본인들의 이익을 위해 심배와 함께 원상을 제멋대로 옹립해 원가의 분열을 조장.
용기 내어 원담과 원상의 중재를 나섰으나 그 용기가 독이 되어 죽고 맙니다.
직접 원담에게 찾아가 원담과 원상의 협력을 유도하던 와중 결국 화가 난 원담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작년 올해의 사자성어라는 견리망의(見利忘義)가 갑자기 떠오르네요. 우리네 정치를 비롯한 사회의 부정적인 모습을 과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결론은 아시다시피 패망이지요. 국내외의 난세인데 바뀌지 않으면 늘 걱정하고 노심초사하다 큰 일을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 안량, 문추 : 필부의 용맹을 가졌으니(= 용맹은 하나 지혜가 없다), 한 번의 싸움만으로도 사로잡을 수 있다.
이렇게 관도 대전의 승리에도 기여하고 인정받는 순욱이었지만, 그의 최후는 한신과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안타까웠지요. 헌제의 부인인 복황후 건으로 반대 의견을 밝히고 조조의 말을 잘 듣지 않아 찍혀서 죽고 말지요.
진수의 삼국지 정사에는 조조군이 유수에 이르렀을 때 순욱이 병에 걸려 수춘에 남았는데, 걱정하다 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위씨춘추에는 조조가 순욱에게 음식을 내렸는데 열어보니 빈 공기여서, 독약을 먹고 죽었다고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치통감에도 순욱이 병을 이유로 수춘에 머물다가 약을 마시고 죽었다고 적고 있구요. 헌제춘추에는 조조가 순욱에게 복황후를 죽이라고 했지만 순욱이 그 말을 따르지 않고 자살했다고 합니다.
빈 그릇을 보낸 것을, 너는 이제 쓸모가 없어져서 먹을 것을 챙겨줄 필요가 없다로 해석하기도 하고, 이를 죽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든, 버림받더라도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으려 자결을 했든 순욱은 그렇게 갔습니다.
종합해 보면 조조와의 이견이 있었고, 복황후 건으로 말도 듣지 않아 찍혀서 병에 걸려 죽었든, 자결을 했든 그렇게 간 것 같습니다. 이를 두고 순욱이 한 황실에 대한 신하로써의 마음이 있다고 말하며, 혹자는 이성계와 초반에 함께 했으나 결국 고려 왕조를 지키기 위해 갈라 선 정몽주와 비교하기까지도 합니다. 둘 다 왕좌지재로서 재상의 자질을 갖고 있었으며, 권력자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였으나 결국 대립한 이유 때문인 것 같습니다.
29세에 조조가 ‘사마’로 등용하고, 49세에 안타까운 이른 죽음입니다.
가후 또한,
정사 삼국지 저자 진수가,
“책략에 실수가 없고 사태 변화를 꿰뚫고 있었다”
고 평가할 정도로 대단했고, 동탁, 이각, 곽사, 장수 등을 거쳐 조조 밑으로 가서도 재능을 인정 받았습니다.
특히, 장수가 조조와 항전할 때 가후의 의견을 듣지 않았을 때는 패배하고 가후의 계략을 이용했을 때는 승리했다고 하니, 어느 정도의 수준이었는지 조금이나마 가늠이 갑니다.
가후의 지략은 조조 진영에서도 대단했으나, 이각 곽사 그리고 장수 시절에 더 대단했습니다.
조조의 아들 조비가 가후를 중용한 이유가 그가 대단해서라기 보다, 그를 적으로 만날까 봐 무서워서라는 말이 있을 정도지요.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 조조가 가후 때문에 죽을 뻔 했던 것을 알고, 조앙이 죽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적벽대전에서 조조군이 오나라와 유비 연합군에 져서 조조가 도망가며 죽을 뻔 한 적도 있지만, 그때는 오나라가 상당한 군세였지요. 장수가 항복하고 나서 조조가 방심한 틈을 타 조조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간 가후의 지략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악래 전위와 조앙 등의 희생이 없었다면 조조는 죽었겠지요.
물론, 조조가 똑똑한 조식을 차기로 생각할 마음을 비추자, 가후가 ‘원소의 일을 생각해 보시라’고 말했던 것 때문에 조비가 가후를 중용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원소의 일이란 원소가 장자인 원담을 후사로 하지 않고, 동생인 원상을 후사로 하다 형제 간 다툼이 생기고 망하게 된 일을 말한 것이지요.
사소한 원한도 남겨 두었다가 복수해서 장수를 결국 죽게 만들었다는 조비도 자신에게 득이 된 가후를 죽이진 않았습니다. 사실 조앙이 죽은 건 장수 때문이라기 보다 계략을 낸 가후 때문 일 텐데, 역사는 이와 같습니다.
그리고, 동탁 휘하에 있다가 동탁이 패망하자 동탁의 부하이자 태위인 이각, 곽사 등이 군대를 해산하고 빠져나가 고향으로 돌아가려 했습니다.
이때 가후가 아래와 같이 말했습니다.
“장안에서 양주 사람들을 다 죽인다고 하며, 군대를 버리고 가면 잡힐 수 있습니다. 군대를 서쪽으로 향해 가는 곳마다 병사를 거두어 장안을 공격하면 동공 (통탁)의 원수를 갚고, 일이 풀리지 않으면 그때 달아나는 것도 늦지 않습니다.”
결국 이각은 장안을 공격해서 승리하고 한때 나마 권력을 구가했습니다.
가후의 조언이 없었더라면 권력을 잡지도 못했을 것이고, 자칫 패망하고 도망가던 원소나 그의 아들처럼 횡사할 수 있었겠지요.
다만, 이후 이각 곽사 등은 노략질을 하며 동탁보다 더한 짓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들이 권력을 잡도록 계략을 낸 가후도 욕을 먹었고 약점이 되었지요. 그런 이유로, 후에도 몸을 더 낮추고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이각이 가후를 제후로 봉하려 할 때에도 완곡히 사양하며 받지 않았고, 상서복야라는 직을 주려 하니 이도 거절하고 상서로 고쳐 직을 주니 직을 잘 수행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난세에서 살아남는 처세술은 가후만 한 인물이 따로 없다고 말합니다.
가후는 서량의 마등 사망 후 그의 아들 금마초와 한수의 동맹과 조조군이 대적할 때 이간계를 사용하라고 조언하여 이를 성공시켜 그들을 격퇴시키는 등 조조 휘하에서도 그를 이은 조비 휘하에서도 인정을 받습니다.
그러면서 높은 자리에 오르고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꺼려서, 사적으로 가후와 친분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하지요.
자식의 결혼도 권문세족과 맺지 않는 등 자신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머리를 잘 씁니다.
결국 삼공의 지위에 오르고, 손권이 조비에게 진심으로 섬기지 않는 자로 기회를 엿보고 있는데 불안하지 않느냐고 전하자,
곧 스스로 모든 관직을 버리고 낙향했습니다. 한나라의 장량을 bench marking 한 것일까요?
이런 면에서 그대는 나의 장자방이라고 칭송을 받았던 순욱은 결국 한신의 꼴이 나버리고,
장량과 같은 결과는 가후가 챙겼군요.
다만, 가후는 동탁, 이각, 곽사를 위해 꾀를 써서 욕을 먹은 것 외에, 자신의 목숨과 이익을 위해서만 머리를 썼지,
대의와 명분은 없었다는 비판도 받습니다. 그래서, 그대는 나의 가후 라는 말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퇴임 후 가후는 조용히 살다가 77세로 죽었습니다.
왕좌지재라고 불리는 순욱이 조조와 갈등 끝에 좋지 않은 말로로 49세에 죽은 것과 대비되는 대목입니다.
지금이 난세라고 한다면,
조조와 유비라는 군주,
그리고 책사 순욱과 가후 중,
여러분들은 어떤 삶을 살아가시겠습니까?
각자의 인생의 답을 생각해보셨으면 하고, 좋은 한 주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