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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의 역사 -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2)

by 철가면

4. 친일과 반일


대한민국 근현대사에는 참 다양하고 중요한 사건들이 많습니다. 신탁과 반탁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한국전쟁, 그리고 이후에 벌어진 수많은 독재와 이에 대한 항거까지.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쳐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수많은 사건들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 딱 하나만 꼽으라면, 필자는 망설임 없이 이것을 꼽습니다. 바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해체가 그것입니다. 필자는 현재 대한민국에서 존재하는 갈등의 90%가 이 반민특위의 해체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봅니다. 이 반민특위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해체됨으로써, 수많은 민족 부역자들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이로 인한 갈등의 불씨는 지금까지도 훨훨 타오르고 있습니다. 이승만의 가장 큰 실책이 바로 이 반민특위를 강제로 해산한 것입니다. 이것은 그 어떤 핑계를 가지고 오더라도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물론, 이 역시도 다른 방향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문제가 있는 결정이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승만과 김구 챕터에서 좀 더 자세하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반민특위의 강제 해산이 가지는 가장 큰 악영향과 우려스러운 점은 수많은 정치 세력들에게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정권하에서는 반공이라는 프레임과 민주 투쟁이라는 더 큰 문제가 있기에 부각되지 않았으나, 민주화에 성공한 이후에도 일명 민주화 세력들은 끊임없이 국가 지도자나 본인들과 반대되는 이들에게 친일 프레임을 지독하게 씌웁니다. 보수 정당인 현 국민의 힘과 국민의 힘을 주로 지지하는 경상도 지역의 사람들을 몇몇 과격주의자들은 토착 왜구라고 손가락질합니다. 한발 더 나아가 몇몇 과격한 이들에게 있어서 이승만과 박정희를 높게 평가하고 우익적 성향의 의견을 가진 이들은 모조리 친일파입니다. 한국에게 있어 일본은 참 형용하기 어려운 나라입니다. 기억하시는 분들도 분명히 있을 겁니다. 어린 시절 친구들 간에 다툼이 있는 경우 선생님이나 부모님께 이른다고 하면 ‘일러라 일러라 일본 놈‘ 같은 노래를 부르며 놀려댔습니다.


최근 들어 점점 그 색채가 옅어지고는 있지만, 90년대 초중반 세대까지만 해도 이상하게 일본에게 지면 엄청난 패배감을 가졌습니다. 스포츠에서 일본에게 패배한다면 그건 수치로 기억되며, 2002년 월드컵이 한 일 공동개최가 된 이유 중에 하나도 아시아 최초 월드컵 타이틀을 일본에게 빼앗길 수 없다는 반일주의에서 시작된 감도 있습니다. 2021년 당시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던 벤투가 일본에게 0:3으로 패배하자 당시 노재팬 같은 불매운동으로 시끄러웠던 시기에 함께 온 국가적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 친일 프레임이 저열하고 비열한 정치적 논쟁으로만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조금 더 장기적인 관점과 진정한 의미의 친일잔재 청산이라는 개념에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저 상대를 헐뜯고 비방하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된다는 것입니다. 문재인 정부 시절에 일어났던 No Japan 운동은 말 그대로 감정적인 대응으로만 이용됐습니다.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한 진정한 사과를 원하는 것이 우리 국민이 원하는 것이지만, 정치권에서는 이것을 배반했습니다. 국제적 정세와 지정학적 위치를 살펴봤을 때, 대한민국은 좋으나 싫으나 미국, 일본과의 공조를 통해 살아남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지만, 이 과정에서 제대로 된 정치적, 외교적 능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특히나 문재인 정부의 외교적 능력은 많은 문제가 있었던 박근혜 정부만도 못한 능력을 보여주었으며, 그저 국민적 감정을 선동하려는 수준 낮은 대응 능력만을 보여주었습니다. 보다 국제적, 외교적 관점에서 접근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최악의 외교력을 보여주었습니다.


4. 이토 히로부미


대한민국의 사람들 중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안중근을 모르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없을 것입니다. 그만큼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인에게 있어서 가장 유명한 일본인이면서, 가장 모르는 일본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그저 조선 총독부의 초대 통감이자 대한제국을 짓밟은 망국의 원흉으로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인식은 적어도 아주 틀린 인식은 아닙니다. 다만, 그것은 필자가 편견의 역사에서 내내 강조하고 앞으로도 강조할, '우리'의 입장에서만일 뿐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토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한국민에게 있어서 이토는 그저 침략자일 뿐입니다. 이토가 어떤 이유로 조선 총독부의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는지, 그가 통감에 부임할 당시 어떤 정치적 위기에 처해있었는지, 그가 왜 조선 총독부에 부임했는지, 또는 이토가 일본의 정치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그저 이토 히로부미는 악마적 인물로서 조선을 병합하기 위해 건너온 우리 역사의 불구대천의 원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2024년 12월 24일에 영화 하얼빈이 개봉했습니다. 필자는 필자의 개인 브런치스토리에 영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평면적인 악인, 그리고 안중근을 고귀한 인물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 우려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표현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저 조연 1로 등장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식은 이토가 안중근에게 죽은 지 100년이 넘은 현재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이토라는 인물에 대해서 정확하게 공부하고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점철된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이토 히로부미만큼 입체적인 인물을 찾기 힘들 것입니다. 많은 대중들은 그저 침략당하는 한국과 침략하는 일본인이라는 선악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으로만 근대사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분법적 프레임은 2025년에 와서도 역사전쟁이라는 갈등의 뿌리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그래서 더더욱 이토를 정확하게 알아봐야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인물입니다. 이토라는 인물은 애초에 성도 알 수 없을 만큼의 한미한 집안 출신의 인물입니다. 조선으로 치자면 양반집 노비에 불과했던 것이죠. 이토의 아버지가 하급 무사 집안의 양자로 입적되면서, 비로소 지배 계급이던 사무라이 신분의 말단에 편입될 수 있었습니다. 출신성분의 한계와 우연이 겹쳐 지배층에 편입되었으나 하급 사무라이였던 까닭에 이토는 자신이 보스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이런 배경은 그가 어떤 특정 권력자에게 충성을 다하기보다는 권력의 향배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대응하며 성장할 수 있는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게 합니다. 그리고 이런 성장 과정을 거치며 이토는 결국 가문의 제한이 있는 태정관 제도를 내각 제도로 편입시키기에 이르렀고, 1885년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그의 성장과정은 그가 권력의 중심과 다양한 부분에서 ‘최초’라는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는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광수의 변절에 영향을 미친 인물로도 알려진 도쿠토미 소호는 이토 히로부미를 ‘초물탐식가(初物貪食い)였다고 했습니다. 1868년 초대 효고현 지사, 1873년 초대 공부경, 1884년 초대 귀족원 의장, 1890년 초대 귀족원 의장, 그리고 1905년 초대 한국 통감에 이르기까지, 이토가 가는 길은 곧 일본 정치사의 새로운 길이었습니다. 그만큼 이토가 가는 길은 곧 일본 정치사의 새로운 역사였으며, 일본이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신세계였던 것입니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 김남희 배우가 열연하여 마치 진짜 일본인 같았다는 찬사를 받기도 했던 모리 타카시는 ‘이토 각하는 신이 된다’라고 하는데, 이 대사는 역설적이게도 당시 이토 히로부미를 정확하게 표현한 말이기도 하면서 잘못 표현된 말이기도 합니다. 왜 이토가 조선 총독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이해가 부족했기에 발생한 말이기도 합니다. 메이지 유신을 이끌며 일본의 근대화를 이끌었던 이토는 시간이 흐르면서 일본 정치권력에서 점차 밀려나기 시작했고, 자신의 정치 인생을 총 결산하겠다는 이토의 공명심과 이토를 국내 정치에서 밀어내고자 했던 이토 최대의 정적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의도가 맞아떨어진 것입니다. 즉, 정리하자면 이토가 한국 통감으로 오게 된 배경에는 이토가 조선을 병합하고자 했던 의도보다는 자신의 좁아진 정치적 입지를 타개하기 위함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조금 더 적절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토가 한국을 병합하려고 했던 의도가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이토가 단순하게도 한국을 병합하기 위해 통감으로 부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5.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많은 사람들은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를 단순히 악독한 일본에 대항한 한국의 영웅의 의거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대중매체에서도 일제치하에 대한 한국의 독립이라는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안중근을 매체로 한 드라마나 다큐멘터리 등에서도 이런 프레임을 벗어나질 못합니다. 선한 한국을 병합하기 위한 악한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한 몸을 다 바친 의롭고 명예로우며 고결한 의거로만 표현되고 진정한 아시아 주의를 선전하고 그가 왜 하얼빈 의거를 벌였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지면서 안중근이라는 영웅은 그저 평면적 영웅으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이는 이봉창 열사와 윤봉길 의사, 그리고 더 나아가 이들을 등용하고 의거에 활용한 김구까지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선한 한국과 악한 일본이라는 프레임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죠. 특히나 일본의 식민지 시절에 대한 긍정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학술적, 논리적 반박이 아닌 분노와 감정에만 치우칩니다.


일제 식민지 시기는 우리 민족에게 많은 피해와 아픔을 선사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모든 부분에서 부정적인 영향만을 미쳤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무엇보다도 필자는 다른 것보다는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서 발전된 문물과 각종 근대적 행정조직을 경험했다는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또 이 부분을 보고서 일제의 식민지배에 대해 긍정했다며 분노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립니다. 결코 일제의 식민 지배에 대한 긍정이 아닙니다. 다양한 문물을 받아들이고, 신식 문물에 대한 편견을 지우고 보다 발전한 형태의 행정력에 대한 학습을 할 수 있었다는 부분입니다. 물론 일제 식민지배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런 부분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부분들에 대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외면하거나 또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일본은 절대 악이라는 프레임이 아주 짙게 깔려있는 까닭입니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라는 주제를 달고서 다른 이야기를 꺼내냐고 의아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당시 대한제국과 동아시아의 국제적 정세, 그리고 일본이 주장하는 아시아주의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다면, 안중근의 하얼빈 의거와 동양평화론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이후 사형을 선고받습니다. 그리고 옥중에서 동양평화론을 집필하지만, 마무리 짓지 못하고 순국합니다. 안중근은 우리가 익히 아는 것처럼 일본을 부정하고 없애야 할 대상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당시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하고 제국주의 국가에 합류한 것은 일본입니다. 그리고 안중근은 일본이 앞서나가고 있는 상황을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청제국 등 아시아의 3개국이 공동으로 협력하여 진정한 아시아주의를 제창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적 성격이 들어있는 일본의 아시아주의 의 맹점을 정확하게 짚은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일본을 필두로 하여 하나로 힘을 합하여 삼국 간의 든든한 공조가 필요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시아에서 일본이 가장 앞서서 발전하고 있다는 것 역시도 안중근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일본을 없애야 할 적이 아닌, 함께 가야 하는 동반자로 인식하고 있던 이가 바로 안중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대중적으로 인식하는 일본은 우리의 적이라는 프레임이 결코 아닙니다.


동양평화론의 서문에서 안중근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통쾌하고 장한 일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얼빈 의거 후 안중근은 미조부치 검찰관의 심문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15개의 죄악을 이야기합니다. 을미사변과 을사조약, 그리고 고종 황제의 퇴위 등 다양한 이유를 들면서 러일전쟁에서의 그들의 명분을 스스로 깨부수었으며,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덴노를 죽인 것을 주요 이유로 들고 있습니다. 요약 정리하자면, 안중근은 오직 한국의 주권을 침탈한다는 이유로 하얼빈 의거를 행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주권 피탈이 주요한 원인이지만, 동양의 평화를 일본이 파괴하고 있다는 것 역시도 주요한 이토의 실책으로 평가했던 것입니다. 고메이 덴노의 독살에는 여러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안중근이 이를 근거로 이토를 사살했다는 이유로 내세우는 것은 의미가 큽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일본을 증오하고 없애야 할 존재로 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의 심문과 그의 저서에서도 일관된 논지를 주장합니다. 바로 동양이 힘을 합쳐 서양에 대항해야 한다는 진정한 의미의 아시아주의 입니다.


6. 마치며


필자가 이토와 근대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들으면서 항상 안타까웠던 부분들은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본에 대한 적개심만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몇몇 극단적 성향의 한국 사람들은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 보면 광기에 가까운 분노를 보여줍니다. 반민특위는 여전히 뜨거운 논란으로 남아있으며,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체결된 한일기본조약은 전국민적 반발에 직면하였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도 소녀상 문제와 친일파 논란은 정치권에서 뜨거운 감자의 역할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No 재팬과 같은 민족주의적 성향이 가득한 반일 운동이 끊이지 않고 벌어지고 있으며, 한미일의 긴밀한 협조와 공조가 필요했던 과거에도, 그리고 현재에서도 일본은 우리의 가장 가까우면서도 먼 친구이자 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역사를 편향적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의 편견에서 오는 오류입니다. 일본이 잘못을 하지 않았다라던가 일제치하에 의해 우리가 근대화가 되었다는 등의 일본 침략을 긍정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일본의 근대국가 성립 과정과 한반도로의 팽창 과정은 서로 별개의 과정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대다수는 이를 별개의 과정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이토는 일본의 대표로 여겨지며 많은 미움과 오해를 받고 있죠. 일본의 한국 침략과 강제 합병을 옹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발전과정과 근대 제국주의 시대에서 힘이 없으면 먹히는 아주 자연스러운 역사의 한 부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 민족이 일제의 침략과 강제 병합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한 것 역시 역사의 일부분입니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우리가 어떤 위치에 놓여있으며, 어떤 시선과 관점으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양한 역사적 사관과 관점이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복을 맞은지 8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일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분노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감정을 버리고 역사적 다양성과 사관이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우리에게는 발전이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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