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만에 돌아왔습니다. 3월은 많이 바빴습니다. 편견의 역사란 주제로 감사하게도 강의를 할 기회가 주어졌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하느라 글을 정리하고 다듬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습니다. 제 글을 읽어주시는 한분 한분께 감사하지만, 연재가 늦어지게 된 부분은 사과말씀을 드립니다.
그러나 조금 더 멀리 보았을 때는 이번 한 달간의 시간은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제가 썼던 글들을 다시 한번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며 강의를 준비하며 저 역시도 편견에 빠져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으로 편견의 역사를 마무리하고, 나머지 글들에 대한 수정도 진행할 것이며, 그 외 다양한 역사적 이야기에 대해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한분이라도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이 계신다면, 그분들을 위해 노력하는 철가면이 되겠습니다.
이번 백선엽과 김원봉 편은 두 편으로 나누기는 길이가 애매해 한번에 업로드합니다. 해서, 양이 조금 길 수도 있습니다. 제가 다시 한번 글을 재정리하였으니 꼭 정독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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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며
사실 이번 백선엽과 김원봉 편은 한창 육군사관학교 흉상문제로 논란이 일었던 백선엽과 홍범도 편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글을 쓰면서도 너무 이슈 중심의 논란으로 글이 써지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금 생각을 바꾸어 백선엽과 김원봉으로 기획을 바꾸어 다시 글을 썼습니다. 기존보다는 나아졌으나 또 다른 문제에 직면합니다. 바로 좌우의 이념적 편향성에 대한 글이 써집니다. 글의 전체적인 맥락과 완성이 무너져버린 측면이 강했습니다. 따라서 어떤 정치적 성향을 가졌느냐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할 글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한국 근현대사는 특별한 상황에 의해 이념적 대립과 갈등이 현재까지도 극명합니다. 따라서 설득력과 호소력, 그리고 글의 제목인 편견의 역사와도 맞지 않았습니다.
해서 이번 편은 기존과의 방식과는 조금 다르게 접근해보고자 합니다. 한국 근현대사의 핵심 이념에 대하여 각각 다루어보고, 쟁점이 되는 부분들에 대한 접근과 함께, 백선엽과 김원봉의 공과 과에 대해 각각 다뤄보고자 합니다.
필자가 이 편견의 역사란 저서에서 반복해서 주장하는 것이 역사적 인물과 사건에 대한 다른 부분도 살펴보자는 것이었습니다. 특히나 이념적 갈등과 지역 갈등 등의 극한의 갈등의 단계에서 이는 매우 유의미한 시도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것이 비록 양비론적 관점과 양시론적 관점에서 모두 까기, 혹은 모두 긍정이라는 비판에 직면할 것임을 알지만, 필자의 주장 핵심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주제가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2. 독립운동과 한국전쟁의 영웅의 이면
백선엽과 김원봉이라는 인물에 접근하기에 앞서 이념이라는 잣대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특히나 백선엽과 김원봉을 비롯한 한국 근현대사의 인물과 사건을 다룸에 있어 이념적 갈등 부분을 제외하고 바라보아야 하지만, 뺄 수도 없는 모순적인 위치에 있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단순합니다. 바로 체재경쟁과 함께 생존에 직결했었고, 지금도 그 연장선이기 때문입니다.
특히나 대한민국은 그 지리적 특수성과 역사성으로 인해 국제관계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과거 고조선과 고구려는 분열된 중국으로 인해 국력을 신장시켰으나 통일된 중국 왕조의 등장으로 국제관계의 거대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또한 고려와 조선 역시도 중국의 왕조교체와 북방민족의 등장으로 외교관계의 변화를 모색할 정도입니다.
조선과 대한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구한말 청과 러시아, 일본 등의 열강의 각축장이었으며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등 수많은 열강들이 대한제국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리고 이런 관계는 일제강점기하 36년 속에서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미칩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 등장한 소련에게 많은 독립운동 자금과 사상을 주입받습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이러한 지원이 절실했기 때문에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은 사회주의적 사상을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의 갈등은 매우 심각하게 작용합니다.
광복한 이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힘으로 직접 얻은 광복이 아니었기에,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초강대국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념적 갈등과 대립이 벌어집니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이런 과정을 통해 각각의 국가를 건설했고, 전쟁까지 벌어집니다. 그리고 이런 이념적 갈등은 현대까지 이어집니다.
이런 이념적 갈등은 결국 독립운동과 한국전쟁의 영웅, 즉 김원봉과 백선엽에까지 이어집니다. 끝없이 무장독립을 주창해 오고 나름의 활약을 펼쳤던 김원봉은 독립운동의 주체였습니다. 김원봉을 옹호하는 이들은 이런 김원봉의 독립운동정신을 높게 평가합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남한에서의 정치적 입지가 좁아지자 월북하여 김일성의 한축으로 작용합니다. 김원봉에 대해 비판하는 세력들은 김원봉이 한국전쟁의 원흉과 함께 그의 좌익적 사상에 대해 비판합니다.
그에 반해 백선엽을 비판하는 이들은 만주군관학교 출신으로 우리의 독립운동가와 민족들을 박해했다는 낙인을 찍습니다. 그러나 백선엽은 한국전쟁에서 다부동 전투를 통해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으며 북진에도 적극 참여하며 대한민국을 지켜낸 전쟁 영웅의 이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백선엽을 추앙하는 이들은 이런 백선엽의 행보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백선엽과 김원봉, 두 사람 모두 공과 과가 명확합니다. 백선엽은 대한민국의 적화를 막은 전쟁영웅이며, 대한민국 최초의 명예 원수로 추대하려는 움직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만주군관출신이라는 원죄에 사로잡혀 베트남 전쟁의 영웅이자 또다른 군부의 원로인 채명신 장군의 반대로 끝내 무산되었습니다. 김원봉 역시도 투철한 독립정신과 민족의 정기를 지킨 독립운동의 영웅이었으나 그가 끝내 월북하여 김일성의 최측근으로 한국전쟁을 일으켰다는 비판을 피할 길이 없습니다.
또 백선엽과 김원봉은 어떤 이념적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비판과 긍정이 확연하게 뒤바뀝니다. 보수적 이념을 가진 이들은 백선엽을, 진보적 이념을 가진 이들은 김원봉을 긍정합니다. 반대로 보수적 이념을 가진 이들은 김원봉의 월북과 좌익행적을, 진보적 이념을 가진 이들은 백선엽의 친일행보에 대한 비판을 합니다.
백선엽과 김원봉을 비판, 또는 긍정하는 이들의 의견과 주장, 근거에는 그 나름대로의 타당성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그 평가 역시도 갈릴 수밖에 없다는 것 역시도 옳습니다. 그리고 이런 평가에 의해 이명박 정부 당시 추진되었던 백선엽의 명예 원수 추진이 결국 실패로 돌아간 것 역시도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3. 정치적 이유로 인해 비판받는 두 인물
그러나 이 두 사람의 평가, 더 나아가 수많은 현대사 인물에 대한 평가는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역사는 정치와 밀접한 연관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개인이 어떤 성향과 이념을 가치로 삼고 있느냐에 다라서 그 평가 역시도 한쪽으로 치우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당연합니다. 그 부분을 지적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현재 벌어지고 있는 논란은 그 정도가 심합니다. 이런 부분들이 부각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두 인물과 역사적 사건이 정치적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이용은 두 사람의 공을 훼손하며, 과에 집중하게 합니다. 뒤에서 언급할 이승만의 대한 비판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도 정치적인 성향으로 인해 비판을 넘어 비난까지도 서슴지 않습니다.
먼저 백선엽부터 살펴봅시다. 백선엽은 한국 현대사, 특히 지금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존재하는 것에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입니다.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인해 절대적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적인 후퇴를 했습니다. 그런 안정적인 후퇴를 바탕으로 그는 자신의 1사단을 빠르게 재편성할 수 있었으며, 그런 빠른 군의 재편으로 낙동강 방어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바로 낙동강 방어선의 중요 길목이던 다부동 전투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대반격을 위한 계기를 마련합니다. 그런 활약으로 백선엽은 한국군뿐 아니라 미군에게도 존경을 받습니다. 그리고 이 백선엽은 남로당 프락치로 몰려 죽음의 위기에 빠져있던 박정희를 구제해 주었는데, 이 나비 효과로 인해 5.16 군사 쿠데타가 벌어졌으며, 그 박정희가 대한민국의 경제의 기초를 닦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백선엽의 공은 명확합니다. 그의 활약은 한국전쟁 당시 국가의 존립에 중대한 기여를 했으며, 그 공로는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존경받는 군의 원로로서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과 역시도 명백합니다. 백선엽은 1941년 12월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 9기 군관 후보생으로 입교하였고, 1942년 소위로 임관하였습니다. 이후 1943년 2월 간도특설대로 배치되어 광복 이전까지 소속되었습니다. 이 간도특설대의 복무 이력은 그의 인생에 영원한 낙인으로 존재합니다. 이는 백선엽 본인이 인정한 일화입니다. 백선엽은 스스로 간도특설대에 근무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는 중국 공산당계 빨치산을 토벌하는 것이 주 임무였으며, 조선독립군을 공격하지는 않았다고 그의 저서 '군과 나'에서 변명합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를 믿든 믿지 않든 그가 과도한 공격을 받았다는 점 역시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백선엽은 이런 부분들에 대해 변명하기도 하였으며 또한 수많은 논란이 있었으나 자신의 원죄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여러 논란이 있었으나 백선엽의 생전에는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백선엽의 죽음과 그로인한 현충원 국립묘지 안장 문제는 엄청난 정치적 논란으로 번집니다. 그는 명백한 국립현충원의 안장 대상입니다. 그러나 국회에서는 그의 친일행적을 문제 삼고 그의 국립현충원의 안장을 반대합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백선엽의 서울국립현충원 안장을 문제삼은 그의 국립현충원 안장에 대한 반대 논리는 역사적 사실보다 정치적 해석이 우선시된 측면이 있다는 비판도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정치적 해석으로 인해 그의 공보다 과가 부각되어 고인의 명예를 훼손시킬 수 있는 점도 존재합니다.
백선엽은 대한민국의 명과 암을 모두 지닌 상징적 인물입니다. 또한 백선엽은 보수 세력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친일행적이 있지만, 나라의 위기를 극복한 영웅이라는 이면은 보수 세력이 주장해 왔던 반공적 가치입니다. 그런데 이런 보수적 성향의 이념을 정면으로 반기를 들며 인정하지 않은 정치적 움직임이 바로 백선엽의 국립현충원 안장의 대한 반대입니다. 해서 이 논란이 매우 불편합니다. 그의 과는 분명히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가 이 나라를 지킨 영웅이라는 공 역시도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정치적 논쟁이 아닌, 학술적 논쟁으로 이야기해야 했던 것이라고 것이 필자의 생각입니다.
이번에는 김원봉을 살펴봅시다. 김원봉은 항일무장투쟁 노선에서 절대 빼놓으래야 빼놓을 수 없는 인물입니다. 조금 더 깊게 과장돼서 얘기하자면, 김원봉의 거취가 곧 항일무장투쟁의 길이며, 그의 거취가 곧 무장투쟁세력의 판도가 될 정도의 인물입니다. 다만 그가 당시에 정치적 입지 축소로 인해 월북을 했던 인물이기에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정권에서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습니다. 따라서 김원봉은 1987년 민주화 운동 이후 그 거취가 집중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했으며, 교과서에서도 매우 자세하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시기에 일제와 가장 처절하게 싸웠던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가 단장이었던 의열단과 조선의용대는 그의 상징이며 독립운동, 더 나아가 독립전쟁의 상징과도 같습니다. 그리고 조선의용대는 매우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부분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조선의용대가 이후 조선의용군으로 바뀌었으며, 김원봉은 한국광복군에 합류했으나, 다수는 중국 공산당에 합류했던 까닭입니다. 거기에 조선의용군은 모택동 휘하에서 중국 공산당의 승리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후 한국전쟁 당시 조선의용군은 그 풍부한 실전경험에 의해 북한군의 최정예 군대였다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김원봉을 평가하는 이들에게 중요 논쟁거리를 제공합니다. 실제 조선의용대는 이후 조선의용군으로 나뉘게 되고 김원봉의 본대는 한국광복군에 편입이 됩니다. 김원봉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이런 부분을 들어 김원봉을 사회주의자로 평가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김원봉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그가 이끄는 주력이 비록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고는 하지만, 그가 남한 정치권에서 밀려 결국은 북한으로 들어갔다는 부분을 매우 중요하게 여깁니다. 거기에 더해 그 조선의용군이 한국전쟁에서 최정예로서 활약하고 최전선에서 전쟁을 벌였다는 것이 비판에 요지입니다.
그러나 김원봉이 결국은 북한으로 들어가고, 그의 조선의용군이 뿌리가 되어 연안파라는 중요한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습니다. 김원봉이 직접적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가 결성하고 활약하던 모체인 조선의용군이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또한, 그가 끝내 북한에서 그 정치력의 미진함으로 숙청당한 것 역시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몇몇 유튜버들은 김원봉이 직접적으로 남한을 공격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 말하는데, 1950년 5월 19일 '노동신문'에 김원봉의 「5.10 만국선거도 멸망에 직면한 이승만 도당의 잔명을 구원할 수 없다」란 글을 보면 그가 어떤 사상을 가졌는지가 명백해집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악질 친일파로 부르는 이들은 신문과 언론등을 통해 일본의 전쟁에 천황을 위해 싸우자고 했던 이들 아닙니까. 친일파를 김원봉으로 미 제국주의를 대한민국으로 주어만 바꾸면 그토록 친일파 처단을 부르짖는 이들이 이야기하는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런데 왜 김원봉의 과는 이토록 외면하고 모른척하는 걸까요
더 깊게 들어가면 너무 복잡해지니 적당히 이 정도로 마무리 지어 보겠습니다. 백선엽과 마찬가지로 김원봉 역시도 그 공과 과가 뚜렷한 인물입니다. 김원봉이 독립운동의 거두였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가 일제강점기 시절 임시정부에서도 적극적인 정치노선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해방 후 귀국 후에도 여러 정치적 투쟁에서도 패배하여 북으로 올라간 것 역시 사실입니다. 아래에서도 다시 한번 다루겠지만, 김원봉은 북에서 적극적으로 언론을 통해 대남 강경노선을 펼쳤으며, 전쟁당시는 적극 선전을 통해 전쟁을 지원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몇몇 유튜브들은 김원봉이 한국전쟁에 참전한 기록이 어디에 있느냐며 반박하지만, 그는 후방에서 적극적으로 전쟁을 독려합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 당시 이 김원봉에게 서훈을 수여하는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4.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체성과 정통성
대한민국의 건국 논란도 매우 시끄러운 논란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건국논란 역시도 정치적 의도에 의해 붉어진 논란입니다. 그 논란을 최초로 꺼냈던 것은 이명박 정부 시절의 뉴라이트 논란입니다. 뉴라이트는 이승만과 박정희를 의도적으로 과대평가하여 정치적 입지를 다지고자 하는 불순한 의도로 역사가 사용된 예입니다. 그리고 그 뉴라이트 논란은 2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리나라를 역사전쟁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로 불리는 논란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이것을 자신들의 역사적 정통성을 세울 절호의 기회로 봅니다.
백선엽과 김원봉 논란, 그리고 추후 재점화된 대한민국 건국절 논란 등은 모두 문재인 정부 시절에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후 윤석열 정부에 들어서며 더욱 격화되고 심화됩니다.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의 두 인물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는 역사적으로 학술적으로 대화와 토론을 이용하면 되는데, 문재인 정부와 윤석열 정부는 이를 의도적으로 정치의 영역으로 끌어드렸습니다. 문재인 정부시절은 백선엽은 친일적 성격을 과하게 부각했으며,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시기의 위대한 민족독립운동가적 부분은 의도적으로 부각합니다. 윤석열 정부 시절은 육군사관학교 흉상 문제와 이승만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건국전쟁'으로 논란을 만듭니다. 바로 자신들의 정치적 정통성과 입지를 다지고 상대 진영을 단순히 친일파의 잔재, 혹은 종북세력으로 몰아 정치적 우세를 얻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특정 정치세력을 지지하거나 비판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만, 정치적 해석이 역사적 접근보다 앞서 보이는 점은 아쉬운 부분으로 지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많은 대중들은 역사를 바라볼 때 냉정한 이성과 객관적인 자세가 아닌, 감정을 중시합니다. 특정 인물의 영웅적 서사와 우리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에 관점을 맞춥니다. 역사를 통한 감정의 자극은 필연적으로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분노는 매우 위험합니다. 잘못된 분노의 표출은 국수주의적, 전체주의적으로 정치체제를 변질시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는 정치세력들은 대중을 위한다는 미명하에 대중의 입맛에 맞는 감정적 발언을 쏟아냅니다. 그리고 이런 감정적 역사관은 패배주의 역사관과 함께 삐뚤어진 민족주의를 자극하며 파시즘적 사고방식이 주입됩니다. 패배주의 역사관과 삐뚤어진 민족주의가 극대화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히틀러의 나치입니다. 우리는 히틀러를 최악의 독재자라며 비난하지만, 히틀러가 집권하는 과정과 총통에 오르도록 지원하고 지지한 것은 모두 그 삐뚤어진 민족주의와 패배주의로 점철되어있던 독일 민중이자, 대중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내용은 추후 다른 챕터에서 조금 더 자세하게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각설하고 다시 백선엽과 김원봉으로 돌아와서 두 인물의 이런 역사적 논란이 불편한 이유는 이 문제가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너무 확대해석이 아니냐고 말씀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논란은 의도적으로 대한민국 건국이라는 논란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흔히 진보세력이라고 불리는 이들은 바로 한국전쟁을 통해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백선엽의 친일행적을 의도적으로 부각하고, 김원봉의 좌익성격을 희석시키고 독립영웅적 부분에만 초점을 맞춥니다. 이것이 가지는 의도는 명백합니다. 이승만을 위시한 친일파가 세운 대한민국이라는 프레임입니다. 즉, 대한민국의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는 논리로 변질돼버린다는 점입니다.
또 그 반대로 보수세력이라고 하는 이들 역시 백선엽이라는 전쟁영웅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공산화되지 않고 지금의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아울러 공산화를 막아낸 이승만과 백선엽을 의도적으로 높이고, 반공을 국시로 삼으며 나라의 경제발전에 초석을 닦은 박정희를 옹호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들은 김원봉의 좌익적 행보를 의도적으로 부각하고, 그의 독립운동의 활약은 폄하하면서 자신들의 정통성을 높이려고 합니다.
이 두 주장은 극단적으로 치우쳐 있습니다. 한쪽은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의 흔히 보수세력들이 지켜왔던 자유민주주의적 이념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백선엽을 비롯하여 이 땅의 자유를 지키고 적화통일을 막아왔던 이들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넘은 왜곡과 감정적 비판은 자칫 잘못하면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꼴이 돼버립니다.
또 한쪽은 일제 침략기에 있었던 친일적 행적은 의도적으로 지우고 지금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의 역사만 강조합니다. 이는 과거사의 대한 반성 없이 현재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다는 의의와 결과에만 집중합니다. 따라서 이승만과 박정희의 대한 과도한 추앙과 반민특위 해체와 군사독재로 발생한 각종 탄압 등에 따른 엄연한 역사적 과에 대해서는 외면해버리고 맙니다.
그리고 이 두 주장은 서로를 향해 눈과 귀를 막은 채 자신들의 주장만 되풀이합니다. 상대의 논리적 반박에 대해서는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합니다. 실제로 백선엽 관련 논문을 찾아보는 과정에서 그의 존재와 활약이 현재의 대한민국이 존재함에 있어서 어떤 활약을 했는지에 대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백선엽을 그저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 정치권의 향배에 민감했고 자주적인 독립국가 건설이나 통일 등과 같은 민족적인 과제와는 전혀 무관한 인물이었다고 혹평하기도 합니다. 그가 한국전쟁을 거치며 어떤 업적을 이루었고, 국군과 미군에게 어떤 평가를 받는지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제외합니다. 김원봉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부 온라인 채널에서는 김원봉이 직접적으로 남한을 침공한 증거가 있는지를 문제 삼으며 평가 절하하기도 합니다.
이런 역사적 평가가 나오는 것은 역사가 학문과 진정한 인문학으로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와 감정적 논리에서만 비롯한 역사관으로,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만 하는 역사관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이런 역사관은 필연적으로 피해 의식과 패배주의를 심어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역사관의 흐름은 반드시 감정적 자극과 분노를 유발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미디어의 발달은 어느 순간 더더욱 자극적이고 감정적이며 왜곡적으로 변합니다. 또한 일명 사이다라는 포장하에 우리 민족을 위대시하고 일본과 중국, 미국을 향해 날 선 비판을 넘은 비난과 욕설을 하는 것에 환호합니다.
5. 마치며
이번 편은 백선엽과 김원봉이라는 인물에 대한 탐구와 해석, 비교보다는 이 두 인물이 가지는 상징성과 정치적 의도로 접근되는 역사적 해석에 대한 이야기를 중점으로 서술해 보았습니다. 이 두 사람을 제외하고도 한국 근현대사는 이런 정치적, 이념적 논리에 의해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이는 매우 슬픈 일입니다. 사례를 쭈욱 나열하는 것은 의미 없는 짓이기에 하지 않겠지만, 어떤 낙인이 써지면 이것을 벗어내기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의외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역사에 관심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관심이 없습니다. 따라서 한번 쓰인 낙인으로 기억된 사람들은 그 종전의 관념을 벗어던지기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는 더더욱 학술적이고 객관적으로 다가가야 하고, 이에 대한 판단은 대중 개개인의 몫으로 남겨야만 합니다. 하지만 현 한국사회에서 균형 있고 정상적인 역사적 인식을 가지기란 어렵습니다. 다양한 대중매체와 미디어를 통해 오염되고 가공된 사실이 퍼져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생각과 사상, 이념이 있습니다. 사상과 이념에 대한 이해도가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자신이 중시 여기는 가치관이 있기에 그 관점에서 해석하고 바라보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더더욱 객관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엇보다 중요할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는 한 번쯤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백선엽과 김원봉, 그리고 한국 현대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평가하려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하는 점보다, 먼저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혹시 왜곡되거나 편향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를 자문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판단은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의 몫으로 남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