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 전 그냥 좀 바빴고, 자주 귀찮았을 뿐인데요?
연휴의 어느 날 평소엔 귀찮거나 혹은 시간에 쫓겨 선뜻 손이 안 가는 핸드드립 커피를 마시기 위해 핸드밀을 잡았다.
전에 인수했던 가게의 인테리어 소품이었던 내 눈엔 꽤나 쓸모 있어 보인 엔틱한 칼리타 핸드밀은 그날의 날씨에 따라 분쇄도를 조정해야 하는 귀찮음과 분쇄도 테스트로 버려지게 되는 원두들이 아까워 결국은 사 먹자는 결론에 도달해 결국 외식비 카페 파트의 비중이 올라가게 만들고 있는 핸드밀이다.
그날 아침만큼은 전날 사 온 원두가 하필 홀빈이라는 것을 적당히 핑계 삼아 특별히 귀찮아져 보리라.
평소였으면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이쯤이면 적당하겠지?' 할 때가 정량인 눈저울을 믿었겠지만 그날은 하필 귀찮아도 되는 날이라 정량의 재판장 저울도 꺼냈다.
알마다 까맣고 고소한 향에 무거울 줄 알았던 원두는 겨우 열댓 알에 1~2그람을 웃돌았다. '원두 한 알의 무게는 생각보다 가볍구나' 하는 사색과 함께 핸들사이 동그란 틈으로 원두를 넣고는 움직이지 않게 단단하게 움켜잡고 덜그럭 덜커덕 열심히 핸들을 돌렸다.
핸들이 세 바퀴를 채 돌기전에 무게와는 사뭇 다른 밀도 깊은 향이 올라온다.
그날 저녁은 평소 열어보지도 않고 부족한 게 뭔지도 모른 채 채워둔 냉장고에서 적당한 재료를 찾아 재료가 제 옷을 잘 갖춰 입은 것만 같은 요리도 해냈다.
유튜브의 여러가지 레시피 중 가장 맛있어 보이는 레시피를 골라 오랜만에 짤지, 달지도 모르는 냉장고에서 내 뱃속으로 옮겨 넣는 게 목표인듯한 요리가 아닌 맛있고 꽤 근사하기까지 한 음식을 먹었다.
시간과 정성을 뱃속에 넣고나니 '이 양질의 맛과 사색들은 연휴의 특권일까, 여유의 특권일까?' 하는 사색이 일렁인다.
기꺼이 시간을 들여 커피를 내리고 음식을 만드니 어렸을 적, 아니 지금도 너무 좋아하는 전폭적으로 수용한 시간으로 완성되는 엄마의 미역국과 사골이 생각이 났다. 꼭 하루 반나절은 끓어야 맛있는.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걸려버린 빨리병에 '귀찮아' 혹은 '바쁘잖아' 라는 처방약은 마음에 쉼을 줄 줄 알았지만 큰 도움이 되진 않았다. 나의 이 빨리병은 단기간에 뭔가 잘못된게 아닌 영양실조처럼 무언가 꾸준히 결핍되어 온 것처럼 느껴졌다.
빨리병은 사색을 산만함이라 치부하며 볼륨을 낮추도록 했고, 점점 빨라지는 걸음속도와 식당에서든 카페에서든 '기다려' 라는 선택지가 더 합리적이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사의 시간을 돈으로 사 하루를 생산적으로 보내고 있다는 쿨한 커리어우먼 같은 자부심도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바쁨이라는 황사는 빨리라는 역병을 몰고왔다.
이젠 다정히 난 나의 엄마가 되어서 “ 바쁘더라도 시간은 꼭 챙겨먹어야지. 시간이 약이야.” 하며 충분히 사색하고 음미하고 경험하는, 어쩔땐 답답하기도 한 느림보 같은 시간을 먹여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