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추억 소환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계곡물소리가 경쾌하게 생동감이 넘치면 봄이 왔다는 신호다.
겨우내 듣던 물소리와는 사뭇 다르다. 어린아이 흥얼거림 같은 물소리가 움츠렸던 산촌 마을에 기지개를 켜게 한다.
언니의 행동거지가 달라졌다. 발걸음이 가벼워지고 '흑산도 아가씨'를 반복해 부르며 괜스레 분주해졌다. 지리산 마천 골에 산수화가 터지고 산벚꽃이 하얗게 흐드러지면 더는 견딜 수 없어 언니는 엄마와의 전쟁을 시작한다.
허리까지 땋아 내린 머리칼을 자르고 싶다고, 친구 숙희처럼 단발머리를 하고 싶다고 웅얼거리며 엄마한테 반기를 들었다. 예상했던 불호령이다.
"머리만 잘랐다 카문 몽디로 다리가 뿔라질 줄 알아라!"
깊은 속울음은 어린 내 마음도 아리게 했다. 열아홉 우리 언니의 봄은 그렇게 왔다.
청춘이었다. 며칠을 끙끙 앓는가 싶으면 어느새 푸릇해져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긴 머리를 땋아내려 새 댕기로 멋을 부렸다. 마을 친구들과 지리산 상봉에 고사리 뜯으러 간다고 허락을 받는 날은 깃발 날리며 물동이질을 해치웠다.
지리산에 산나물 뜯으러 가는데 웬 댕기 들여 꽃단장이 필요할까. 새벽부터 지리산에 오를 준비를 했다. 도시락도 싸고 누룽지도 쌌다. 마을 친구들이 대문 밖에서 언니를 불러내었다. 고사리를 뜯던 숯을 굽던 세상 누구보다도 자신이 돋보이고 싶은 열아홉 처녀들이다.
산 그림자가 성큼 마당에 내려오면 엄마는 마루 끝에서 서성거렸다. 해가 진 후에 언니가 돌아오면 여지없이 불벼락이 떨어질 일이었다.
언니가 자기 몸보다 더 큰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 더운 김을 내뱉으며 그것을 마루에 부렸다. 엄마는 안도하는 눈빛과는 달리 "다 큰 처녀가 이렇게 늦게 다니면 되나, 일찌근히 다녀야지!" 만족한 수확물에 신이 난 언니는 고사리가 많았던 어느 산자락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칠선 계곡 쪽으로 오르는 코스라고 했다. 산속에서 나물을 뜯고 그것을 이고 오느라 머리칼은 수세미가 되어 있었다.
뒤란의 살구꽃이 화라락 떨이 지던 어느 날 언니는 사고를 쳤다.
훗날 엄마의 표현을 빌리면 '머리칼을 댕강 자르고' 단발머리를 하고 나타났다'라고 했다.
변화된 언니 모습은 우리 형제들에게 숨을 멈추게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일까. 언니 다리가 뿔라질 줄 알았다. 엄마는 언니를 저 물건이 무엇이냐는 듯이 못 본 척 다른 일로 바쁘기만 하다. 나는 가슴이 콩닥거려서 엄마 치맛자락을 잡아당겨 보기도 하고, 엄마~! 불러보기도 하고 열 살짜리 내 앞에 일어나는 광경들이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았다. 엄마는 저녁상에서도 언니를 투명 인간처럼 대했다.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에 깜짝 놀라 나자빠진 사람은 나였다.
단발머리를 한 언니는 달력에서 보았던 윤정희, 문희보다도 더 예뻤다. 나는 언니를 자꾸 쳐다보았다.
언니가 봄내 뜯어말린 고사리를 팔아 전리품을 안고 돌아온 병사처럼 도도하게 보자기를 펼쳐 놓았다. 그 속에는 눈이 황홀할 만큼 예쁜 봄 스웨터가 두벌 들어 있었다. 올케언니의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경이로웠다. 고사리 뜯어말린 돈으로 스웨터를 사 온 언니가 여전사처럼 우러러 보였다. 나도 커서 고사리 뜯어야지. 부러워서 침을 꼴딱 넘겼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피천득, 오월)
꽃보다 아름답다는 신록, 그 무엇보다도 아름답다는 봄꽃
봄의 신록보다, 봄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유년의 뜰에서 피고 지는 추억이라는 꽃이다.
지천명 고개를 넘고 보니 유년의 기익이 새록새록 선명해진다. 봄이 가까이 다가오면 추억이 먼저 찾아와 봄소식을 전해준다.
누구에게나 유년의 뜨락은 언제나 봄 동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