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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치나남 Jan 19. 2021

내 인생의 모든 순간에 책이 있었다

- 지방 사립 사범대생이 교사를 한다고? 이야기 하나

아버지는 부산 명문 D 고를 졸업하고 B국립대 공대를 나왔다. 

아버지 연배로는 엘리트였을 것 같다.

대학을 나오고 산업화가 한창이었을 때 화학공학과를 나왔으니 말이다. 

사립 중학교 근무는 기업체에 취직할 때까지 잠시 머물려고 했는데, 평생직장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교사가 된 것은 아버지와 언니의 영향이다. 언니는 B 교대를 갔다. 그 당시에는 사대와 교대 중 교대를 졸업하면 100% 교사가 될 수 있었다.

지금의 수시 정시처럼 그 당시에는 전기, 후기 대학이 있었다. 

나는 전기 대학에 실패했다. 


지금의 수능과 같은 것이 학력고사다. 

학력고사 시험 성적을 가지고 대학 입학 서류를 전기, 후기 두 번 낼 수 있었다.

내 아래로 여동생이 세 명인데, 그 당시 줄줄이 중고등학생이었기에, 가정 형편상 재수는 말도 못 꺼냈다. 

나도 나이가 쉰이 되고 아이 둘을 대학에 보내고 나니, 그 당시의 아버지가 이해되었다. 좀 힘들었을 것 같다.

아니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홀벌이에 딸밖에 없는 데다가, 먹고 입히고 대학을 보내려고 하니… 


전기 대학에 떨어지고 후기 대학에 들어갔다. 아버지가 근무하는 사립 B중학교는 대학 재단이 있었는데, 그 재단의 대학교에 들어갔다. 나에게는 의논과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다. 재수와 타 사립대는 생각도 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재단 장학금이 학비의 50%인 B 장학금이 나왔다. 

시험에 한 번 떨어졌으니, 입도 벙긋 못했다.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이때부터 생겼다. 

내 인생에 있어서 가장 위축되었던 시기다. 

경제력이 결정권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B 사립대 사범대학 일본어 교육학과에 차석으로 입학했다. 

학과는 경비실 전화로 건 아버지와의 5분 통화로 간단히 정해졌다. 취미, 적성, 특기 이런 것 따위는 없었다.

점수와 찰나의 선택으로 정해졌다. 


영어는 중·고등학교 6년 동안 배웠으니. 새로운 외국어면 조금은 경쟁력이 되지 않을까, 희소가치가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아주 심플하게 일본어를 선택했다.   

   

 나는 87학번으로 당시는 일본이 한창 미국과 맞먹는 세계 경제 성장률을 보일 때다.

'우리나라와 가까우니 언젠가는 가볼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우리나라가 외국에 나가는 것이 자율화가 된 것은 88년 올림픽 이후이다.

 보통 사람은 외국에 나갈 수 없었다.

 그만큼 그 당시 우리나라는 못살았다.

 외국에서 비자가 안 나왔다.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무리해서 졸업여행을 갔다. 

친한 친구 두 명이 같이 가자고 꼬셨다. 

친구들이 다 간다고 엄마에게 억지를 썼다.

엄마는 꼭 가야 하겠냐고 물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보통은 떼를 쓰지 않는 편인데, 이때는 조금 고집을 부렸을 것 같다.


 또래 친구와의 자존심도 있고 했으니 말이다. 

엄마도 그것을 아니까 곗돈 탄 것을 주었던 것 같다. 


 어쨌든 지금 생각하니 참 고맙다. 

꼬셔 준 친구도, 무리해서 일본 졸업여행을 보내준 엄마도. 

왜냐하면, 그때 그 여행이 내 꿈의 씨앗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학연수와 여행이 결합한 알찬 프로그램이었다.

 나에게 유학 가고 싶다는 막연하지만, 뚜렷한 목표를 심어주었다. 


 사립 사범대를 졸업하면 흔치 않은 일이지만, 사립 중·고등학교에 근무할 기회가 아주 가끔 생기기도 한다. 물론 연줄과 기회와 타이밍이 맞아야 했다. 실력도 남 못지않게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럴 기회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정아가 사립학교에 자리가 나서 가면 참 좋겠다.’라는 소망을 종종 말했다. 둘째 딸이 교사가 되면 좋겠다는 희망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 자매는 아버지로부터 어릴 때부터 ‘여자도 직장을 다녀야 한다는 말을 듣고 컸다.

 경제적으로 힘드셨기에? 아니면 딸밖에 없는 아버지로서 딸의 미래를 걱정해서? 둘 다였을 것 같다. 


 세뇌가 되었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 영향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다섯 자매 중에 네 자매가 교사다. 초, 중, 고 이렇게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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