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언어에 이머젼하라
김민식 PD가 쓴 ≪영어책 한 권 외워봤니?≫라는 책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책 한 권이라는 목표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성과가 보이지 않아도 포기하지 말고 한 권을 다 외울 때까지는 해보는 겁니다.
교재 앞부분은 쉬워서 진도가 잘 나갑니다.
후반부에 들어서면 점점 더 암기하기가 어려워집니다.
문장도 어려워지고, 누적된 표현의 가짓수가 많아지면서 복습을 할 때마다 소요 시간이 늘어나거든요.
무엇보다 가장 힘들 때는, 몇 달째 열심히 했는데도 실력이 나아지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그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야 합니다.
적어도 첫 번째 계단을 만날 때까지는 버텨야 합니다.
양질 전환이 이루어지는 첫 번째 전환점 말입니다.
이 첫 고비를 넘기면 영어 공부에 재미가 붙을뿐더러, 인생에서도 힘든 순간에 포기하지 않고 버티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나는 이 책을 보고 ‘와! 나처럼 통째로 외운 사람이 있네!’라고 생각했다.
그는 영어회화책을 한 권 통째로 외웠지만 나는 문장을 통째로 암기했다.
문장 자체를 외웠다.
뇌가 문장을 외우면 문장의 구조를 기억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상황에서도 단어와 문장이 자연스럽게 활용되는 느낌을 받았다.
어쨌든 문장 속에서 외운 단어는 신기하게도 잊어버리지 않았다.
기억에 오래 남는다.
스티븐 크라센(Stephen D. Krashen)는 그의 ‘언어습득이론’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우리 능력의 현 수준에 비해 한 단계 높은 Input를 포함하는 메시지를 이해함으로써 언어를 습득한다.”
그가 말하는 ‘한 단계 높은 Input을 포함하는 메시지’라는 것은 현재 수준이 (i)라고 했을 때, 현재 수준보다 약간 높은 수준을 (i+1)을 말한다.
나의 수준보다 약간 높은 수준의 Input을 하는 것이 언어 습득의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이 입력가설 이론을 대학교 때 알았던 것은 아니다.
한참 후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외국어 교수법 책을 읽다가 크라센 교수의 언어 습득이론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딱 이렇게 공부했다.
약간 높은 수준의 Input을 하면서 일본어를 배웠다.
한창 일본어를 공부할 때 매일 A4 한 장씩 문장을 외웠다.
1년 정도 집중적으로 외운 것 같다.
그러고 나니 일본어 공부는 추월차선을 타고 갔다.
학과 점수도 3학년 때부터는 탑을 찍었다.
문장을 통해서 외운 단어나 관용어구는 잘 잊히지 않는다.
자전거나 수영을 어릴 때 배우고 10년 후 할 수 있는 것과 비슷하다.
그래서 ‘아! 어학도 스포츠하고 비슷하구나.’ 잠재의식에 프로그래밍이 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세월이 흐르면 완벽하게 남아 있지 않을지는 몰라도, 남아 있다.
우리 머릿속 하드웨어 어딘가에 담겨있다.
어떤 계기가 생겨서 다시 끄집어내면 처음 배울 때와 달리 노력의 반도 안 든다.
만약에 중간중간 적절한 피드백을 해준다면 그 회복력은 훨씬 빠르다.
잠시 뚜껑을 닫아 놓은 상태라고 할까? 필요한 순간, 뚜껑을 열면 잠재되어 있던 언어기능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그 시절 지금 생각해 보니 일본어에 이머젼(Immersion) 한 것 같다.
이머젼(Immersion)은 외국어 학습자가 그 언어 환경에 완전히 빠져 있는 상태를 말한다.
내 주변의 모든 것을 일본어로 바꾸었다.
내 주변의 보이는 단어와 사물을 일본어로 바꾸었다.
생각도 일본어로 하려고 애썼다.
매일 A4 한 장씩 일본어 문장을 외운 것은 임용고시 합격이라는 결실을 가져왔다.
내 인생의 최고의 기회에 빛을 발한 것이다.
1991년 처음 시행된 임용고시는 공지가 나고 3개월 후에 시험이 있었다.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 짧았다.
평소 언어 실력을 키운 사람에게 유리하였다.
나는 매일 A4 한 장씩 외운 근력으로 83:1의 경쟁률을 뚫고 임용고시에 합격할 수 있었다.
1년 동안 매일 A4 한 장씩 문장을 외운 결과였다.
외국어는 문장을 외우는 것이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