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없는 중개자들(The World for Sale)

하비에르 블라스, 잭파시

by 이근엽

최근 몇 년 사이, AI와 로봇 기술이 세상을 근본적으로 바꿀 것이라는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여기에 탄소중립까지 더해지면서, 마치 기존의 물질문명은 곧 대체될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얼마전 화제가 된 에드 콘웨이의 『물질의 세계』바츨라프 스밀의 『세상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가』 등을 읽고 나면, 이런 인식이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져 있는지 새삼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않을 뿐, 세계는 여전히 석유와 가스, 광물과 곡물같은 물질 위에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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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희토류를 둘러싼 갈등처럼 자원을 둘러싼 미중 패권 경쟁이 주목받고 있지만, 사실 이러한 ‘물질’을 실제로 지배해 온 집단은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미중 패권 전쟁 이전부터,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원자재를 중개하고 유통하는 보이지 않는 플레이어들은 세계 경제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는데, 이 책은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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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를 실제로 움직이는 원자재 기업들은 대중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애플이나 테슬라처럼 브랜드를 앞세우지 않고, 주가 차트로 주목받지도 않습니다.


대신 석유와 곡물, 금속과 에너지를 쥐고 조용히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기업이 글렌코어입니다.

글렌코어는 구리·코발트·아연 같은 광물과 석탄, 석유를 동시에 다루는 세계 최대 수준의 원자재 트레이더이자 광산 기업으로, 연 매출 규모는 웬만한 중견국의 GDP에 필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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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산물 분야에서는 카길이 압도적입니다.

카길은 곡물 거래와 저장, 가공, 운송을 아우르며 전 세계 식량 공급망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고, 비상장 기업임에도 매출 규모는 글로벌 최상위권에 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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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시장에서는 비톨트라피구라가 대표적입니다.

이들은 석유와 천연가스, 정유 제품을 중심으로 하루 수백만 배럴 규모의 거래를 중개하며, 산유국과 소비국, 제재 국가와 비제재 국가를 연결하는 ‘보이지 않는 허브’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기업들의 공통점은 명확합니다.


"국가는 바뀌어도 거래는 지속되고, 정권은 교체돼도 물질은 흐르게 한다."


세계 경제의 혈관을 따라 움직이는 이들 중개인들은, 전면에 나서지 않지만 그 어떤 국가보다도 안정적으로 세계를 관통하며 우리의 삶을 조용히 지배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원자재 시장의 권력 구조가 바뀐 역사가 있습니다.


한때 석유 시장은 브리티시 페트롤리엄 등과 같은 수직계열화된 정유사(세븐시스터즈, 엑슨모빌, 코노코필립스, 쉐브론, 쉘, 토탈, ENI)들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원유 채굴부터 정제, 유통까지를 직접 통제하는 방식이 표준이던 시기였지요.


그러나 사우디아라비아를 필두로 산유국들이 석유를 국유 자원화하기 시작하고, 1970년대 석유 파동을 거치면서 판이 흔들렸습니다.

기존 세븐시스터즈들의 원유시장에 대한 영향력은 약해졌고, 산유국들의 힘이 세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원을 통제하는 국가들이 힘은 세졌지만, 이를 안정적으로 사고팔고 운송하며 금융까지 연결하는 방법을 몰랐던 이들 국가는 이러한 역할을 대신해 줄 주체를 필요로 했습니다.


이 틈을 파고든 것이 바로 원자재 트레이딩 회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기존 정유사들을 밀어내고, 원자재 시장에서 실질적인 권력자의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결코 깨끗하지 않았습니다.


경제 제재를 받는 아프리카·남미·러시아의 독재 정권과 거래하며, 국가가 공식적으로 할 수 없는 일을 대신 수행했고, 그 대가로 막대한 사업 기회와 이익을 얻었던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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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 모든 활동은 철저히 가려졌는데, 이들 기업 대부분은 철저히 비상장 회사를 유지했기에 외부의 감시와 여론의 관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후 원자재 트레이더들의 세계는 또 한 번 변곡점을 맞습니다.


금융자본주의가 본격화되면서, 이들은 점차 월가와 손을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원자재 기업들은 일정 부분 자본시장에서 자본을 수혈받으며 시장의 통제를 받게 되었지만, 동시에 월가의 자본과 금융기법을 흡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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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단순히 원자재를 사고파는 중개인이 아니라, 막대한 자본을 동원해 가격 변동 자체에 베팅하는 플레이어로 변모하게 됩니다.


선물과 옵션 같은 금융기법은 이들에게 새로운 무기를 제공했고,


실물 거래에서 쌓은 정보와 네트워크에 금융 레버리지가 결합되면서, 원자재 시장에 대한 영향력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커졌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시장의 변동성 자체를 수익의 원천으로 삼으며 과거보다 훨씬 더 투기적인 모습으로 천문학적인 이익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질을 지배하던 중개인은, 이제 금융을 통해 물질의 가격을 흔드는 존재가 된 셈이죠.


이러한 배경 속에서 "The World for Sale(한국어판 『얼굴 없는 중개인들』)"은 원자재 회사들의 초창기 설립자들부터 현재의 기업과 경영진에 이르기까지 그 행적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개별 기업의 성공담에 머무르지 않고, 탈식민지화, 냉전, 금융자본주의의 부상, 그리고 오늘날의 지정학적 갈등까지 세계사의 큰 흐름과 맞물려 전개됩니다.


그 결과 이 책은 원자재 시장에 대한 분석서를 넘어, 자본과 권력, 물질이 어떻게 결합해 세계를 움직여 왔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서사를 완성시키고 있습니다.


읽다 보면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몰입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도 아마 그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실제 경영진들이 경제 제재 하에 놓인 독재 정권과 거래를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벌어진 구체적인(부정부패로 얼룩진) 일화들이 등장하면서, 이 책은 경제서라기보다 정치 스릴러에 가까운 긴장감까지 선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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