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근동에서 왕권의 부상과 신권의 변화
여호수아 이후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12지파 부족들은, 중앙성소의 제사장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변 국가와의 전쟁과 같은 위기가 닥칠 때마다 ‘사사’라는 임시 지도자가 등장해 공동체를 이끌고 위기를 극복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 시기를 구약성경은 ‘사사기’, 즉 사사의 시대로 기록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사사 시대를 마무리하는 인물은 사무엘이다.
그는 특이하게 사사이면서도 제사장의 지위를 겸했던 자로, 이전의 사사들과 비교해도 이스라엘 공동체에서 갖는 영향력과 권위가 매우 컸다.
사무엘이 나이가 들면서 그의 아들들이 사사의 자리를 맡았지만, 그들은 아버지와 달리 공정하게 재판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 아버지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고 이익을 따라 뇌물을 받고 판결을 굽게 하니라.”
(사무엘상 8:3)
이 상황을 지켜보던 이스라엘 장로들은 사무엘을 찾아와 새로운 요구를 내놓는다.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사무엘상 8:5)
사무엘은 그 요구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하나님에게 뜻을 묻기로 한다.
기도를 들은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왕의 제도에 대해 엄히 경고하되 백성들의 요구를 들어주라고 하신다.
이후 사무엘은 하나님의 승인과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키가 머리 하나는 더 큰’ 베냐민 지파 사람 사울을 택하여 기름을 붓고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세운다.
사무엘의 선택과 정치적 후원으로 우여곡절 끝에 왕의 자리에 오른 사울은 초반에는 제사장인 사무엘의 뜻을 충직히 따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해양 민족(Sea Peoples)의 후예로 알려진 호전적인 블레셋(Philistines,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어원이 된다)과의 연이은 전쟁 과정에서 결국 문제가 발생한다.
블레셋과 전투를 위해 '길갈'에 모인 이스라엘은 적군의 위용에 잔뜩 겁에 질렸고, 승리를 기원하는 제사를 주재해야 할 사무엘이 나타나지 않자,
애가 타던 사울은 임의대로 직접 하나님에게 올릴 제사(번제)를 거행한다.
번제를 마치자 마자 도착한 사무엘은 사울이 자신을 기다리지 않고 번제를 드렸다며 질책한다.
더 나아가 질책을 넘어 하나님께서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넘길 것이라는 말을 남기며 사울을 두고 자신의 거처로 떠나 버린다.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삼상 13:11~14)"
이후 사무엘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베들레헴 촌구석 집안의 막내 목동, 다윗을 왕의 재목으로 낙점한다.
골릿앗을 무찌르고 전쟁 영웅이 되었지만 사울의 질투로 도망자 생활을 해야 했던 다윗은, 천신만고 끝에 왕에 오르고 본격적인 왕정시대를 열게 된다.
이 이야기는 성경을 넘어 서구 문화권에서는 가장 잘 알려진 이야기 중 하나로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
특히 사무엘이 처음에는 왕의 제도(왕정)를 반대하다 어쩔 수없이 받아들인 후, 처음 간택한 왕이 마음에 차지 않자 다른 왕을 점지하고는 역사의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져 버린 이야기는 전체 이야기를 관통하는 핵심 플롯이다.
배신과 배신이 얽힌 정치드라마와 전형적 영웅서사가 모두 담긴 이 이야기에는 실제 어떤 배경이 깔려 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사사시대는, 고대근동을 지배했던 거대한 제국들, 즉 메소포타미아(수메르), 아시리아, 히타이트(아나톨리아), 이집트의 세력이 충돌하는 지점인 동시에 정치적 완충지대인 레반트(가나안)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고대근동의 정치적 풍경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국가의 모습과는 상당히 달랐다.
넓은 영토를 하나의 권력이 통치하는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라, 도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수많은 작은 정치 공동체들이 공존하는 세계였다.
메소포타미아 평야에는 우루크, 우르, 라가스, 키시와 같은 도시들이 각각 독립적인 정치 단위를 이루며 서로 경쟁하고 충돌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 공동체의 중심에는 대개 신전이 자리하고 있었다.
신전은 단순한 종교 시설이 아니라 공동체의 경제와 행정을 관리하는 중심 기관이었고, 신전의 제사를 담당하는 제사장 집단은 자연스럽게 도시 사회에서 중요한 권위를 갖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많은 도시에서 초기 통치 구조는 신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신권적 질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공동체의 정치 구조가 제사장에 의해 일방적으로 지배되는 형태는 아니었다.
도시 공동체는 대체로 여러 부족과 가문이 결합한 연맹 구조를 이루고 있었고, 공동체의 중요한 문제들은 이러한 집단의 대표자들이 모여 합의하는 방식으로 결정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 권위와 부족 연맹의 합의 구조가 함께 존재하는 정치 질서, 즉 일부 학자들이 말하는 ‘원시 민주주의적(primitive democracy)’ 구조였던 것이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제사장(EN, priest-king)은 신전과 종교 의례를 통해 공동체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대표했지만, 동시에 부족 집단들의 이해관계와 합의 과정 역시 도시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사장과 부족연맹체가 견제와 균형을 이루었던 정치 구조는, 공동체가 노동력이나 자원을 필요로 할 때 이를 어떻게 동원했는지를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성벽이나 운하와 같은 공공시설의 건설, 전쟁 준비, 군사 동원과 같은 사업은 공동체 전체의 참여를 요구하는 일이었다.
이러한 대규모 동원과 같은 중요한 정치적 결정은, 단순히 신전 행정의 일방적인 지시 보다는 여러 부족과 가문이 결합한 연맹의 지도자들이 모여 합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정치적 합의와는 별도로, 그 결정을 신의 의지와 연결하기 위한 제사와 신탁, 점술과 같은 의례가 동반되었다. 실제 결정은 공동체의 합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졌지만, 그 결정은 신의 뜻이라는 형태로 공동체 앞에 제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편, 수메르에서 왕을 뜻하는 ‘루갈(lu-gal)’이라는 용어는, 제사장과 부족연맹체에 더하여 초기 도시국가의 정치구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세력의 존재를 암시한다.
루갈은 문자 그대로는 ‘큰(gal : big) 사람’ 혹은 ‘위대한(gal : great) 사람(Lu)’이라는 뜻이었다.
초기에는 외부의 위협이나 도시 간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 부족 연맹체에 의해 ‘한시적’ 군사 지도자로 추대된 인물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된다.
평상시 도시의 행정과 종교 의례는 신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공동체가 전쟁에 직면하면 이러한 인물이 부족 집단들의 합의를 통해 군사 지도자로 추대되어 도시의 방어와 전쟁을 지휘했던 것이다.
이처럼 초기 도시 공동체의 정치 질서는 신전 권위, 부족 연맹의 합의 정치, 그리고 위기 시에 등장하는 한시적 군사 지도자라는 세 요소가 결합된 구조 위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치 구조 상의 균형은 점차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메소포타미아 평야의 도시들은 서로 인접해 있었고, 물과 토지를 둘러싼 경쟁은 끊임없는 충돌과 전쟁을 낳았다.
도시 공동체가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훨씬 더 조직적인 군사력과 안정적인 지휘 체계가 필요해졌다.
처음에는 외부의 위협이나 전쟁과 같은 위기 상황에서만 등장했던 군사 지도자가, 도시 간 경쟁이 치열해지고 전쟁이 일상이 됨에 따라 점차 더 큰 권위를 갖게 되었다.
군사 지도자의 권력은 점차 상설화되기 시작했고, 전쟁에서의 지휘권을 넘어 공동체의 자원과 노동력을 동원하는 권한 역시 점차 그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신전과 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기존의 정치 질서에 긴장을 가져왔고, 얼마 안가 도시 정치 구조에는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다. 신전 중심의 기존 권위 구조와 충돌한 것이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고대 근동의 여러 도시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신권과 왕권 사이의 긴장 관계가 곳곳에서 확인된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의 도시 라가시(Lagash)에서는 기원전 24세기경 통치자 우루카기나(Urukagina)가 신전 권력과 관련된 여러 관행에 개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제사장 집단은 장례 의식이나 제사와 같은 종교 행위를 명목으로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상당한 재화와 노동을 요구하고 있었고, 신전은 도시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통제하고 있었다.
우루카기나는 사회개혁을 명분으로 이러한 관행에 제한을 가하는 조치를 취했으나, 실상은 새롭게 강화된 정치 권력이 기존의 신전 권력에 개입하기 시작한 사건에 가깝다.
그러나 신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에 이러한 긴장은 오래가기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사장과 왕이 각자 역할과 지위를 분담하는 방식으로 상호간 타협이 이루어졌다.
메소포타미아의 도시 국가들에서는 새롭게 등장한 왕권이 기존의 신전 권위를 완전히 제거하기보다는 제사장 계급의 특권을 일정부분 인정하였다.
라가시의 통치자 구데아(Gudea)의 비문을 보면, 그는 자신의 통치를 신의 명령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반복해서 설명하고 있다.
구데아는 전쟁의 신 ‘닌기르수’가 꿈에 나타나 신전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고 기록하며, 자신의 통치를 신의 뜻을 수행하는 행위로 정당화하였다.
왕은 신전과 제사장의 권위를 인정하는 대신, 군사와 행정을 관할하는 실질적 통치자로서 자신을 신의 뜻을 현실 세계에 구현하는 대리인으로 선전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집트에서는 이러한 긴장이 다른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왕권과 신권이 서로 다른 권위로 존재하며 타협 관계를 형성했다면, 이집트에서는 두 권력이 처음부터 하나의 권위로 결합되어 있었다.
이집트 왕권 이데올로기에서 파라오는 단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신적 존재로 이해되었다.
살아 있는 왕은 하늘의 신 호루스(Horus)의 현현으로 여겨졌고, 죽은 왕은 저승의 신 오시리스(Osiris)와 동일시되었다.
또한 왕은 태양신 레(Ra)의 아들로 불리며 신의 혈통을 이어받은 존재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관념 속에서 왕은 동시에 최고 제사장이었고, 종교 권위와 정치 권위는 왕의 권력 속에서 완전히 통합된 형태로 나타났다.
왕권과 신권이 타협을 이룬 정황은 도시의 공간 구조에서도 확인된다.
수메르의 많은 도시에서는 신전과 궁정이 도시의 중심에 나란히 존재하였다.
신전은 종교 의례와 공동체 경제를 관리하는 중심 기관이었고, 궁정은 군사와 행정을 담당하는 정치 권력의 중심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도시에서는 신권과 왕권이 서로 다른 권위로 존재하며 일정한 균형 속에서 공존하는 정치 구조가 형성된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세계에서 나타난 신권과 왕권의 화해는 두 권력이 완전히 대등한 공존이라기 보다는, 왕권이 신권을 흡수해 가는 과정 속에서 종교적 권위를 정치적 정당성으로 활용하는 형태에 가까웠다.
성전과 궁전이 통합된 양식으로, 궁전 단지 내부 한켠에 성전(지구라트)이 위치하고 아시리아 사르곤 2세의 궁전이 성벽 위에 건축되어 신이 왕권을 뒷받침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겉으로는 신권과 왕권의 화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공동체의 재정과 노동력 동원, 군사력과 같은 핵심 권력은 점차 궁정의 통제 아래 들어가게 된 것이다.
신권은 왕권의 시녀로 기능하게 되었고, 왕은 신의 권위를 등에 업은 채 공동체의 노동력과 재화뿐 아니라 토지와 생산물, 군사력과 행정 질서까지 자신의 권력 아래 두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이제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이스라엘 장로들이 사무엘을 찾아와 왕을 요구했던 이유는 단순한 정치적 변덕이 아니었다.
레반트 지역의 현실 속에서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블레셋과 같은 강력한 적들과 맞서 싸워야 했고, 부족 연맹 체제로는 이러한 전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었다.
주변의 여러 나라들처럼 안정적인 군사력과 지휘 체계를 갖춘 왕이 필요하다는 요구는 당시 상황에서는 매우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사울이 왕으로 선택된 과정 역시 흥미롭다.
그는 스스로 왕이 된 인물이 아니라 제사장 사무엘에 의해 간택된 왕이었다.
처음에는 사무엘의 권위를 인정하며 그의 지도를 따르는 듯 보였지만, 전쟁이라는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오자 상황은 달라졌다.
길갈에서 벌어진 번제 사건에서 보듯, 사울은 제사장이 맡아야 할 종교 의례를 스스로 수행하며 왕으로서의 권위를 직접 행사하려 했다.
이는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왕권이 제사장의 권위를 넘어 독자적인 권력으로 자리 잡으려는 첫 번째 신호로 볼 수도 있다.
사무엘이 보인 반응 역시 의미심장하다.
그는 단순히 사울을 질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왕으로 택하셨다고 선언한다.
이후 사무엘은 베들레헴의 목동 다윗에게 조용히 기름을 붓고 역사의 전면에서 물러난다.
이 장면은 왕권의 탄생 과정에서 기존의 종교 권위가 어떤 방식으로 반응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모든 과정은 놀라울 만큼 고대 근동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정치 구조의 변화와 닮아 있다.
부족 연맹적 공동체가 지속적인 전쟁 속에서 왕권을 받아들이고, 새롭게 등장한 왕권이 기존의 신전 권위와 충돌하며, 결국 일정한 타협 속에서 왕이 우위를 점하는 구조 말이다.
이스라엘의 왕정 역시 바로 이러한 역사적 흐름 속에서 탄생하고 있었다.
왕정의 도입으로 이 이야기는 마무리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공동체의 질서를 뒤흔들 또 하나의 긴장이 숨어 있었다.
사무엘이 말한 ‘왕의 제도’가 바로 그것이었다.
왕을 요구받은 사무엘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에는 생략된 한 장면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버린 것은 사무엘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왕의 제도가 가져올 결과를 백성들에게 분명히 전하라고 하신다.
이에 사무엘은 이스라엘 장로들과 백성들에게 왕의 제도가 공동체의 삶을 어떻게 바꾸게 될 것인지 경고하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