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10]야훼는 왜 왕을 요구한 백성을 심판했나

왕의 제도와 채무의 굴레, 그리고 채무면제 칙령

by 이근엽

왕의 제도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


지난 글에서, 왕의 제도를 둘러싼 사무엘과 이스라엘 백성 간의 긴장, 그리고 이후 벌어진 초대왕 사울의 배신과 사무엘의 응징 이야기를 보았다.


이어 등장한 다윗왕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매우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그는 이스라엘의 절정기를 이끈 위대한 왕으로 기억될 뿐 아니라, 이후 메시아 사상의 중심에 놓인 인물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도 다윗 왕조는 특별한 약속과 함께 긍정적으로 묘사된다.


그런데 여기에 남겨진 이야기가 있다.


왕을 요구받은 사무엘이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행위가 우상숭배와 같은 죄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사무엘에게 왕의 제도가 무엇인지 백성들에게 분명히 알려 주라고 명하신다.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내가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날부터 오늘까지 그들이 모든 행사로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김 같이 네게도 그리하는도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을 듣되 너는 그들에게 엄히 경고하고 그들을 다스릴 왕의 제도를 가르치라.
(사무엘상 8:7~9)


사무엘이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백성들에게 전한 경고는 이렇다.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사무엘상 8:11~18)
Samuel Warns of Monarchy Dangers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장로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사무엘상 8:19~20)


사무엘은 결국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사울을 초대왕으로 삼고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마지막 회합에서 마지막 말을 남긴다.


너희는 이제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행하시는 이 큰 일을 보라
오늘은 밀 베는 때가 아니냐 내가 여호와께 아뢰리니 여호와께서 우레와 비를 보내사 너희가 왕을 구한 일 곧 여호와의 목전에서 범한 죄악이 큼을 너희에게 밝히 알게 하시리라
이에 사무엘이 여호와께 아뢰매 여호와께서 그 날에 우레와 비를 보내시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와 사무엘을 크게 두려워하니라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가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사무엘상 12:16~19)


이 이야기는 신권을 대표하는 제사장 사무엘과 왕을 바라는 백성들 간의 팽팽한 갈등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훨씬 준엄하고 무섭기까지 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의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왕의 제도를 이처럼 강하게 경고하셨을까.


왕권의 부상이 가져온 변화 – 계급의 고착화


왕권의 등장은 단순히 통치 형태의 변화에 그치지 않았다. 그것은 공동체 내부의 권력과 자원의 흐름을 근본적으로 재편하는 사건이었다.


하나의 절대 권위를 정점으로 하는 질서는 필연적으로 상하가 명확히 구분되는 하이어라키(Hierarchy)를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신의 대리자로서 권력을 독점한 왕 밑으로, 신적 권위를 뒷받침하는 제사장과 연맹부족 지도자 출신의 귀족, 재정과 행정기록을 담당하는 관료들이 위계적 서열을 이루었다.


앞의 이야기에서 등장한 성전경제 체제 안에는 이미 기능 분화에 따른 계층 구조가 형성되어 있었다.


왕권 체제의 등장은 속성상 기존의 계층 구조를 해체하기보다 더욱 강화하였다.

나아가 자원을 ‘생산하는 자’와 ‘통제하는 자’를 구조적으로 분리하며 신분과 경제 상 위계 질서를 굳혀갔다


왕정이 모습을 갖추는 것에 맞추어 제사장, 서기관, 상인으로 이루어진 도시 중심의 엘리트 계급은 점차 자원의 통제와 재분배를 장악하는 집단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반대로 생산을 담당하던 농민과 목축민은 그 아래에 위치한 계급으로 신분이 고정되어 갔다.


특히 왕권과의 타협 속에서 제사장 계층은 상당한 경제적 특권을 보유하게 되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여러 문서와 비문들은 성전이 막대한 경제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라가시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들 역시, 바우(Bau) 신전이 광대한 농지를 보유하면서 그 땅에서 일하는 목동과 농부, 노동자 집단을 조직적으로 관리하였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왕권을 지탱하는 제도들


왕권 체제가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노동력과 군사력, 그리고 생산물을 조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여러 제도적 장치가 필요했다.


왕권 부상의 직접적 계기가 된 외부의 위협과 전쟁은, 부족연맹 체제에서 단발적으로 행해지던 군사동원 방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상비군 제도가 도입되었고 군사동원 역시 이전과 다르게 상시적으로 이루어졌다.

아시리아 센나케립(성경의 산헤립) 궁전의 '라기스 공성전 부조'


마리(Mari) 왕궁에서 발견된 서신 문서들에는 왕의 명령에 따라 각 지역에서 병력을 모집해 군대에 합류시키라는 지시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각 촌락에서 200명의 남자를 보내 왕의 군대에 합류시키라.



다른 서신에서도 지역 행정관에게 병력을 모집하여 왕의 군사 원정에 참여시키라는 명령이 나타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상비군은 이내 병사들의 장비와 병거, 말, 그리고 군사 조직을 유지하기 위하여 공동체의 자원을 대규모로 그것도 빠른 속도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상비군과 함께 왕권을 떠받치는 관료제 역시 적지 않은 자원을 필요로 했다.


상비군과 관료제는 다른 무엇보다 안정적인 재정 기반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은과 곡물, 가축, 포도주, 기름과 같은 생산물을 정기적으로 거두어들이는 조세와 공납 제도가 점차 정교하게 모습을 갖추어 갔다.


메소포타미아와 아시리아의 왕실 비문에는 여러 지역에서 은과 금, 곡물과 가축이 공납의 형태로 왕에게 바쳐졌다는 기록들이 여러차례 등장한다.


아시리아의 정복왕 티글랏-필레세르 1세(Tiglath-Pileser I, 재위 BC 1114–1076)의 비문(Octagonal Prism)에는, “나는 여러 땅으로부터 공납을 받았다. 은과 금, 말과 가축, 그리고 곡물이 내 앞에 바쳐졌다.”라는 문장이 새겨져 있다.


티글랏-필레세르 1세의 비문(Octagonal Prism)


한편, 왕정 아래에서는 필연적으로 왕권을 과시하는 화려한 궁전이 건축된다.

더불어 이웃 국가와의 경쟁에서 앞서기 위해 성벽, 운하, 관개시설, 성전 등 큰 규모의 도시 인프라 정비사업이 대대적으로 행해진다.


이러한 역사(役事)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왕의 명령에 따라 백성들을 강제로 공공사업에 동원하는 부역 제도가 점차 제도화 되었다.


우르 제3왕조 시기의 행정 문서들에는 국가와 성전이 노동 인력을 집단 단위로 조직하여 특정 작업에 배치한 기록들이 등장한다.


한 토판에는 운하 건설 작업에 배치된 노동자들의 수가 기록되어 있고, 또 다른 문서에는 난나(Nanna) 신전의 농지에서 일하는 쟁기꾼과 관개 노동자들의 명단이 남아 있다.


“운하 작업에 노동자 30명이 배치되었다.

감독자: 루갈-엔가르(Lugal-engar).”


“난나 신전 농지에 배치된 인력:

쟁기꾼 40명,

관개 노동자 12명.”


많은 문서들은 노동력이 단순히 자발적으로 조직된 것이 아니라 행정적으로 관리되고 배치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상비군, 조세 및 부역과 같은 여러 제도들은 왕권 질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장치였고, 인력과 생산물이 권력의 중심에 의해 조직적으로 통제되는 체계가 형성되어 갔다.


채무의 발생


왕정 아래 도시 중심의 엘리트 계층은 신분을 배경으로 자원을 보다 수월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반대로 생산을 담당하던 농민과 목축민들은 신분제와 별개로 새로운 형태의 관계 속에 편입되기 시작했다.


그 관계를 매개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 가운데 하나가 다름아닌 ‘채무’였다.


고대 근동의 농업은 기본적으로 자연 조건에 크게 의존하는 구조였다.

강수량이나 수로의 상태에 따라 수확량이 크게 달라졌고, 한 번의 흉년은 곧바로 생존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었다. 목축민 역시 가뭄이 들거나 전염병이 돌면 매한가지였다.

군역이나 부역에 동원되는 경우와 같이 농사 자체를 지을 수 없게 되는 경우도 빈번했다.


예측이 어려운 환경에서 농민과 목축민*은 가족이 먹을 식량과 다음 해의 파종을 위한 종자를 확보해야 했다. 여기에 조세와 제의에 대한 부담이 추가되었다.

※ 도시에 소속되지 않은 유목민과 달리 경계에서 살면서 농사를 짓다가 일정 기간은 도시 경계 바깥 들에서 유목을 치는 반(semi)유목민을 의미한다. 이들은 곡물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자원으로 여겨지는 가축(양털, 가죽 등 부산물 포함)까지 세금으로 납부해야 했다.


수확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해가 반복될 경우 농민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많지 않았다. 그들은 식량이나 종자를 구입하고 세금을 내기 위해 곡물이나 가축, 은을 빌려야 했다.


우르 제3왕조에서 기록된 곡물 대출 토판(BC 2100)


이들이 받은 대출은 마을이나 부족 내 구성원 간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있었지만, 많은 경우 성전이나 도시의 상인 엘리트가 제공하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먼저 성전은 ‘신의 이름으로’ 곡물이나 가축, 은을 빌려주었다.

신(God)을 채권자로 내세운 대출은 빌리는 자에게 상환에 대한 강력한 압박을 가했다.


우르 제3왕조 시기에 작성된 토판 중 태양신 샤마쉬(Šamaš/Utu)나 달신 난나(Nanna 또는 Sîn)가 채권자로 기록된 약 490여 개의 성전 대출 토판이 발견되었다.


“루-닌우르타(Lu-Ninurta)는 난나의 집(é-dNanna)으로부터 보리 1 gur*을 수령하였다. 수확기에 그는 원금과 이자를 함께 상환할 것이다.”

※ gur는 약 300실라(sila, 오늘날 리터L와 거의 동일)에 해당하는 곡물 단위로, 한 가족의 수개월치 식량이나 다음해 농사를 위한 종자의 규모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일리-이팔삼(Ili-ippalsam)이 난나(Nanna) 신과 신-이슈메안니(Sin-ismeanni)*로부터 은 5세켈을 빌림"


“일슈-이브니(Ilšu-ibni)는 샤마쉬-이딘(Šamaš-iddin)*으로부터 은 5 shekel을 수령하였다. 니산(Nisannu) 월에 그는 이 은을 이자와 함께 상환할 것이다.

증인: … 서기관: …””

※ 이들은 샤마쉬(우투) 성전이나 난나(신) 성전 소속으로, 신의 재산을 관리하며 농민들에게 대출을 집행하던 하급 제사장으로 추정된다


우르 제3왕조 시기 움마(Umma)와 라가시(Lagash)의 토판 장부는, 성전 소유 땅을 경작하는 농민들이 할당된 수확량을 채우지 못한 '라아(la2-ia3)', 즉 미납분을 정교하게 계산하여 관리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성전의 제사장들은 농민에게 곡물을 대출해주면서 이자 및 상환시기, 미상환 기록을 꼼꼼히 기록하였다.


상인 계층은 성전과 농민 사이에서 훨씬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곡식과 은을 빌려주는 사업을 수행했다.


토판 기록에 따르면, 기원전 2100년경 움마(Umma)의 상인, 담가르(dam-gàr)' 계급은 ‘1세겔당 보리 300실라(Sila)’라는 고정 환율로 농민들과 거래했다.



이들은 농민들에게 통상 1구루(gru=300실라) 단위로 보리를 빌려주었고, 빌린 자가 흉작으로 보리를 갚지 못한 경우 은으로 갚도록 했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당시의 토판 기록(장부) 중에 루갈-니글라가레(Lugal-niĝlagare)와 같은 특정 상인 이름이 자주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들은 가족 단위로 사업을 운영하며 대출 뿐만 아니라 농민이 보리로 낸 세금을 은으로 환전하여 정부에 전달하는 ‘금융 중개인’ 역할도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대출 이자율


고대근동에는 이미 제사장과 상인이 곡식과 가축, 은을 빌려줄 때 받는 이자의 상한에 대하여 제한을 두고 있었다.


기원전 1770년경 편찬된 수메르의 도시국가 에슈눈나에서 편찬된 법전(Laws of Eshnunna)은, 보리 대출의 경우 원금의 1/3(연이율 33.3%), 은 대출의 경우 원금의 1/5(연이율 20%)로 정했다.

에슈눈나 법전보다 50년 늦게 편찬된 함무라비 법전 역시 은과 곡물 대출에 대하여 동일한 이자규정을 두었다.


에슈눈나 법전이 기록된 토판


다만, 은과 달리 곡물에 대해서는 기후에 따른 상환 위험(Risk Premium)을 고려하여 보다 높은 이자를 인정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엘리트 계급의 결탁


왕정의 등장으로 권력의 중앙집중은 가속화되었지만 행정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대표적인 분야가 바로 조세였다.


조세 행정의 공백은, 상인이 왕실로부터 세금징수권을 위탁받는 방식으로 해결되었다.


위에서 본 ‘루갈-니글라가레’ 사례와 같이, 국가로부터 징세도급권을 받은 상인들은 농민들에게 곡물(보리)이나 가축 등으로 세금을 거두고 왕실에는 징수권의 대가로 은을 지급하였다.

왕실은 군사비용이나 사치품 구매에 필요한 은을 선호한 반면, 은 거래 시장은 상인들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구조였다.


조세징수를 사업으로 영위한 상인들은 여러 방법을 동원하여 이득을 쥐어짜냈다.

공물인 보리, 가축, 양털, 가죽 등이 중앙으로 운송되는 과정에서 비용과 훼손의 위험이 발생하였다.

왕은 그 비용과 위험을 상인에게 떠넘겼고, 상인은 이를 빌미로 납세자인 농민들에게 원래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걷으며 중간 이득을 취했다.


상인들은 단순히 징세업무만 대행한 것이 아니었다.

농민들이 흉년이나 전염병으로 곡물이나 가축이 부족해 세금을 못 내면 대신 세금을 내주고 이를 대출로 전환하였다.


이때 상인들은 선이자를 떼거나, 빌려줄 때는 흉년기의 비싼 가격으로 계산하고, 농민들이 갚을 때는 수확기의 싼 가격으로 계산하는 편법으로 법정 이자율 보다 훨씬 높은 이자를 받았다.


‘약자를 돌보는’ 신의 위상을 유지해야 했던 성전 제사장들은 농민 대출에 관하여 나름 공적 역할을 수행하려고 했다. 흉년이나 전쟁 등이 닥쳤을 때, 상인들과 달리 농민들에게 무이자로 대출을 해주거나 채무를 탕감해 주곤 했다.


대지와 농경의 신인 우라슈(Uraš) 신전 토판에는, 흉년기에 농민들에게 보리를 빌려주며 "이자는 받지 않으나, 수확 후에 반드시 성전 창고로 원금을 가져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성전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유력한 상인가문들과 결탁하여 채무에 빠진 농민들의 노동력을 값싸게 확보하기도 하였다.


제사장들은 도량형의 기준을 정하는 권한을 갖고 있었다.

그 권한을 악용해 농민들에게 빌려줄 때는 부피가 작은 ‘성전의 실라(Sila)’ 단위를 적용하고, 상환받을 때는 ‘큰 실라’ 단위를 적용하는 방법으로 실질 이자율을 높였다.


기원전 1,000년경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도서관에서 발견된 토판(샤마쉬 찬가, Shamash/ŠamašS Hymn)에는 제사장과 상인의 도량형 조작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부정한 저울을 사용하는 자, 가짜 무게추를 쓰는 자, 빌려줄 때는 작은 실라(Sila)로 주고 갚을 때는 큰 실라로 받는 자는 샤마쉬의 눈을 피할 수 없다. 그의 재산은 흩어질 것이며 그의 후손은 끊길 것이다."


더 나아가 농민들에게 법이 허용한 이상의 높은 이자를 받은 것과는 달리 전문 상인(Dam-gar) 가문에게는 저리로 곡물 등을 빌려주었다.

물론 상인들은 값싼 이자로 빌린 곡물 등을 농민들에게 다시 대출할 때는 높은 이자를 받았다.


농민들이 고리의 빚을 갚지 못하면, 제사장들은 상인들로부터 대출채권을 양도받아 농민들을 '채무인질'로 삼았다.

그러고는 성전 소유의 대규모 운하 공사나 건축현장에 투입시키거나 성전에 종속된 소작농(Sharecroppers)으로 삼았다.


일종의 금융 피라미드 구조였던 것이다.


계급구조가 낳은 채무의 굴레


돈을 빌린 농민이나 목축민이 흉년이나 고리의 이자를 감당하지 못하여 채무를 갚지 못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이 경우 채무자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를 담보로 제공하거나 그래도 채무를 못 갚으면 그 땅을 아예 채권자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고 바빌로니아 시기 발견된 토판에는 다수의 토지 담보계약 기록들이 발견된다.


“PN의 밭은 은 채무의 담보로 제공된다.

만일 채무가 상환되지 않을 경우 그 밭은 채권자의 소유가 된다.”


같은 시기 시파르(Sippar)에서 기록된 문서에는 이자 대신 채권자가 농민의 땅을 직접 경작하여 수확물을 가져가는 계약도 눈에 띈다.


"채무자 OO는 채권자 XX로부터 은 10세켈을 빌렸다. 그 이자 대신, OO는 자신의 보리밭 3GANA(약 3,300평)를 XX에게 넘긴다. XX는 해당 지력을 이용해 보리를 수확하며, 이를 통해 이자를 갈음한다."


채권자에게 토지를 넘겨주었음에도 또 다시 채무를 지고 못 갚는 일이 반복되면, 채무자인 농민이나 목축민은 결국 채권자의 집에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채무노예로 전락했다.


기원전 14세기 오늘날 이라크 북부에 위치했던 도시, 누지(Nuzi)*에서 발견된 문서들 가운데는 채무 때문에 채무자의 가족 구성원이 채권자의 집에서 노동을 제공하게 되는 상황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테힙틸라(Tehiptilla)에게 진 빚 때문에 채무자의 아들이 채권자의 집에서 봉사할 것이다.”

※ 기원전 15~14세기경 미탄니(Mitanni) 제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후리인(Hurrians)들의 주요 도시


흥미로운 점은, 당시 누지에서 조상의 토지를 타인에게 파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상인들은 이 법을 회피하기 위해 채무자인 농민의 양자가 되어 담보물인 토지를 상속받는 방식으로 토지를 넘겨받았다.

위 인용문에 등장하는 누지의 유명 상인 ‘테힙틸라’는 수백 명에 이르는 농민들의 양자가 되어 막대한 토지를 모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18~15세기 것으로 추정되는 시리아 북부 알라라흐(Alalakh)의 점토판에는 '에헤엘슈(ehelshu)'라 불리는 채무 노예 계급이 등장한다.

이들은 대출금과 이자를 갚지 못해 채권자 가문에 귀속된 자들로, 기록에는 이들이 탈출하지 못하도록 감시되거나 다른 채권자에게 양도되는 명단이 상세히 적혀 있다.


무엇보다 기원전 18세기경 유프라테스 강 중류의 마리(Mari) 왕국 토판에는, 하네안(Haneans)이라는 반유목민 집단이 정착 농경에 참여하며 겪은 경제적 고충이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가뭄으로 인해 보리 대출을 갚지 못한 반유목민 가장은 채권자에게 읍소한다.


"내 아이들을 데려가기 전에 제발 기한을 연장해달라"


읍소가 통하지 않자 왕에게 탄원을 한다.


"왕이시여, 가뭄으로 제 밭은 말라붙었고 보리는 한 톨도 거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상인은 제 집 문앞에 와서 이자를 내놓으라며 소리를 지르고, 급기야 제 아들과 딸을 인질(채무 노예)로 데려가려 합니다.

제발 자비를 베풀어 기한을 연장해 주소서."


왕국의 법들은 채무를 갚지 못한 자가 채권자의 집에서 노예로 일해야 한다는 조항을 통해 이러한 관행을 승인하였다.

다만 함무라비 법전은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기간을 제한하였지만 채무 노예 제도를 수용하였다.


“만일 어떤 사람이 빚을 지고 갚을 수 없을 경우, 그는 자신의 아내나 아들 또는 딸을 채권자에게 넘겨 노동하게 할 수 있다. 그들은 3년 동안 봉사하고, 4년째에 자유롭게 된다.(제117조)”


채무면제 칙령 – 고대 근동 왕들의 반복된 조치


채무를 고리로 생산 계층이 수탈되는 구조가 장기간 지속될 경우 그 결과는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긴장과 위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고대근동의 왕들은 농민과 목축민이 땅을 잃고 노예가 되는 상황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를 완화하기 위하여 채무를 면제하고 종속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칙령을 때마다 선포하였다.


가장 오래된 사례 가운데 하나는 기원전 24세기 수메르 도시국가 라가시(Lagash)의 왕 엔메테나(Enmetena)의 개혁이다.

지배층의 경제적 특권을 제한하고, 백성에게 가해지던 부담을 줄이고자 했던 그의 개혁이 진흙으로 된 원뿔(Foundation Cone)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라가시의 시민들에게 자유(ama-gi)를 회복시켰다.”


아마르기(ama-gi)는 문자 그대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감”을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채무로 인해 종속된 상태에서 벗어나 원래의 자유로운 신분으로 돌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인류 역사상 가장 이른 시기의 ‘자유’ 개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


채무면제 칙령은 이후 반복된다.


기원전 19세기 이신(Isin) 왕조의 왕 리핏-이쉬타르(Lipit-Ishtar)는 즉위 후 채무면제 칙령을 발표했다.


“나는 나라에 정의를 세웠고,

아버지의 집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을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함무라비로 대표되는 고 바빌로니아 시기에는 왕이 즉위할 때 미샤룸(mīšarum, 균형 또는 정의를 의미) 또는 안두라룸(andurārum, 수메르어 아마르기에서 유래된 아카드어)이라 불리는 선언이 관례적으로 이루어졌다.

채무를 면제하고 채무로 인해 종속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조치였다.


채무면제 칙령(미샤룸)이 기록된 토판


바빌로니아 왕 아미사두카(Ammi-ṣaduqa)가 발표한 칙령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나는 나라에 안두라룸을 선포하였다.

빚 때문에 팔려간 자들을 그들의 집으로 돌려보냈다.”


“상인이 농민에게 강제로 지운 부정직한 채무를 무효로 한다”


눈여겨볼 점은, 칙령이 모든 채무 관계를 무조건적으로 무효화하는 조치는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주된 대상은 농민과 소규모 생산자들이 부담하고 있던 개인 채무였다.

상인간 거래나 장거리 교역과 관련된 채무는 대부분 제외되었다.


채무면제 칙령의 실질적 목적


왕들은 칙령을 선포하면서 공동체의 균형과 정의 회복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밑바탕에는 왕권 강화라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자유 농민 계층은 공동체의 생산 기반이었을 뿐 아니라 전쟁 시 병력의 핵심이었다. 이들이 채무로 인해 무너질 경우, 왕권 역시 직접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앞서 마리(Mari) 왕국의 반유목민으로 소개된 하네안(Haneans) 집단은 사실 출중한 전투 능력으로 이름난 왕의 정예 부대였다.


하네안과 같은 반유목민을 묘사한 아시리아 부조


왕국의 주된 군사력이 채무로 인해 상인에게 종속되는 일이 잦아지자, 마리의 왕 짐리-짐(Zimri-Lim, 재위 BC 1775~1761)은 하네안이 상인에게 빚을 지지 않도록 하는 여러 방안을 강구했다.


안두라룸 선포와 함께 ’테빔툼’(Tēbibtum)이라 불린 대대적인 인구조사와 토지정화를 실시하고, 상인이 아닌 부족지도자(슈가굼Sugagum)를 통해 직접 징세하였다.


엔메테나의 뒤를 이어 라가시의 왕이 된 우르카기나(Urukagina, BC 2350경)는 제사장 계급을 정조준 하여 아마기(ama-gi)를 선포하는 개혁을 실행했다.

제사장 계급이 농민들의 땅을 빼앗고 성전 전속 노예로 거느리자, 왕실 재정과 군사력에 큰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그는 먼저 성전이 가진 재산을 몰수하고 왕실 아래에 두었다. 이어 제사장들이 제사 등 각종 명목으로 농민들에게 징수하던 비용을 대폭 줄이고 농민들이 성전에 빚진 채무를 탕감하였다.


"성전의 소와 밭은 이제 신(닝기르수)의 것이다"


"고아와 과부가 더 이상 강자의 먹잇감이 되지 않게 하겠다"


그럼에도 제사장 계급이 왕권에 저항하는 일이 지속되자, 이후 등장한 바빌론 제국의 함무라비는 보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대응하였다.

미샤룸 선포와 함께 제사장을 아예 관료화하고 이자제한법을 통해 성전의 대출을 왕의 통제 아래에 두었다.


채무면제 칙령의 한계


왕이 선포한 칙령은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미샤룸이나 안두라룸은 사회적 약자에 불리한 계층 구조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아니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왕권 강화였다.


분명 농민이나 목축민이 진 채무는 일시에 탕감되었고, 채권자의 집에서 종속 노동을 하던 채무자 중 일부는 자기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채무면제는 부채의 결과만을 제거하는 단기 처방이었을 뿐, 농민이 다시 빚을 질 수밖에 없는 구조를 바꾸지는 못했다.

흉년과 전쟁, 조세와 부역은 여전히 반복되었고, 포고령이 끝나면 농민은 다시 상인에게 곡물과 은을 빌려야 했다. 제사장과 상인 계급의 불공정한 대출 관행은 반복되었다.


오히려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채무면제는 거래 질서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상인들은 채무면제 칙령이 선포될 상황에 대비해 대출을 기피하거나, 채무면제 선언과 이제제한법을 피하기 위한 새로운 계약 방식을 만들어냈다.


대표적인 방식 가운데 하나는 대출을 매매로 위장하여 채무면제 선언을 빠져나가는 것이었다(Antichretic Sales). 겉으로는 토지나 가족을 이미 ‘매도’한 것처럼 계약을 작성하지만, 실제로는 금전을 빌려주는 형태였다.


기원전 18세기 바빌로니아의 한 기록을 보면, 실제로는 돈을 빌려준 것이지만 계약서에는 "은 10세켈을 대가로 밭을 상인에게 팔았으며, 상인은 농민에게 경작을 허락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이 채무면제를 포고해도, '채무'가 아닌 '정당한 매매' 기록이므로 농민은 땅을 되찾을 수 없었다.


이자 제한 역시 다양한 방식으로 회피되었다.


빌려줄 때부터 이자를 원금에 포함(선이자 공제)시키거나, 장부상 금액을 실제보다 부풀려 기록하는 방식이 사용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법정 이자율을 준수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훨씬 높은 부담이 농민에게 전가되었다.


또 다른 방식은 미래의 수확물을 미리 매각(선급금 계약)하는 형태였다.

농민은 당장의 생존을 위해 낮은 가격으로 앞으로 수확할 곡물을 팔아야 했고, 이는 결과적으로 높은 이자를 지급하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법적으로는 ‘대출’이 아닌 ‘거래’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채무면제의 대상에서도 제외되고, 이자 제한도 피해갈 수 있었다.


가장 극단적인 경우, 채무 관계는 가족 관계로 위장되기도 했다.

누지(Nuzi) 지역에서 발견된 문서들에는 부유한 상인이 가난한 농민의 자녀를 ‘양자’로 입양하는 사례가 등장한다. 형식상 가족관계였지만, 실제로는 빚을 못 갚은 농민의 자식을 채무노예로 삼은 것이었다.


양자 계약이 기록된 누지(Nuzi) 토판


바빌로니아의 아미사두카 왕의 미샤룸은 당시 상인이나 제사장 계급이 취한 편법적 계약들이 얼마나 횡행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칙령을 선포하며, 이자를 원금에 포함시키거나 대출을 매매로 위장한 계약을 무효로 하고 처벌한다는 조항을 포함한 것이다.


"만약 상인이 이자를 원금에 포함시키거나(이면 계약), 대출을 매매로 위장했다면 그 계약은 무효이며 상인은 벌금을 내야 한다"


채무면제 칙령이 반복해서 선포되었지만 생산하는 공동체 내부의 균형은 근본적으로 회복되지 못했다.


왕의 제도는 애초에 계급 구조 위에 서 있었기에,

엘리트 계급의 수탈은 그 질서의 일탈이 아닌 전제이자 필연이었다.


다시 농민과 목축민은 채무에 묶였고, 토지와 자원은 엘리트 계층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채무는 단순한 경제 문제가 아니었다.

고대근동의 국가들은 농민 기반이 약화된 상태에서 외부 세력의 침입을 견디지 못하고 차례로 붕괴하였다.

외부의 침입보다 먼저 공동체 내부에서부터 균열이 발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도시국가들을 통일하여 들어선 최초의 제국 아카드(Akad)도, 수메르 르네상스를 이끈 우르 제3왕조도, 함무라비의 (구) 바비론제국도, 이집트 왕조들도 모두 같은 운명을 맞았다.


사무엘의 경고 이후


사무엘이 전한 왕의 제도에 대한 경고는 단지 선언으로만 그쳤을까.


이스라엘이 왕을 세운 이후의 역사를 돌아보면, 그 경고는 추상적인 말에 머무르지 않았다. 왕권 아래에서 이루어진 노역과 조세의 부담, 그리고 토지와 재산을 둘러싼 수탈의 사건들은 성경의 여러 기록 속에 구체적인 장면으로 남아 있다.


솔로몬 시대에 왕국은 성전과 왕궁, 여러 요새 도시를 건설하며 정치적 권력을 강화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는 막대한 노동력이 동원되었다.


“솔로몬 왕이 온 이스라엘 가운데서 역군을 일으키니 그 역군의 수가 삼만 명이라.”
(열왕기상 5:13)


또한 짐을 나르는 자 칠만 명과 산에서 돌을 다듬는 자 팔만 명이 동원되었고, 수천 명의 관리들이 이 노동을 감독했다(열왕기상 5:15–16).


왕궁을 유지하기 위한 조세 체계 역시 조직적으로 운영되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열두 행정 구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이 왕궁의 식량을 공급하도록 했다.


“그 관리들이 왕과 왕궁에 속한 모든 사람의 먹을 것을 공급하되 각기 한 달씩 맡아 공급하였더라.”
(열왕기상 4:27)


이러한 부담은 다음 세대에 폭발하게 된다. 솔로몬이 죽은 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자 북쪽 지파 대표들은 왕에게 이렇게 말한다.


“왕의 아버지가 우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니 이제 왕은 아버지의 엄한 노역과 우리에게 메운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하소서.”
(열왕기상 12:4)



그러나 르호보암은 오히려 더 강한 통치를 선언한다.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로 너희를 징계하리라.”
(열왕기상 12:14)


왕국은 곧 둘로 갈라지게 된다.


왕권 아래에서 나타난 또 다른 모습은 토지의 수탈이었다. 북이스라엘 왕 아합 시대에 일어난 나봇의 포도원 사건은 이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나봇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포도원을 왕에게 넘기기를 거부했지만, 거짓 고발로 죽임을 당했고 그의 땅은 결국 왕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아합이 나봇이 죽었다 함을 듣고 나봇의 포도원을 차지하려고 내려갔더라.”
(열왕기상 21:16)


그러나 토지를 잃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채무를 감당하지 못할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자유마저 잃을 수 있었다.


열왕기하에는 한 과부가 예언자 엘리사에게 도움을 구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빚을 갚지 못하므로 채권자가 와서 내 두 아이를 데려다가 자기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열왕기하 4:1)



이러한 현실은 훗날 바빌론 포로기 이후에도 다시 나타난다.

느헤미야 시대에 백성들은 곡식을 얻기 위해 자신의 토지와 집을 저당 잡혀야 했다고 호소한다.


“우리가 곡식을 얻어먹고 살기 위하여
우리의 밭과 포도원과 집을 저당 잡혔나이다."(느헤미야 5:2–3)


채무는 단순히 토지의 상실로 끝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가족의 신분까지 위협받는 상황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우리 자녀들 중에는 이미 종이 된 자도 있고…
우리의 밭과 포도원이 이미 다른 사람의 것이 되었나이다.”
(느헤미야 5:5)


이처럼 왕정 체제가 낳은 특권적 계급과 노역, 조세 등이 결과적으로 공동체 내 가장 밑단에 위치한 사람들에게 가혹한 ‘채무’의 형태로 지워졌다.

그리고 구약의 많은 기록들은, 채무가 실제로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깊이 압박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토지를 잃는다는 것은 단순히 재산을 잃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갈 경제적 기반과 더불어 자유로운 신분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을 의미했다.


토지와 자유를 잃은 사람들은 점차 공동체의 가장 취약한 계층으로 밀려났고, 어떤 이들은 채무를 피해 삶의 터전을 등지고 떠나야 했다.


이어지는 글은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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