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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o Jun 29. 2023

6.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내 사진은 완성이었다.

한국 | 보정하는 법을 모르는 한 남자의 슬픈 이야기

자,

가족들의 허락도 받았겠다. 여행 경로도 얼추 정했고(응? 언제?), 짐도 틈틈이 싸고 있고, 예방접종도 여행자 보험도 가입이 끝났다.


여행을 하면서 또 필요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도움이 될까?

어떤 것들을 가지고 있으면 조금이라도 혜택을 볼 수 있을까?


그렇게 추가로 준비한 것이 국제학생증 ISIC와 PP카드, 마지막으로 사진 찍는 연습이었다.


국제학생증을 가지고 있으면 다양한 할인 혜택을 볼 수 있었다.

나의 가장 큰 목적은 관광 명소 할인! 국제학생증을 제시함으로써 많은 할인을 받을 수 있으며, 무료로 입장이 가능한 곳도 있었다.

그 외에도 항공권/교통권/숙소를 할인해 준다는 것도 있었지만,

항공권의 경우, 대부분 LCC 저가항공의 비행기를 많이 이용할 예정이었고, 대륙을 건너갈 때나 메이저 항공사를 이용할 계획이었던 나로서는(그마저도 항공스케줄이 안 맞으면 혜택을 받지 못했다.)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할 것이었다.

교통도 현지인들과 최대한 동일한 조건으로, 저렴한 교통수단을 이용할 예정이었기에 유레일패스 등 각종 패스 및 정기권을 구매해서 다니는 것은 나에게는 사치일 뿐이었다.

숙소는 더더욱... 그냥 마냥 싼 호스텔(일이천 원 더 주고 조식이 딸려있으면 더 좋고)을 갈 예정이었기에(경우에 따라선 지붕만 있어도 감사했다.) 나에겐 큰 의미는 없었다.

 

다만, 국제학생증을 발급받기에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애석하게도 나는 학생이 아니었다. 학생이 아닌데 어찌 학생증을 발급받으랴..

하지만! 내가 국제학생증을 발급 못 받았다면, 이렇게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나는 국제학생증을 발급받았다.


우연히 해외 어학원을 다니는 것으로 국제학생증을 발급했다는 블로그를 본 것이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고, 대한민국 사람들은 참 똑똑했다.

어차피 멕시코를 시작으로 중남미 여행을 할 것인데, 중남미는 브라질을 제외하곤 모두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물론 영어도 못하는 내가 스페인어를 알 리 전무했다.

그래서 이왕 오랫동안 스페인어권의 지역을 여행할 거면 기초적인 수준의 스페인어라도 배워보자는 생각에 어학원을 찾아보았다.

그렇게 열심히 구글링을 하다 과테말라 안티구아에 있는 어느 어학원을 알게 되었고, 그곳과 컨텍하여 수업을 등록했다. 게다가 홈스테이까지 함께 구해주는 곳이었기에 숙식도 동시에 해결될 수 있었다!

그렇게 여차저차해서(여차저차 한 이유는 뭔가 은행 송금이나 이런저런 이유로 고생을 좀 했던 기억이 있지만 그 사이 과정이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ㅎ) 어렵게 국제학생증을 발급받았다.


그렇다.


난 이제 학생이다.ㅎ


이제 남은 건 열심히 돌아다니며 열심히 할인받는 일뿐이다. 설렜다. 괜히 더 어려진 거 같다.

카드 발급 하나 받은 걸로 이렇게 들뜰 수 있나 싶었다.


...


나는 두괄식 전개를 좋아한다. 결론을 먼저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이다.

구구절절 어렵게 국제학생증을 발급받은 이야기를 했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저 카드를 한 번도 제대로 써보지 못했다.

(내 설렘 돌려내)


국제학생증의 경우, 유럽에서 특히나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물론 중남미나 다른 대륙에서도 혜택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지만..

나는 여행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유럽 근처엔 얼씬도 못해보고 국제학생증을 잃어버렸다.

콜롬비아에서.. 무소유가 될 때 함께.. 후..


이렇게 짧고도 짧은 국제학생증과 나의 인연은 끝이 났다.


두 번째는 PP카드였다.

(다행히 PP카드는 태극기 여권 커버에 넣어둬서, 무소유 항목에 포함되지 않았다.)

PP카드는 전 세계 공항 라운지를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아주 굉장한 카드다.


덕분에 내가 세계일주를 하면서 호사를 누릴 수 있었던 몇 안 되는 순간 중 하나가 공항 라운지를 이용할 때였다.


PP카드를 발급받는 방법도 몇 가지 있지만, 가장 쉽고 또 내가 사용한 방법이 바로 PP카드 발급 혜택이 있는 신용카드를 만드는 것이었다.

대게 항공마일리지 적립 혜택을 주는 신용카드들 중에 이 같은 혜택이 있는 카드들이 있는데,

나는 당시 신한 The classic 카드를 발급받으면서 PP카드를 받았다. 이 신용카드의 가장 큰 장점은 PP카드 사용에 횟수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연회비는 비쌌지만, 그마저도 프리미어 바우처로 80% 정도 환급이 됐기에 내 입장에서는 거저나 다름없었다.


아쉽게도 해당 카드는 현재 단종되었고, 그 이후에 나오는 카드들은 PP카드 연간 사용 횟수에 제한이 생겨있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이라면 PP카드 하나쯤 가지고 있어도 좋을 듯하다.


여행을 하는데 기록을 빠트릴 수 없다 생각했다.

그리고 사진은 훌륭한 기록물이 되리라는 것도.


그래서 카메라를 구입했다. Sony의 미러리스 모델이었다.

카메라의 '카'자도 모르는 내가 미러리스를 고른 이유는 소거법에 의한 선택이었다.

DSLR은 너무 크고 무거워 부담스러웠다. 명색에 세계여행을 다니며 사진을 찍을 건데 똑딱이는 너무 하찮아 보였다. 좋은 사진을 찍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그래서 미러리스로 정했다.


평생을 사용해 본 카메라라곤 똑딱이와 핸드폰 카메라, 일회용 필름카메라가 전부인 나에게

F값이 무엇이고, ISO가 무엇이며, 셔터스피드가 어떤 것인지 알 리 없었다.

렌즈의 크기와 종류부터, P며 M이며 각종 모드까지.

모든 것이 초면이었다.

(반갑습니다.)


그래서 카메라를 사자마자 사진을 찍으러 돌아다녔다.

근처 재래시장에 가서 상인들과 그들의 삶을 찍고, 근처 수목원에 가서 식물과 풍경을 찍었다.

어둑어둑한 재래시장에서 F값과 ISO, 노출에 대해 이해를 했다.

수목원의 언덕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꼿꼿이 서있는 나무를 통해 셔터스피드에 대해 알게 되었다.

함께 사진을 찍으러 다녔던 친구들을 찍으며 줌과 아웃포커싱을 익혔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카메라 메모리칩에는 렌즈 너머로 보이던 장면이 저장되었고

내 안에는 그 순간의 추억과 냄새와 여운이 저장되었다.


사은품으로 받은 삼각대를 통해 밤하늘 별사진도 찍어보았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다 우연히 찍힌 밤하늘 별사진에는 북두칠성이 있었다.


자주 바라보던 밤하늘이었는데, 그곳에 북두칠성이 있는 줄 몰랐다.

항상 같은 곳에 있던 것들이, 내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사진을 통해서 비로소 거기 있음을 알았다.


렌즈 너머로 보는 세상은 내 눈으로 바라보는 세상과는 조금 달랐다.

분명 같은 세상인데, 나의 작은 손동작 몇 개로 전혀 다른 세상을 볼 수 있었다.

사진 찍는 것이 좋아졌다.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것 같아서.


그렇게 내가 원하는 느낌과 형태의 사진을 어느 정도 찍을 수 있게 되었을 즈음, 나는 한국을 떠났다.


그랬다. 나는 사진을 찍는 데에 초점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했다.

그래서 눈치채지 못했다. 사진은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찍은 사진을 잘 보정 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가 보는 사진의 대부분은 날 것 그대로의 사진이 아니라 보정이 된 사진들임을..


또다시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도 몰랐던 나는 사진 찍는 법만 주야장천 연습했던 것이다.


세계일주를 떠나기 전에도, 여행 중에도, 여행을 다녀와 몇 년이 흐른 지금 이 순간까지도

나는 아직도 사진을 보정하는 법을 모른다. 그 흔한 포토샵 한번 배워보려 하지 않았다.

과거도 그랬고, 현재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지 모른다.


나는 디지털카메라로 수십 장 수백 장의 사진을 찍었다 다시 지울 수 있음에도, 보정하는 법을 몰라 한 장 한 장을 소중하게 찍었다.

마치 찍는 숫자가 정해져 있는 필름카메라처럼.



셔터를 누르는 순간, 내 사진은 완성이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5. 아무튼, 예방접종과 보험은 중요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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