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나마 |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리고 내가 세계일주 여행을 3년이나 할 수 있었던 이유가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람'이 아닐까 싶다.
낯선 장소에 간다는 것은 조금 두렵지만 그 이상으로 설레는 일이다.
한국에 없는 지형과 환경과 문화를 본다는 것은 신기하고 또 신비롭다.
이국의 낯선 향신료를 사용한 음식은 언제나 신선한 도전이다.
이 또한 내가 좋아하는 여행의 일부지만
나에게 감동을 주고, 위로를 주고, 감정을 공유하는 건 사람이다.
(물론 슬픔을 주고, 아픔, 외로움을 주는 것 또한 사람이다.)
멕시코에서 시작했던 중미 여행은 이곳 파나마까지 오면서 어느덧 막바지에 이르렀다.
다음 행선지는 콜롬비아. 드디어 기대하던 남미여행의 시작이다.
지금까지 나의 여행은 대중교통을 활용하여 육로로 국경을 넘어왔다.
당연히 콜롬비아도 그렇게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파나마와 콜롬비아 사이에는 개발되지 않은 정글 우림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안에 게릴라가 있어 몹시 위험하다고 한다.
육로로 콜롬비아에 가겠다는 생각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파나마에서 콜롬비아로 갈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페리를 타고 가는 방법과 비행기를 타는 방법.
전자는 대충 페리라는 이름의 요트로 한 일주일 바다를 즐기며 간다는 건데, 이미 하늘길이 아닌 이상 무조건 게릴라를 마주친다는 이상한 오해가 뇌리에 박혔기에 일주일간의 요트 여행은 낭만 가득한 여행이 아니라 낭패만 가득할 여행이었다.
(사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일주일의 요트여행도 참 좋은 추억이 됐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하여 나는 비행기로 콜롬비아에 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콜롬비아 제2의 도시이자 꽃과 미녀의 도시로 유명한 메데진(Medellin).
(저 땐 몰랐지만, 사실은 메데진은 꽃도 미녀도 아닌 마약 카르텔로 가장 유명하다.)
파나마공항은 내가 갔던 수많은 공항 중 두 번째로 작고 당황스러운 공항이었다.
(첫 번째는 아마존에 갈 때 갔던 루레나바케(Rurrenabaque)의 공항이지만, 이곳에서는 경비행기를 탔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일반 비행기가 다니는 공항으로는 사실상 첫 번째나 다름없다.)
비단 공항이라 하면, 넓은 활주로와 관제탑이 보이는 곳과 삐까뻔쩍하지는 않더라도 국내선과 국제선이 나뉘어져 여러 개의 게이트와 수십여 개의 카운터가 있는 공항을 상상할 수 있지만 이곳 파나마시티의 공항은 그냥 공항에 넓은 홀이 있고, 그곳에 몇 개의 카운터와 몇 개의 게이트가 전부였다.
이 홀에 사람들이 모여 출발할 때가 되면 하나둘 줄을 서서 비행기를 타는 것이다.
(한국의 시외버스터미널도 이것보단 클 것이다.)
체크인을 했다.
비행기 이륙시간이 점점 다가오는데 도무지 승객들을 탑승시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결국 이륙시간을 지났다. 아무래도 딜레이 된 듯하다.
하지만 딜레이 된 이유를 알 수 없다.
머리 위에 물음표가 달려있던 게 보였던 걸까? 근처에 같이 서있던 어떤 남자가 나에게 와서 영어로 말을 걸어왔다.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서 딜레이 됐다고 한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금방 끝날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여전히 미리 숙소를 예약하지 않고 다녔기에, 아주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다.
1시간.. 2시간.. 3시간.. 5시간..
더 이상 멍 때리기도 힘들어질 때 즈음 아까 그 남자가 다시 말을 걸어왔다.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는 Henry는 업무 차 파나마에 왔다 돌아가는 길이라고 한다.
파나마에서 보기 드문 인종(?)의 나에게 꽤나 관심이 많은 듯했다.
(내 친구들은 파나마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특이한 놈이라고 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한국에서 내가 어떤 일을 했는지, 어떤 경로로 여행을 해서 이곳 파나마까지 왔는지, 앞으로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꽤나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차피 비행기 기다리느라 할 일도 없었는데 덕분에 시간 잘 가서 좋다.)
딜레이 된 시간이 7시간째가 되어갈 때 즈음 우리는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한국이었다면 항의하고 난리 났을 것 같은데, 이곳에선 흔한 일인지 승객들이 크게 항의하거나 동요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 나도 얌전히 비행기에 탔다.
아무리 여행 중에 여러 해프닝이 일어날 수 있다지만 7시간 딜레이는 꽤나 치명적이었다.
메데진에 도착하면 밤이 될 것이기에.
극강의 치안을 자랑하는(?) 메데진의 밤거리를 달팽이 마냥 가진 짐 전부를 들고 숙소를 찾아야 함에 걱정이 앞섰다.
그런 나의 표정을 읽은 걸까? Henry가 묻는다.
"kyo, 메데진에 가면 잘 곳 있어?"
"아니, 가서 알아봐야 해."
"kyo, 메데진은 진짜 위험한 곳이야. 밤에 숙소를 구하는 건 위험해."
"그래서 나도 일찍 가서 숙소를 구하고 싶었는데.. 너도 알다시피 우리 비행기가 7시간이나 딜레이 되어버렸잖아. 이건 나도 예상하지 못했어."
밤의 메데진이 그리 안전한 곳은 아닐 것이라 대충 짐작은 했지만.. 현지인이 저렇게까지 이야기할 정도면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인 듯했다.
마음 한편으론 '그래도 괜찮겠지. 어찌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젠 진지하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kyo, 나는 메데진에 우리 장모님 집으로 가. 그곳에 빈방이 몇 개가 있어."
"너만 괜찮다면, 나와 함께 그리로 가지 않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