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yo Jan 05. 2024

22. 녀석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니카라과 | 활화산을 등반하다

내가 Yuto의 악마 같은 유혹에 넘어갔을까요? 안 넘어갔을까요?


엘살바도르는 무서우니 안 간다고 했다가 성당하나 때문에 갔었다.

엘살바도르에서 별 일은 없었지만, 그냥 치안이 좋지 않은 나라라는 인식에 쫄았던 것이 의외로 많은 정신적 에너지의 소모가 있었다.

그래서 온두라스만큼은 진짜로 안 가야겠다고 그렇게 굳게 다짐을 했건만.


유혹에 넘어갔다.

우리의 동행은 온두라스까지 함께 하기로 정해졌다. (Here we go!)


스쿠버다이빙을 (저렴하게) 배우기 위해 우리는 니카라과의 남쪽에 위치한 산후안델수르에서 왔던 길을 돌아 북쪽으로 향하게 되었다. 물론, 바로 온두라스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중간중간에 볼 곳들을 둘러볼 예정이었고, 첫 번째 행선지는 니카라과호에 있는 오메테페(Ometepe) 섬이었다.



그냥 Yuto를 따라갔기에 눈앞에 보이는 저 산이 화산인지도, 우리가 오르게 될 산인지도 이땐 몰랐다.



Yuto... 이놈도 생각보다 나랑 비슷한 놈이었다.

숙소 따위 예약하지 않고 그냥 일단 가고 본다. (그냥 고생이 내 팔자였나 보다.)

리바스를 경유해서 산조지(San Jorge)에서 배를 탔다.

이전에 바나나를 샀던 리바스의 시장에서 Yuto가 사과만 한 크기의 이상한 과일을 두어 개 사 왔다.

이거 진짜 맛있으니 먹어보란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신기한 과일이었기에, 먹는 방법도 몰라 들고만 있으니 나중에 숙소 가서 칼로 잘라서 숟가락으로 퍼먹으면 된단다.

하지만 나에게 나중은 없다. 지금 당장 맛이 궁금한데 언제 아직 정해지지도 않은 숙소에 가서 칼과 숟가락을 빌려 먹겠는가.

드디어 '만약에'와 '혹시라도'를 오백 번쯤 외치며 채워나갔던 짐덩이들 중 하나인 (20만 원이 넘는) 맥가이버칼이 쓰일 때가 왔다. ('4. 이게 나를 살릴거라는걸 이 때는 알지 못했다.' 참조)

배에서 바로 과일을 반으로 잘랐다.

반으로 자른 과일 안에는 많은 씨와 누리끼리(?) 끈적한 액체의 범벅이었다.

비주얼만 봤을 땐 별로 먹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내 코를 자극하는 상콤한 냄새가 본인은 분명 내가 좋아하는 맛일 것이라고 강하게 어필하고 있었다.

이미 International Homeless의 길을 걷고 있는 나에게 체면 따위는 사치였다.

숟가락으로 퍼먹으라던 친절한 설명은 어느새 니카라과호에 던져버렸고, Yuto와 반씩 나눠 가진 이 과일에 그냥 바로 입을 갖다 댔다.


 '아. 상콤하다.(행-복)'


보통이라면 조금 시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레몬도 그냥 까먹을 만큼 신걸 좋아하는 나였기에, 상콤하다는 표현이 적당했다.


Yuto에게 물었다. 이 과일님의 이름은 무엇이냐고.(어느샌가 이상한 과일에서 격상되었다.)


 "마라쿠야(Maracuya)라는 과일이야."


혹시, 이 과일이 뭔지 눈치챘는가?

스페인어로 마라쿠야라고 하는 이 과일님의 다른 이름은 패션후루츠(Passion fruit)다.

그렇다. 나는 패션후르츠를 이때 태어나서 처음 보고 맛봤던 것이다.

요즘은 패션후르츠의 인기가 높아, 한국에서도 쉽게 접하고 먹을 수 있지만 저 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흔히 볼 수 있는 과일이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여행 중에 내 최애 과일이 생겼다.




섬에 도착한 우리는 아니나 다를까 제일 먼저 숙소를 찾아 헤맸다.

인원이 두 명이니 좋은 점이 있었다. 나눠서 숙소 발품을 찾기 좋다는 점.

금방 적당한 숙소를 찾아 체크인을 하려 하는데, 직원이 묻는다.


 "침대랑 해먹에서 잘 수 있는데, 뭘로 할래?"

 "뭐가 달라?"

 "응. 침대는 방에 있고, 해먹은 밖에 있어. 그리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해먹이 더 싸지."


고민했다.

어차피 물가가 저렴한 니카라과였기에, 저렴하다는 말에 혹한 것이 아니라 해먹에서 하룻밤 잠을 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궁금했다. 해먹에서 자는 하룻밤은 어떨지.

의외로 아늑하고 감성적 일지, 아니면 허리가 아작 나 내일 걷는 것조차 힘들어질지.

하지만 똘기와 패기로 똘똘 뭉쳐진 우리였기에, 그리고 아직도 우리의 허리는 짱짱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호기롭게 해먹을 선택했다.


밖이라곤 했지만, 천정이 있는 공간에 해먹이 설치되어 있어서 비에 맞는다거나 할 일은 없었다.

여러 개의 해먹 중 원하는 곳을 선택하면 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개인 짐은 각자에게 배정된 커다란 사물함에 보관하면 되었다.(물론 샤워장/화장실은 공용)



우리의 밤은 스핑크스(?)가 지켜주었다.



오후쯤 섬에 도착해 체크인을 했기에, 첫날은 그냥 동네를 구경하고 좀 쉬다가 일찍 잠들기로 했다.

다음날 등산을 하기 위해 일찍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컨디션을 조절하기 위해서.

(컨디션을 조절할 거면 해먹에서 자지 말라고)


해먹에서의 하룻밤은,

스핑크스(?)가 우리와 함께 해주었기에 든든했다.

다행스럽게도 한낱 천 쪼가리는 우리의 허리를 아작내진 못했다.

추운 곳이 아니기에, 추위나 더위로 고생하지도 않았다.

다만, 이 스핑크스. 모기는 못 막나 보다.

모기들한테 쪽쪽 빨려 다리가 너덜너덜했다.

든든하게 먹고 등산을 해야 하는데, 모기들 배만 든든하게 채워주고(자선사업) 이른 아침 우리는 등산을 위해 길을 나섰다.



"콘셉시온 화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


나는 2주간 스페인어를 배운 남자다. 아니, 스페인어를 안 배워도 대충 눈치만 있으면 눈치챌 수 있다.

Volcan = Volcano = 화산 아니겠느냐.


 "야.. 혹시 우리 화산 오르냐?"

Yuto에게 물었다.


 "어. 혹시 내가 이야기 안 했나? 하하 미안미안~ 아, 참고로 여기 활화산이래."


...?.. 하.. 이ㅅㄲ... 한대 칠까...?


위에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나는 냉장고바지에 티셔츠+팔토시가 전부였다.

(그 와중에 어제 먹은 패션후르츠가 너무 맛있어서 또 샀다.)

다시 보니 이ㅅㄲ는 등산화에 바지, 바람막이까지 준비가 철저했다.


활화산이라곤 하지만 다행히 오랫동안 분화한 적은 없다고 한다.

하지만 화산은 화산. 완만하고 수풀이 우거진 정글스러웠던 초입과 달리 산을 오를수록 경사는 점점 가팔라졌다.

길은 점점 화산석으로 덮여있어, 식물이 자라지 않는다. 즉, 미끄러운 길이란 말이다.

설상가상으로 구름인지 안개인지 알 수 없는 자욱한 수증기 덩어리가 우리의 시야를 방해하고 있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한발짝 잘못 내딛는 순간 끝이란걸.



죽는 줄 알았다.

진짜로.

힘들어서 죽을 뻔했고, 무서워서 죽을 뻔했다.



그래서. 놓아버렸다. 정신줄을.



죽음의 화산석 코스를 지나 이끼의 영역에 들어왔다. 이끼의 영역은 화산석 코스와는 또 다른 미끄러움이 있다.

정상이 그리 멀지 않음을 느꼈지만, 패션용이라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워커를 신고 있던 나는 더 이상 나아가는 것이 불가능하단 걸 직감했다. (나중에 찾아보니 해발 1,610m의 화산이었다.)


 "Yuto, 난 틀린 거 같아. 너라도 가서 정상 보고와."

말해놓고 보니 약간 유언 같다.


 "그래? 알겠어. 그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갔다 올게."

 "어 그래. 어쩔 수 없지. 내려가ㅈ... 뭐? 혼자 간다고?"


사실 '아니야. 이 정도면 됐어. 그냥 내려가자.'라고 할 줄 알았다.

아니었구나..


Yuto는 그렇게 지(?) 혼자 정상을 향해 갔고, 나는 이끼와 안개에 둘러싸인 채로 쓸쓸히 (무서워) 죽어가고 있었다.


40분 정도 지났으려나? Yuto가 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내려왔다.


 "좋더나?"

 "응. 좋더라."

하.. 어찌 이리 얄미울까?


 "그래.. 이제 내려가자.."



연중 구름에 덮여있는 것일까? 바닥은 젖어있고, 이끼가 많이 껴있다.
보이는가? 지 혼자 살려고 단디 차려입고 온 저 복장을... 나쁜 놈..



올라가는 길만큼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위험하긴 마찬가지였다.

한 발자국만 잘 못 딛어도 그대로 한없이 굴러갈 것 같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등산했는진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기억에 남는 것은 산에서 내려오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는 것과,

내 신발이 아작이나 밑창이 덜렁덜렁거렸다는 것.

화산을 등반하고 나서 깨달은 점은 산을 오를 땐 반드시 준비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는 것과,



녀석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21. 그 녀석은 악마처럼 속삭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