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은 ‘라떼는 말이야’라는 말을 싫어한다지만
내가 살아온 시간이 그렇다 보니
그 말 말고는 과거를 꺼낼 다른 표현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엄마 땐 말이야.
우리 땐 말이야.
이 말 말고서야
과거 회상을 시작할 단어가 무엇이 있단 말인가.
나 때는 진짜,
대화 상대라고는 옆집에 사는 친구나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 전부였다.
각자 고유의 목소리로 나누던 대화들.
아니면 라디오나 TV 소리.
좀 더 인위적이긴 했지만
기계음은 또 아니어서
라디오 속 아나운서도 사람,
TV 성우도 사람.
어쨌든 휴먼 그 자체였다.
그래서 대화 상대 없이 무슨 일을 할 때면
콧노래가 최고였다.
밥을 할 때도 콧노래,
빨래를 할 때도 콧노래,
청소를 할 때도 콧노래.
기껏해야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밥을 할 때도 나긋한 여성의 목소리가 들린다.
“취사를 시작합니다…” (전기압력밥솥)
요리할 때도 나긋한 여성의 목소리.
“냄비를 정위치에 올려주세요…” (인덕션)
청소할 때도 나긋한 여성의 목소리.
“청소를 시작하겠습니다!” (로봇청소기)
집안의 모든 가전제품에
여성의 목소리가 탑재되어
집안 가득 울려 퍼진다.
이쯤 되면
나중엔 술이 떡이 되어 들어오는 신랑을
야단치는 로봇도 하나쯤 생겼으면 좋겠다.
나 대신 잔소리해 주는 로봇.
“오늘만 살 거니?
몸 관리 안 하니?
용종 두 개나 뗀 게 언제인데 또 술이야?
블라블라블라…”
남자 버전도 있으면 더 좋겠다.
“새꺄~ 애지간히 처먹어야지!
형한테 뒤지고 싶냐?
재수 씨랑 애들 생각 안 해??
용종 두 개나 뗐다면서!!
이거 이십 개쯤 떼고 똥꼬 헐어서
못 걸어봐야 정신 차리지!! 어!!”
카카카카카.
상상만 해도 즐겁다.ㅋㅋㅋ
어쩔 땐
집안일을 덜어주는 고마운 존재였다가
어쩔 땐 나를 놀리는 기계로 바뀌는
개구쟁이 같은 느낌도 든다.
가령,
타이머 맞춘 시간에 청소를 시작하는
로봇청소기 같은 경우.
분명 내가 안방 청소를 안 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고
퇴근한 신랑에게 로봇의 잘못을 알려주니
아니라며!!
신랑 핸드폰에는
‘안방 청소 완료’라고 떴다며
로봇 말이 맞다는데…
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산소를 마시고,
같이 한솥밥을 먹는
자기 와이프 말은 안 믿고…
전기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로봇녀의 데이터를 믿는 신랑을 보며
소름이 쫙.
그래, 저 양반은
저번에도 내비게이션녀의
나긋한 말은 철석같이 믿고
“이 길은 아닌 것 같은데…”라는
내 말은 무시했던 양반이지.
흠… 배신자 같으니라고.
그리고 요즘
식세기(욕 아님!! 식기세척기) 이모님이
자꾸 나를 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좀 많이 상한다.
내가 식세기 이모님 앞에 가면
자꾸 전원이 켜지는 건…
(내 뱃살로 인해… 슬프다…)
왜 하필 뱃살에 반응을 보이시는 건지.
아니~~~
집안일 도와주시는 건 감사한데
왜 자꾸 그러시는지… 원…
좋다가도 기분 나쁜 건
나 또한 로봇들의 농간에
놀아난 건가 싶어서다.
그래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고,
인간의 삶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는 건
사실이니.
내 뱃살의 굴욕쯤이야
참고 살 수 있다!!!
고맙소~~
전기로 먹고사는 친구들이여~~
우리 건강하게 오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