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전상서 3

불충한(그러나 합리적인) 아들 올림

by Oscar Jung

아버지, 저는 또다시 떠납니다. 참 자주도 떠나네요. 제가 무슨 여행 전문 크리에이터도 아니고, 대한민국 고등학생이 이렇게 전국 팔도를 유랑하는 게 정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기어이 제가 우려하던 일이 터지고야 말았군요. 제가 그렇게나 신신당부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제 기타만큼은 건드리지 마시라고요.


동네 입구에서 만난 옆집 종식이가 아주 생생하게 다 증언해 주더군요. 며칠 전 온 동네에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을 해서, 종식이가 냄새를 쫓아 우리 집 담장 너머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마당을 훔쳐봤답니다. 아버지랑 동네 친구분들이 마당에 드럼통 갖다 놓고 불 피워서 고기 파티를 벌이셨더군요. 종식이는 고기 한 점이라도 얻어먹을까 싶어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지켜보고 있었는데, 나이 지긋하신 어른들이 그 애처로운 종식이 눈빛 하나 외면하고 자기들 입에 넣기 바쁘셨다면서요? 아니, 애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그 고기 몇 점을 안 주십니까? 참... 아버지나 동네 아저씨들이나, 어른들이 참 쪼잔들 하십니다.


그러다 취기가 좀 오르셨을 때, 사달이 났더군요. 앞집 상철이 아버지가 "우리 상철이는 전교 1등에, 주말에는 부모 일도 많이 돕는 효자다"라며 주절주절 아들 자랑을 늘어놓으셨다면서요. 그때 아버지가 "상철이는 기타 안 치냐?"라고 물으니, 상철이 아버지가 "학생이 그딴 걸 왜 치냐, 그런 거 만지는 놈들은 다 날라리 딴따라나 된다"며 비하 발언을 하셨고요. (아무래도 이번에 개학하면 상철이 이 자식을 제가 다시는 1등 못 하게 참 교육을 좀 시켜야겠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욱하신 아버지는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방에 들어가셔서는, 제 소중한 기타를 들고 나와 그대로 활활 타오르는 드럼통 안에 처박으셨다고요? 그게... 사실입니까? 돼지 통구이도 아니고, 제 기타를 장작 삼아 직화구이를 해 드셨단 말씀입니까? 그 녀석이 무슨 죄가 있다고, 또 그 녀석이 타면 화력이 얼마나 좋다고, 그 어리고 약한 것을 태워 고기를 구우셨습니까?

그것도 모자라, 불길 속에서 기타 줄이 ‘팅~ 딩~’ 하고 비명처럼 끊어지는 소리에 맞춰 다 같이 **"건배!"**를 외치셨다면서요? 옆집 종식이가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다 말해줬습니다. 이건 정말... ‘천인공노(天人共怒)’ 할 일입니다.


그렇게 상철이 같은 아들이 부러우시면 그런 아들네 집에 가서 사시지, 왜 저하고 사십니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맞지요. 아버지와 저는 이번 생엔 인연이 아닌 듯합니다. 엄마는 다른 아들을 입양할 생각이 전혀 없으신 것 같으니, 차라리 아버지가 새장가를 가셔서 공부 잘하고, 부모님 말씀 잘 듣고, 삑 하면 가출 안 하는... 그런 아들 하나 잘~ 낳아서 행복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청주댁’ 이야기 말입니다. 원래는 엄마한테까지 얘기 안 하려 했는데, 사태가 이 지경이니 엄마에게 따로 편지를 써서 자초지종을 말씀드려야겠네요. 아시죠? 저번 달 작부집 사건... 저는 아버지의 그 독특한 이성 취향을 존중합니다만, 엄마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이실지는... 헤헤헤.


또한, 저는 아버지를 군산경찰서에 정식으로 고소할 생각도 있습니다. 종식이가 목격자로서 법정 증언도 서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범행 일시, 장소, 당시 현장에 있었던 공범(동네 아저씨들)까지 정확히 기록해 두었습니다. 그분들도 특수손괴 공모 및 방조죄로 싹 다 고소할 생각입니다.

형법상 재산 손괴죄에 의하면, 제아무리 친족 간이라도 타인의 재물에 손괴를 입히면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합니다. 저, 법대 다니는 선배님께 밥 사주며 법률 자문까지 다 구하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림 참 좋네요. 아들이 아버지를 고소하여 법정에 세우는 그 그림 말입니다. 아버지 회사며, 동네 사람들, 외갓집, 친인척들이 알게 되시면... 어휴, 저는 아버지가 참 걱정입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버지가 경찰 조사받고 포승줄 묶여 재판 넘어갈 즈음엔 저는 기숙사에 들어가 있을 테니까요. 하늘에 계신 할머니가 이 꼴을 보시면 참 흐뭇(?)해하시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그래도 저를 여태 키워주신 정이 있고... 또 여자들은 모르는 남자들만의 끈끈한 '의리'가 있지 않겠습니까? 아버지가 이 절체절명의 난관을 빠져나가실 유일한 퇴로를 하나 열어드리겠습니다.

엊그제 터미널 대합실 TV에서 음악방송을 보니, 미국제 깁슨(Gibson) 기타가 그리 멋져 보일 수가 없더군요. 뭐, 이전에 태워 드신 야마하보다는 값이 '조금' 더 나가기는 할 겁니다. 정확한 모델명은 [깁슨 J-45 Standard], 색상은 시크한 블랙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거 하나 사놓으시고 제 전화를 기다리십시오.

저의 새 기타가 제 방에서 번듯하게 저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리고 그 자태가 영롱하다면, 우리 집안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을 약속드립니다. 법조계 명언 중에 "최고의 판결은 원만한 합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현명하고 이성적인 선택, 기대해 봅니다.


저번에는 서울과 수도권, 강원도, 그리고 이번에는 남도... 이젠 경상도 쪽으로 핸들을 돌려볼까 합니다. 이제 남은 건 제주도랑 해외 도피뿐이네요. 아버지 덕분에 전국 팔도 유람 아주 잘~ 하고 다닙니다. 조만간 전화 올리겠습니다.


- 불충한(그러나 합리적인) 아들 올림 -


추신: 엄마께 보낼 '청주댁 폭로 편지'는 이미 다 써뒀습니다.    

우표만 붙이면 바로 발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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