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외할머니는 마스터셰프 코리아에 나갔다면 못해도 준우승은 할 정도로 음식 솜씨가 좋은 분이셨다. (물론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이다) 외할머니 손맛을 닮은 엄마도 내가 볼 땐 요리가 식은 죽 먹기로 보였는데 이를테면 집에 그 흔한 계량컵이나 스푼 하나 없이 대충대충 양념을 넣어도 기가 막힌 맛이 나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본가에서 엄마 요리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 시간은 3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는데 밑반찬 세네 개가 뚝딱뚝딱 나올 때 역시 엄마는 천재야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남편과 나는 18평 남짓한 신혼집에서 처음으로 살림이라는 것을 시작했다. 큰 거실 하나에 작은 방 하나가 딸린 구축 아파트였는데 부엌은 어찌나 좁은지 재료를 늘어 놀 공간도 없었다. 그래도 그 집에서 우리 둘은 지글지글 보글보글 다정한 음식을 만들어 먹으며 참 행복했다. 아이들을 낳고 이사를 한 집은 39평이었다. 18평에서 지내다가 39평으로 오니 부엌이 마치 운동장 같았다. 아이들이 태어났겠다 본격적인 요리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다. 좋은 재료를 미리 사놓고 아이들을 재우고 나면 출발을 알리는 총소리와 함께 백 미터 결승점을 향해 힘껏 달리는 사람처럼 음식 만들기에 몰두했다. 리코타 치즈도 직접 만들고 내가 좋아하는 팥죽도 끓이고 투뿔 안심 소고기와 단호박을 넣은 이유식을 한솥 만들어놓고 소분해놓기 바빴다. 그때는 넓은 부엌에서 아이들을 위해 만드는 요리가 즐거웠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지금은? 요즘은 요리하는 게 제일 귀찮은 일이 되어버렸다. 매일매일 무엇을 먹을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제철음식이 몸에도 좋고 가격도 저렴하니 웬만하면 제철 식재료를 사려 노력한다. 메인 요리가 정해지면 그다음은 마트에 가서 장을 봐오고 장 봐온 재료들을 냉장고에 넣고 정리한다. 이 시뮬레이션을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돌리다 보니 대체 언제까지 밥을 해먹여야 되나 귀찮은 게 사실이다. 멋모를 때는 마트에서 일주일치 장을 봤었다. 그런데 십만 원을 훌쩍 넘게 장을 봐왔는데 이상하게 하루 이틀 지나면 먹을 것이 없는 악순환에 빠졌다. 결국 몸소 터득한 방법은 장은 2~3일에 한 번씩 조금 보는 것이다. 비용도 줄이고 무엇보다 안 해먹은 재료들이 냉장고에서 그대로 썩어서 버리는 일이 없게 됐다.
오후 다섯 시가 되었다. 자주 하는 음식들은 레시피가 없어도 뚝딱뚝딱 만들지만 나에게는 외할머니나 엄마처럼 손대중으로 대충대충 만들어도 기가 막히게 맛있는 음식이 나오는 매직은 일어나지 않는다. 오늘도 나는 귀찮고 스트레스받는 요리를 정확한 레시피를 찾아 계량 후 만들기 바쁘다. (레시피는 거의 대부분 다정 선생님 것을 참고한다)
소고기를 노릇노릇하게 잘 볶는다. 물과 깍둑 썬 감자, 된장, 고추장을 넣고 제일 센 불에서 끓인다. 그다음으로 호박과 양파를 넣고 다진 마늘과 고춧가루를 넣고 뭉근하게 끓인다. 다 끓고 나면 마지막 참기름 한 방울과 송송 썬 대파나 부추를 넣어준다. 네 식구 모두 잘 먹는 소고기 감자 고추장찌개 완성이다.
넓고 조금 깊은 팬에 식용유를 두어 번 휘익 두른다. 중간 정도 두께로 썰은 무를 그 위에 빈틈없이 깐다. 요즘 제철인 살이 통통하게 오른 삼치를 그 위에 지그재그로 가지런히 놓는다. 다진 마늘, 참기름, 고추장, 간장, 고춧가루, 올리고당, 설탕, 깨소금을 넣고 만든 양념장을 삼치에 발라준다. 그리고 물 한 컵을 넣고 중불에서 삼사십 분 끓인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생선조림 완성이다.
우선 메인 요리와 찌개가 완성되었다. 부엌을 종종거리며 계량스푼의 도움으로 정확하게 레시피를 따라 하니 맛있는 음식이 완성되었다. 음식 하는 내내 이 재료를 넣었나 안 넣었나 확인해야 하고 중간중간 쌓이는 설거지 거리를 치워준다. 저녁 시간 내 모습은 쉴 새 없이 지렁이를 입에 물고 새끼한테 갖다 바치는 제비와 닮아있다.
남편과 아이들은 밥 한 공기 뚝딱 비우고 오늘도 잘 먹었습니다 외친다. 잘 먹는 모습에 흐뭇하다가도 대체 언제까지 해 먹여야 하나 생각하면 귀찮고 피곤해지기 일쑤다. 어쩔 때는 가족들이 날 조종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부엌이 좁았던 신혼집에서는 일하느라 가끔 하는 요리가 즐거웠고 부엌이 넓은 현재 집에서는 요리하기는 편하지만 매일매일 밥상을 차려야 하는 일상은 지겹다. 건조하고 거칠어져 가는 내 손을 보면서 어떤 하나의 이미지가 내 머릿속을 스친다. 하교 후 집에 가면 엄마는 늘 부엌에서 무언가를 하고 계셨다. 나는 엄마의 등만 보이는데 그 뒷모습 너머로 집안 전체에 울려 퍼지는 경쾌한 도마 소리가 들린다. 반복적인 리듬으로 흡사 자장가 같은 도마 소리를 들으며 나는 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한다. 도마 소리와 찌개 냄새를 맡으며 행복한 미소를 띠고 있는 아이가 보인다. 그 냄새는 엄마가 물리적으로 나를 힘껏 안아주지 않았어도 난 이미 충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 준 원동력이 되었던 거 같다.
"엄마 맛있는 냄새 나. 오늘은 뭐해줄 거야?"
저녁이 되니 유하가 코를 킁킁거린다. 좋은 냄새 맛있는 냄새가 난다며 까치발을 들고 부엌에 있는 인덕션을 쳐다본다. 아이들도 나처럼 엄마 요리 냄새를 기억하면서 살아갈까. 귀찮아서 밥도 하기 싫고 누워만 있고 싶은데 다시 한번 힘을 내 냉장고 문을 연다.
저녁을 먹은 후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우리 밥 해 먹이느라고 힘들었지? 어떻게 그렇게 매일매일 밥을 했대?"
"그땐 다 그랬지 뭐. 너 요즘 애들 방학이라 밥 해 먹이느라 힘들지?"
"응. 나도 엄마 밥이 먹고 싶네"
내가 엄마가 되어보니 알겠다. 삼시세끼 밥을 먹는다는 것은 누군가의 소중한 시간과 수고스러움이 담긴 고귀한 것이었다는 것을. 받기만 했을 때는 그것은 그저 자연스러운 일상에 불과했지만 내가 주는 입장이 되어 보니 값어치를 매길 수 없을 만큼의 정성과 수고가 들어간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우리 모두는 밥으로 위로를 받고 밥 때문에 짜증이 난다. 제5 원소 영화에서처럼 전자레인지에 작은 캡슐 하나 넣고 돌리면 맛있는 음식이 완성되는 것처럼 그런 시대가 온다면 우리 모두 밥에게 순도 높은 위로만 받을 수 있을까. 어쨌든 오늘도 여전히 나는,
'오늘은 또 뭐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