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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아 Mar 31. 2022

어서 와, 봄

따스한 햇볕이 얼굴에 닿아 부서진다. 눈이 시려 본능적으로 가방을 뒤적거리며 선글라스를 찾아보지만 차키와 카드지갑이 전부다. 이번에는 후욱하고 깊은 숨을 쑤욱 들이마셔본다.




15년 전 4월 아일랜드 더블린, 딸기잼을 대충 바른 딱딱한 토스트를 우유와 함께 우적우적 입에 쑤셔 넣고 밖으로 나왔다. 다소 으스스한 안갯속 차가운 공기에 목이 시려 검은색 재킷 깃을 한껏 고쳐 세워 입었다. 룸메이트인 영은이와 첫 출근길, 우중충한 날씨를 보고 대체 이 도시에 햇볕은 언제 쨍쨍 나냐며 툴툴거리며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사람들을 가득 채운 버스가 앞에 서고 우리는 시내로 가는 버스에 당당히 올라섰다.


요금통에 동전을 쨍그랑하고 넣었는데 버스 기사가 거스름돈은 줄 수 없다며 나보고 무작정 내리란다. 영은이는 요금으로 동전을 딱 맞게 넣었고 나는 우리나라처럼 천 원을 내면 거스름돈을 받을 요량으로 좀 넉넉하게 돈을 넣었는데 거스름돈 없다며 내려서 다른 버스를 타란다. 그럼 이미 낸 돈을 다시 주던가. 요상스러운 표정을 한 버스 기사에게 뭐라 한마디도 못하고 영은이를 쳐다봤다. 영은이는 이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안타까운 눈빛을 한 채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잇 나쁜 계집애, 도와주지도 않고 혼자 저렇게 의자에 앉아있기냐. 나는 결국 버스기사에게 반박도 못한 채 혼자 내려 홈스테이 집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아줌마, 혹시 동전 있어요? 거스름돈 없다고 버스 기사 아저씨가 무작정 내리래요. 아주머니는 딱하다는 얼굴로 본인의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아휴 첫 출근날부터 지각하겠네, 종종거리는 걸음걸이에 불안함과 짜증이 묻어난다.  


결국 시티로 가는 버스에 다시 올라타 먼저 출근해버린 영은이에게 일말의 배신감을 느끼며 차창 밖을 쳐다보는데 버스 옆으로 쭉 따라오는 배경이 몹시 아름다워 나도 모르게 그런 감정을 잊어버렸다. 버스에서 내려 트램으로 다시 갈아타야 하는 수고로움에도 황홀한 바깥 풍경을 또 볼 생각에 즐거움이 묻어났다. 트램 안에는 버스보다 사람이 더욱 많았다. 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고 서울의 지옥철보다 심한 밀도감을 느끼며 코끝으로 전해지는 서양인들의 체취에 내가 지금 서울이 아닌 더블린에 있구나 실감할 수 있었다. 서있는 내 주위 근처로 어떤 사람은 자리에 앉아 여유롭게 조간신문을 보았고 어떤 이는 트램 안에서 유난히 혼자 튀었던 동양인인 나를 쳐다봤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나도 지금은 더블리너거든'이라는 표정으로 대꾸해줬다.


마침내 시내 한가운데 트램이 서고, 마치 개미굴에서 개미들이 빠져나오듯 사람들은 줄줄이 쏟아져 나와 제각각 흩어졌다. '어휴 출근길 정말 되다 되네' 생각하며 역에서 내려 회사로 향하는 길, 요리 봐도 아름답고 저리 봐도 아름다운 건축 양식에 감탄했다. 그 옆으로 어떤 남자가 연두색 풋사과를 한입 크게 베어 물며 출근길을 나서는 모습이 보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도 내일은 풋사과를 가방에 넣고 집을 나서야지 생각했다.


바람에 산들산들 날리는  머리카락이 맘에 들어 가방 속에서 디지털카메라를 꺼내 들고 찰칵 셀피를 찍어봤다. 회사로 향하는  옆에 있던 공원에는 연보라색 라일락 꽃이 흐드러지게 펴있고 생생한 연둣빛 초록빛 이파리들이  주위를 감싼 모습이 너무나 조화로워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찰칵찰칵. 아직 시간이 남아있으니 훌렁훌렁 공원을 걸어보고 갈까 하며 입구에 들어서는데 순간 정원처럼  가꾸어진 공원 모습에 나는 아득해져 버렸다. 우중충한 날씨는 온데간데없이 따스한 햇볕이 라일락 꽃과 다른 꽃들 위로 쏟아지는데  완벽한 아름다움에  손가락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귀에 꽂은 MD 플레이어에서는 좋아하는 공일오비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실로 완벽한 아침이었다.


십오 년이 이미 훌쩍 지났지만 그날 더블린 아침의 기억과 향기는 강렬하다. 흡사 토스터기에서 굽기 시간이 완료된 토스트가 퐁 하고 튀어나오듯 봄이 오면 어김없이 그 기억은 퐁 하고 솟아오른다. 따스한 햇볕에 잠시 눈을 감으면 아일랜드의 첫 출근길 아침이 떠오른다. 은은한 라일락 꽃 향기와 풋사과를 한입 베어 물며 내 옆으로 걷던 청년과 아름다운 고딕 양식 건축물들. 우연히 지나친 공원에서 발걸음을 멈춘 채 연신 셔터를 누르며 사진을 찍어대던 스물다섯 살의 나.




내일부터는 꼭 선글라스를 챙겨 나와야겠다. 벚꽃처럼 기억이 후드득 날아드는 것을 보니 봄이 내 앞에 성큼 다가온 것 같다. 스물다섯 살의 봄도 찬란했지만 지금의 봄도 충분히 만끽할 준비가 되어 있으므로. 환영한다 어서 와,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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