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언일맥(一言一脈) 스물네 번째

단죄의 철학

by 이민행

1. 죄책감에 사로잡힌 사람들


우리는 자유로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과 몇 세기 전만 하더라도 차별과 계급이라는 불합리가 만연하여 일상처럼 존재했지만 지금은 전 세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과 행동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누구든 기회를 가지고, 선택하고, 결정하여,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자유'가 우리에게 미치는 부작용도 있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패러다임이 생긴 것이죠.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뛰어난 재능, 엄청난 노력을 다 했음에도 실패하는 경우가 세상에는 부지기수입니다. 사회나 운명의 영향이 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우의 실패가 그저 한 개인의 노력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자유로운 존재'가 아닌 '죄책감에 사로잡힌 존재'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가 발생하게 된 것이죠. 이러한 부조리함을 꼬집은 철학자가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입니다.

그의 저서『도덕의 계보』(Zur Genealogie der Moral, 1887)에서 처음 언급한 ‘단죄의 철학(Philosophie der Verurteilung)’은 인간이 스스로를 죄인으로 만드는 도덕 체계를 뜻합니다. 원래 인간은 행동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적 사고와 도덕이 오랫동안 사회를 지배하면서 인간은 자신이 한 행동을 ‘선과 악’의 잣대로 판단하고, 스스로를 단죄하기 시작합니다. “너는 죄인이다”, “너는 부족하다”는 내면의 목소리는 내면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 외부 권력에서 만들어낸 산물인 것이죠. 이로 인해 인간은 양심의 가책, 죄책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도덕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단죄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도덕이란 양심의 가책이라는 형식으로 개인을 지배하는 데 사용되는 집단적 본능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Friedrich Nietzsche, 1844–1900)


니체는 스스로를 탓하고, 실패를 결함으로 보지 말라고 합니다. 죄책감의 굴레를 벗고, 타인의 잣대나 도덕적 규범에 맞추지 않는, 그래서 자신의 본능과 힘을 긍정하는 존재, 즉 초인으로 거듭나라고 역설하였습니다.



2.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단죄가 아닌 교화


누군가의 잘못이나 실패를 보았을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 원인을 따지고 듭니다. “누가 잘못했는가?”, “왜 실패했는가?” 이 질문은 정의로워 보이지만, 결국 타인을 심판하고, 나아가 자기 자신을 재단하는 습관으로 이어집니다. 잘못이 용서되지 않는 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완벽함을 강요받고, 한 번의 실수로 ‘낙인’이 찍힙니다. 이때 그 단죄의 칼날은 타인에게만 향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지 못하고 죄책감에 빠지는 인간 — 그것이 니체가 말한 ‘단죄의 철학’의 또 다른 얼굴이죠. 그런데 이러한 생각의 방향을 다른 쪽으로 돌리라고 말하는 철학자가 있으니, 바로 공자입니다.

공자는 인간을 완벽해야 할 존재로 보지 않았습니다. 늘 모르는 것을 배우고, 잘못된 것은 고쳐가며,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 이해했죠. 누구나 잘못은 저지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잘못을 했을 때 어떤 태도와 마음가짐을 갖고 고치려고 노력하느냐가 중요합니다.


過而不改 是謂過矣.(과이불개 시위과의)

“허물이 있어도 고치지 않으면 그것이 참된 허물이다.”

— 『공자』 위령공편(衛靈公篇) 중에서


실수, 잘못, 실패는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과정들입니다.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 때, 인정하고 바로잡는 행위를 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덕(德)이죠. 수양의 기회를 주고,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점에서 공자가 말한 덕은 단죄가 아닌 교화(敎化)라 하겠습니다.


3. 과학에서 말하는 새로운 해방, 또는 새로운 구속


과학은 인간이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끌어내린 위대한 여정이자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고, 불가능하던 것을 가능하게 만든 도전의 역사입니다. 인간, 자연, 우주를 넘어 세상의 질서를 설명하려는 과정에서 필수적으로 쓰이는 학문이죠. 최근에 새로운 바람을 넘어 태풍이 된 인공지능(AI)이라든지, 유전자 편집기술을 통하여 생명의 구조를 탐구하는 유전공학 등은 기존의 한계를 넘어서는 전혀 새로운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이어오던 세상에는 절대적인 기준, 이데아가 있다는 인간 사고와 관념을 하나하나 깨나 가고 있는 것이죠. 니체가 우려했던 '단죄의 철학', 도덕과 규범이라는 고정된 구조를 정면에서 배치하는 것이 과학이 가지고 있는, 무엇이든 해석하고 증명해 낼 수 있다는 '긍정의 철학'이라는 특성이 아닐까요.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요, 과학 없는 종교는 맹인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하지만 이러한 과학만을 맹신하는 사고방식은 자칫 새로운 '단죄의 철학'을 만들어 낼 수도 있습니다. 과학적 방법론만을 절대적으로 신봉하면서, 인간의 모든 삶과 사회문제를 과학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태도라든지, 그동안 인류가 쌓아왔던 철학과 윤리, 종교와 예술을 과학의 잣대로 측정하고 재단하는 식으로 말이죠.

인간은, 세상은 측정하고 계산하는 데이터가 아닙니다. 과학이라는 새로운 사고의 도구가 오히려 우리를 구속하는 족쇄가 되어서는 안 되겠죠.


4. 문학에서 말하는 단죄의 의미


인간의 존재, 도덕과 죄의 구원에서 과연 무엇이 합리적인가를 우리에게 던지는 작품이 바로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L’Étranger, 1942)입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 알베르 카뮈『이방인』 중에서


소설은 이렇게 무심한 한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주인공 뫼르소(Meursault)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회로부터 냉담한 시선을 받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우연히 살인을 저지르고 체포되지만, 재판에서 문제시된 것은 그의 ‘살인 동기’가 아니라 그의 '무감정한 태도'에 초점이 맞춰지게 됩니다. 법정은 그가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슬퍼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집요하게 파헤치며 그를 비도덕적인 인간, 즉 ‘단죄받아야 할 자’로 판단하죠. 결국 뫼르소는 사형을 선고받고, 죽음을 앞두고 세상의 모든 도덕과 의미가 허상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도덕의 기준을 따르지 않으며, 자신의 감정과 존재를 그대로 긍정합니다. 사회는 그를 비정상이라 부르지만, 그는 오히려 단죄의 세계 바깥에서 ‘자기 존재의 순수함’을 지켜냅니다. 카뮈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묻습니다. “진정한 죄란 무엇인가? 눈물 흘리지 않은 것인가, 아니면 진실을 외면한 채 타인의 눈에 맞춰 사는 것인가?”. 뫼르소는 침묵과 무표정으로 세상의 위선과 규범에 대하여 저항하며 '단죄의 철학'을 넘어섭니다. 다만 니체가 말한 초인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닌 죽음으로서 말이죠.


5. 예술에서 말하는 단죄와 구원


니체가 비판한 단죄의 철학은 중세를 이끌어 갔던 사상의 흐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예술작품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16세기 초 르네상스가 절정을 맞이하던 시기에도 여전히 예술은 신의 뜻을 형상화하였죠. 그 대표적인 화가가 미켈란젤로입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예술작품은 신을 찬미하면서도, 그 안에 인간의 고통과 의심, 구원과 단죄의 모순을 함께 품고 있었죠. 그리고 복잡한 감정의 정점에 선 작품이 바로 최후의 심판(The Last Judgment)이죠.


"진정한 예술 작품은 신성한 완벽함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The true work of art is but a shadow of the divine perfection.)

— 미켈란젤로


벽화의 중심에는 구세주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더 이상 인류를 구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심판자로서 강림한 모습이죠. 주변에는 천사와 성인들에 둘러싸여 있고, 천국으로 오르는 자들과 지옥으로 떨어지는 자들이 그리스도의 심판을 받아 부활하기도 하고, 하강하기도 하는 극적인 대비를 이루며 혼돈의 장면을 만들어냅니다.

신의 이름으로 인간을 재단하고, 도덕의 잣대로 영혼을 구분하는 구조,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자유를 잃고 절대자에게 도덕의 잣대를 맡기는 체계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넘어지면 그저 일어나면 됩니다.


세상은 자유로워졌고, 더욱 가까이 연결되었습니다. 이제는 지구 반대편 누군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 수 있을 정도이죠. 타인의 생각과 감정을 손 안에서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만큼 도덕적인 잣대는 더욱 엄격해지고 무겁게 변하고 말았습니다. 작은 실수, 사소한 말 한마디, 순간의 실패조차 보다 엄격한 도덕적 기준에 의해 비판과 비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평가하고 평가받는 세상을 살아가다 보니,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고, '자유 아닌 자유' 속에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닙니다. 부딪히고 깨지며 넘어집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가 취해야 할 행동은 일어서는 것입니다. 니체가 말한 어린아이처럼 기존에 해오던 것을 버리고, 망각한 채 다시 새롭게 시작해야 합니다.

타인의 시선과 자신의 의무에서 벗어나, 자신의 자유를 추구하고, 궁극적으로 긍정적인 마음을 갖는 것이 그가 추구했던 위버멘시(초인)이니까요.


『잘못된 길이란 없습니다. 다른 길이 있을 뿐이죠.

내 앞에 놓인 길을 미소 지으며 나아갈 뿐입니다.』


하나의 명언이 하나로 흐르다.

– 일언일맥(一言一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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