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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아나의 행복일기 Jul 01. 2024

야구 모르는 여자

불빛 수백 개가 응원가 리듬에 맞추어 흔들렸다. 반딧불들이 군무하는 듯 장관이었다. 야구장 스카이 석에 서 있으니, 하늘이 손에 잡힐 듯했다. 진한 회색 구름 사이로 노을빛이 붉게 물들어 가는 하늘에 비행기 한 대가 유유히 날아가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멋졌다. 삼성 라이온즈 파크를 가득 채운 야구팬들은 ‘승리하라 최강삼성’ 응원가를 감격에 겨워 목청껏 불러젖혔다. 이 맛에 야구장 오나.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은 처음이다. 


15년 전, 태어나서 야구 경기를 처음 보았다. 기말고사 기간이어서 희야와 도서관에서 공부하다가 배가 출출하여 휴게실에서 김밥을 먹는데 삼성 라이온즈와 한화 이글스의 경기가 한참 중계 중이었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희야는 눈을 반짝거리며 야구 기초상식을 줄줄 말하기 시작했다. 


기본도 모르는 나를 위해 야구는 3월부터 10월까지 경기가 열리며, 스트라이크 존은 어디인지, 볼넷은 무엇인지 등 자상하게 알려주었다. 물 흐르듯 이야기하는 모습이 도서관에서 머리를 싸매고 뇌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기말고사 족보와 씨름할 때와는 딴판이었다. 


희야와 한참 연애 중일 때라 야구에도 관심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했다.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야구 아는 여자’라는 책이 눈에 들어왔다. 소개를 보니 나도 이 책을 읽으면 야구 까막눈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포츠 서울’에서 야구 기자로 활동했던 저자가 여자의 입맛에 맞게 떠 먹여주는 야구 입문서라 했다. 


희야에게 이 책을 사달라고 부탁했다. 야구 아는 여자가 되겠다는 야심 찬 목표를 세우고 읽기 시작했으나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다. 머리에 쥐가 나는 느낌이었다. 당시 나는 의대 본과 2학년이라 2주에 한 번씩 전공과목 시험을 봐야 했다. 이런 잡다한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시간은 시험 끝난 후 하루 이틀뿐이었다. 결국 ‘야구 아는 여자’ 책은 책장 구석 어딘가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동안 삼성 라이온즈 야구 성적에 일희일비하는 희야를 외계인처럼 바라보며 무심히 넘어갔다. 내 기억 속 친정아버지는 한 번도 텔레비전으로 야구 중계를 보신 적이 없다. 여가를 경시하는 집에서 자라서 그런지 프로선수들이 하는 스포츠 경기를 보며 울고 웃는 모습이 낯설었다. 올해 들어 이제 아이들이 야구장 갈 만큼 컸다고 생각했는지 희야가 경기 관람표를 예매하기 시작했다. 


가족은 주말에 항상 함께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희야의 신념에 따라 처음 야구장을 따라간 날, 문득 의문이 들었다. 도대체 왜 야구는 경기의 승패를 가리기 위해 9회나 하는 거지? 3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계속 반복되는 경기를 보고 있어야 한다니. 집에는 내가 해야 할 일이 산더미같이 쌓여있는데 말이다. 더 기가 막힌 건, 9회까지 점수가 동점이면 경기를 3회 연장하여 12회까지 한다는 점이다. 


야구 경기는 오후 5시에 시작하니 경기가 빨리 진행되어도 보통 끝나는 시간이 9시가 넘는다. 버스 타고 집에 돌아와 아이들 뒤치다꺼리하고 잠자리에 들면 어느새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다. 새벽 4시 반이면 기상하는 나에게 이건 너무 부담되는 일정이다. 

꼬마 응원단장 호야

야구장에 다녀온 다음 날, 온몸이 뻐근했다. 시끌벅적한 야구장에서 가만히 있기는 민망하여 나름대로 응원에 동참했는데 너무 열심히 했나, 아니면 자리가 불편해서 그런가, 하여간 학창 시절 극기 훈련 다녀온 다음 날처럼 피곤한 게 젖산이 몸 구석구석 모세혈관에 끼어있는 느낌이었다. 피곤함에 허우적거리는 나와는 달리 희야와 아이들은 삶의 새로운 재미를 찾은 듯 들떠있었다. 


희야가 퇴근하여 현관문을 들어서며 ‘내가 왔다’라고 외치면 민이는 쪼르르 달려 나가 ‘아빠, 다녀오셨습니까?’, 폴더핸드폰 인사를 한 뒤 삼성 야구 지금 몇 점이야? 하고 물었다. 


삼부자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야구장은 되도록 가지 말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늘 삼성이 아니라 칠성이라 놀림받던 삼성 라이온즈가 무슨 일인지 좋은 성적을 내기 시작했다. 덩달아 우리 집에서 야구 이야기를 하는 시간도 늘어갔다. 한화 이글스와 삼성 라이온즈의 경기가 5월 말에 대구 홈구장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희야가 표를 예매하려 했으나 류현진이 출전하는 경기라 경쟁이 치열하여 예매에 실패했다. 


주말에 집에서 맥주를 마시며 핸드폰 중계를 보는 희야의 얼굴은 현장에 못 갔다는 아쉬움으로 가득 차 보기에 딱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이 경기는 6회 박병호의 홈런으로 삼성이 역전승을 거두었다. 아, 정말 재미있었겠다, 혼잣말하며 핸드폰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희야를 보니 이 한 몸 희생에서 야구장에 가야 하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희야는 다음 주 경기표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근무 중 짬나는 대로 표를 구하고자 했지만, 번번이 토요일 예매에 실패했다. 요즘 야구 인기가 높아져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일요일에 가도 돼?,라고 묻는 희야에게 성당 주일학교 갈 시간이야, 절대 안 돼!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마침 호야가 성가대 미니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라 한주쯤 주일학교는 쉬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일요일 야구 경기 참석을 위해 토요일 저녁에 호야와 함께 미리 미사에 다녀왔다. 


성당 주일학교를 땡땡이치고 온 식구가 야구장에 출동한 일요일 오후, 파란 하늘과 시원한 바람이 기분을 한껏 들뜨게 했다. 관중들이 구름 떼같이 야구장에 몰려들었다. 경기는 영 대 영 무승부를 유지하며 7회까지 평소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신나는 음악을 좋아하는 호야는 김지찬 선수가 타석에 들어서자, 앞으로 나가 응원하겠다며 우리 가족이 앉아있는 스카이 석에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관중석 중간 통로 공간이 호야의 응원 무대가 되었다. 호야가 배트 모양의 응원봉을 들고 폴짝폴짝 뛰는 모습이 영락없는 꼬마 단장이었다. 호야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문득 희야가 왜 야구를 좋아할까, 어릴 적 가족끼리 야구장에 자주 갔다고 했는데 추억 때문에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희야에게 언제 야구장에 처음 갔냐고 물으니, 어릴 적 아버지가 암 수술을 받고 나서라고 했다. 아이들에게 다정했던 시아버지께서 투병 중에 기세 좋은 열 살 남짓 남자아이들과 놀아주기에는 기력이 역부족이었겠다. 그럴 때 야구장이 괜찮은 선택 지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념에 빠져있는데 8회 초 박병호가 홈런을 쳤다. 우레와 같은 함성 소리가 야구장을 가득 메웠다. 나도 분위기에 휩쓸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함성을 질렀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집에 갈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더욱 기뻤다. 이날 경기는 일 대영으로 삼성 라이온즈가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두었다. 


집에 돌아와 책장을 샅샅이 뒤져 '야구 아는 여자' 책을 찾아냈다. 서문을 읽어보았다. 사람들이 야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야구가 인생을 닮아서란다. 그런 의미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이제는 집에 오자마자 야구 중계를 틀어놓고 집중하는 희야가 외계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주말 집콕 야구하는 호민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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