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게 승리하기
억울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법적으로 따져 물어야 할 정도면 단계를 밟으면 되지만
법의 경계 밖에서도 억울한 일들은 생긴다.
꽤 자주 그렇다.
이전 글에서 말했듯 최근 회사에서 다른 부서 직원과 갈등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설전에서 내가 이겼다.
이리저리 따졌더니 오후 내내 자리에서 울었다고 들었다. 아니, 왜 울지? 나도 자주 울긴 하지만 그 날 나는 그 여자에게 욕을 하지도 않았고, 언성을 높이지도 않았고, 차분하게 생각을 말했을 뿐이다. 내 입장에서 보면 상황 자체가 내게 유리했다. 나는 절대 말을 잘 하는 사람이 아닌데 그는 논리가 없고 나는 타당한 논리가 있으니 내가 이기는 게 당연했다.
생각해보니 싸움의 시작 자체가 내가 억울해서였다.
계속된 나의 호의를 권리로 알고 당당히 요구했다가 내가 거부하자 화를 버럭내며 달려든 거다.
크흥, 이빨을 세우고.
펑펑 울면서 그쪽 부서 상사와 동료들에게 내 욕을 하고 다닌다고 들었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울어서 말도 제대로 못 한다고 했다. 그 정도면 사회생활 포기하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이 소리 하면 또 발발 미쳐서 날뛰겠지. 며칠 그러더니 이번엔 사내 게시판에 장문의 글을 남겼다. 구질구질 아니 구구절절 적었지만 결론은 하나다.
건방진 윤성, 네 이년!
다행인 건 같은 부서 동료들이 내 편이고 직속 상사가 나를 대신해 그 글에 대응해줬다는 거다.
- 공개된 공간에서 이러는 거 좋아보이지 않습니다.
멋진 상사는 그렇게 딱 한 마디를 남겼다.
사실 나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가 제기한 문제에 대하여 따지고 물을 게 최소 대여섯은 되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댓글, 대댓글을 달며 싸워서 이길 자신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러지 않았다.
왜? 그는 내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으니까,
나의 시간은 소중하니까. 설명이 없어도 그의 저급한 대처를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고, 설명해봤자 무조건 그쪽 편에 서서 내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을테니까.
길을 걷다가 갑자기 머리채를 잡혔는데 행인들이 보는 앞에서 같이 잡아 뜯고 싸우기 싫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글은 페이지가 넘어갔고 나는 구내식당에서도 로비에서도 회의시간에도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낸다.
힐끔힐끔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지만 신경쓰지 않으려 했고, 부서 사람들과 그 사람을 잘근잘근 씹어대며 이번 주를 보내고 있다.
예전보다 한 단계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예전의 나는 길에서 먼저 머리채를 잡는 경우도 많았고 머리채를 잡히면 상대 머리채를 뽑아놓는
쌈닭이었으니까.
싸우고 정신과를 찾아 속을 털어놓고 신경안정제를 처방받아 두어달 먹기를 반복하며 살았다.
같이 들러붙어 싸우면 속은 시원할지 몰라도 기분이 더럽다. 더러운 기분이 오래간다.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기에 내가 그 사람보다 나은 사람 같았고, 해당 일로 어디에 불려가도 그의 공개저격을 직장내 괴롭힘으로 문제 삼을 수 있으니 오히려 무기가 하나 생겼다며 기뻐했다.
하지만 이상하다. 일단 소화가 잘 되지 않는다.
먹어도 속이 좋지 앟으니 적게 먹게 되고 살이 2kg나 빠졌다. 돼지 입장에서 이득인가?
잠도 푹 못 잔다.
한시간에 한번씩 깨다가 정신 차리면 아침이다.
아니,
왜 그래?
정신은 승리했는데 왜 몸은 따라오질 못해?
확 때려칠까 싶기도 하다. 사실 직장을 꼭 다녀야 하는 상황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만두면 뭘 하지?
사람들 만나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상 일을 하지 않으면 나는 24시간 집에만 있을 가능성이 백프로다. 그나마 일을 해서 약간의 사람들도 만나고 말도 하며 지내는데 일을 그만두면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내지?
비싼 취미활동이나 운동을 할 만큼 사정이 여유롭지는 않다. 또 한 가지 걱정은 글감이 없을 것 같다는 거다.
고요한 일상에 감사하는 글들은 이미 레드오션이다.
회사에서 가지가지 진상들을 만나니 하루가 멀다하고 글을 써서 궁시렁대고 싶고 사람들의 공감도 얻고
얼마나 생산적인가.
그래, 그래서 회사를 때려치지 않기로 하고
억울한 마음을 다스릴 궁리를 해보았다.
지금 너무 억울한 상태라 마음을 다스리고 나발이고
달려가서 그 사람 귀퉁배기를 아작내고 싶지만
꾹 참고, 우아한 방법을 생각해본다.
피하기
법으로 심판할 일이 아니라면 일단 피하는 게 좋을 듯싶다. 시간을 벌어야 한다.
당장 떠오르지 않더라도 시간을 두고 생각하면 현명한 해결책이 생길 것이다. 일단 그렇게 믿고,
당장 눈 앞의 상황을 피한다.
그러지 않으면 개싸움 날 가능성만 높아진다.
서로 이기는 방법 생각하기
상황을 얼른 종료시키고 싶어서 한쪽으로 치우친 해결책들이 쏟아지는 건 오히려 독이다.
없을 것 같아도 서로 이기는 방법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걸 떠올려야 한다. 하루가 걸릴 수도,
일주일이 걸릴 수도, 어쩌면 한달이 걸릴 수도 있다.
성급히 입을 열지 말고 방법을 찾자.
조바심도 분노도 일단 스위치를 끈다.
이런 고난에 감정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의견 제시
드디어 떠오르면 이제 상대를 만나 의견을 제시하자.
(썩을년아) 이것 봐. 우리 둘다 만족시킬 방법이 있어.
(망할놈아) 이거 어때?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괜찮지?
의견이 수용된다면?
상황종료.
사람들에게 내 머리에서 이 방법이 나와서 우리 멋지게 해결했어! 공표한다.
중요한 건 해결책을 ”내가“ 제안했다고 분명히 밝히는 거다. 이 나쁜년놈은 내게 싸우자고 덤볐지만,
나는 평화주의자니까 우아하고 똑똑하고 착하니까
이런 묘책을 생각해냈어, 어때?
나 좀 멋지지.
의견이 거부된다면?
한번 더 시간을 두고 다시 한번 묘안을 떠올려보자.
그리고 제안하기, 또 거부당하면? 반복.
반복은 두세번 정도.
그럼에도 또 거부 당한다면?
둘다 이기는 거 쉬룬뒈애애애애?
나만 이기고 쉬푼뒈애애애애애애애애앵??
세상엔 나쁜놈 미친년 썅년 썩을놈으로 표현되지 않는,
희안하고 기괴한 사람들이 있다.
윈윈(win-win)이 확실한데 그걸 거부한다면
그런 사람에겐 그냥 한발 물러나주자.
조금 억울해도 변호사를 고용할 일까지는 아니라면
양보하자. 불쌍하거나 무서운 사람이다.
자살하거나 칼을 들고 쫓아올 가능성이 있다.
양보해서 억울한 게 누굴 죽이거나
누군가에게 죽임 당하는 거보단 낫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갑자기 식욕이 돌아
현미밥에 열무 한 바가지, 고추장, 참기름, 계란후라이까지 넣고 쓱삭쓱삭 비벼먹었다.
딱 알맞게 익은 열무김치가 아삭아삭 정말 맛있다.
조금 더 괴로워하다가 3kg정도만 더 감량한 다음에
궁리할 걸 그랬나 싶다.
나열한 방법대로 해결이 될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은 피하고 생각했고 의견을 제안하기 직전 단계이다.
오늘 퇴근하기 전까지 그를 만나 우리가 서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되는 카드를 던질 생각이다.
그가 불쌍한 정신병자거나
무서운 싸이코패스가 아니길 바란다.
‘그냥’ 정신병자에겐 마지막으로 한번 더 의견을 제시해봐도 좋다.
하지만 ‘불쌍한’ 정신병자는 노노,
양보해야지.
불쌍한 사람과는 싸우는 게 아니다.
배려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