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시댁 벌초행사에 참여하러 충청도에 왔다. 사실 이번 벌초는 숙소를 구하지 못해서 남편과 아들만 다녀오기로 했었다. 내심 붙박이별 독서모임이 있는 주라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데 며칠 전 남편이 속리산 말티재 자연 휴양림 숙소에 선정되었다는 문자를 보여줬다. 반가움보다는 당황스러움이 몰려왔다. 글도 쓰고 다이어트도 해야 하는데...
새벽 6시 집을 나섰다. 일찍 일어나는 건 힘들지만 잠이 덜 깬 도시를 바라보며 여행을 떠나는 건 매력적이다. 인천을 벗어나니 마음이 슬슬 가벼워졌다. '여행 가서 글도 쓰고 적게 먹으면 되지 뭐....' 그런데 충청도란 이정표가 보일 무렵부터 차가 꽉꽉 막히기 시작했다. 운전하느라 피곤에 보이는 남편 눈치가 보여 자율주행이 된다면 좋겠다는 말이 나왔다.
아이들이 자율주행은 언제쯤 되냐고 물었다. 윤리 도덕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고 알려주자 아이들이 인공지능이 우리를 위협하는 것 같다며 개발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남편이 인공지능 개발은 멈추지 않는다며 인공지능의 노예가 되지 말고 지배하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아이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게 많아 구구절절 말이 길어지자..
눈치 빠른 딸이 "엄마, 이제 노래 틀어주세요!!" 흐름을 딱 끊었다. 어쩌다 아쉽게 참여 못한 독서토론을 가족들과 하게 된 거지? 짧은 시간이었지만 "에이트" 책 속 이야기를 말로 꺼내서, 가족들과 책 이야기를 나눠서 즐거웠다.
어느덧 차창 밖 풍경이 바뀌었다. 인천에 올라와 여러 번 여행해 본 결과 두세 시간쯤 차를 타고 오면 웅장한 산새를 맞닥뜨리게 되는 것 같다. 눈이 시원해지고 마음이 확 트였다. 자연에 목말랐다는 걸 실감했다. 산기슭 사이로 안개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비 내리는 날 산새 풍경도 나름대로 운치가 있다는 걸 처음 느꼈다.
네 시간 만에 겨우 장소에 도착했다. 작은 아버지를 제외하고 처음 보는 친척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다들 인상이 좋으셨다. 조상님이 도우신 걸까? 비가 뚝 그치고 햇빛이 쨍쨍했다. 함께하는 힘으로 벌초를 마치고 친척 분들과 점심 식사를 하고 나서 보은 시장으로 향했다. 소고기, 야채, 술. 딱 필요한 것만 샀다.
다시 한 시간 정도 차를 타고 가니 '속리산 말티재 자연휴량림'에 도착했다. 숲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빌라처럼 생긴 두 개 동으로 된 숙소가 나타났다. 숙소는 침대, 거실 테이블, 소파도 없이 심플함 그 자체였다. 세면도구조차 비치되지 않아서 여행 준비를 할 때는 불편했지만 막상 와보니 눈에 거슬리는 게 없어서 마음에 들었다.
숙소 밖 정자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처음 먹어본 알밤 막걸리와 숯불에 은근히 구운 소고기는 맛이 일품이었다. 비가 조용히 내리고 주위는 온통 푸르름이 가득하니 신선 노름하는 기분이었다. 남편은 술을 적당히 사 온 걸 아쉬워했다. 왜 벌초하러 가야 하냐며 인상을 찌푸렸던 사춘기 아들 얼굴에도 해맑은 웃음이 피어났다.
여행 오길 잘했다. 여행 안에서 글도 쓰고, 일찍 자고, 과하게 먹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자연을 느끼고 가족과 터놓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시간은 자주 오지 않는다. 고로 떠나는 건 진리라고 속리산 기슭이 속삭여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