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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Jun 11. 2021

스리랑카 해비타트 첫 번째

2015.4.17


4월 4일부터 우리 학교는 방학이 시작되었다 스리랑카에는 4월에 새해 명절이 있었고, 이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파견된지도 어느덧 일 년이 살포시 넘어섰음을 의미하기도 했다 작년 이맘때 스리랑카 파운데이션에서 현지 적응 교육을 받으면서 다짐했던 수많은 생각들과 '어떻게'라는 화두를 두고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졌던 질문들에 대해서 술 먹고 잠든 이불속에서 갑자기 눈을 뜬 사람처럼 가고자 하는 방향이 어느 방향인지도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만 같았다


파견된 지 일 년이 넘었으므로 국외 휴가를 떠날 수 있었다 코이카 단원에게는 파견기간 중 총 21일의 국외 휴가가 주어지고 제한 국가를 제외하고는 어디든 떠날 수 있으니까 더욱이 스리랑카는 한국보다 유렵이 더 가까운 나라이니까 어디로든 떠난다면 떠나기에 좋은 조건임은 분명했다  


막연하게 떠나기가 꺼렸던 것 같다 스리랑카보다 여건이 좋은 나라로 떠나게 된다면 휴가 종료 이후 스리랑카로 돌아올 자신이 부족했고 그렇다고 스리랑카보다 도전적인 나라로 떠나자니 스리랑카만큼의 고생에 추가로 겪게 될 고생이 눈앞이 암담해졌다 호주에 있을 때 육주를 일하고 일주일 휴가를 떠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휴가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괴로움은 표현이 불가능할 정도였고 군대 있을 때부터 휴가 복귀는 언제나 가슴 쓰린 일인데 하물며 타국에서 타국으로의 복귀는 열 배쯤 더 쓰렸던 걸로 기억한다 


혹자는 여행의 3대 조건이 시간. 돈. 건강이라고 했는데 세 가지가 다 있어도 정작 떠나고자 하는 "마음" 이 없었다 스리랑카 여행도 잘 안 다니는 나에게 국외 휴가가 얼마나 부담스러운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한편, 그래도 스리랑카에 있을 때 한국에 제주도 같은 스리랑카 근처 섬나라 몰디브는 한 번쯤은 떠나봐야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서 생각했다 몰디브를 혼자 갈지 누구랑 갈지를 동네에 있는 세계적인 신혼여행지를 두고 나는 또 고민해야만 했다


4월 20일이 신학기 개학이고 24일이 작년 졸업생들 국가자격시험을 보는 날이었기 때문에 선생의 의무와 책임감으로 그전에 반드시 학생들을 마무리 지도를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4월 4일부터 열흘 정도를 오롯한 나의 시간을 갖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낚시와 캠핑 그동안 하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서 잠시 고민했었지만 열대에 날씨에 일 년 동안 푹 절여진 내 몸뚱이는 무리한 야외활동을 쉬이 허락하지 않았고 혼자 떠나서 텐트 치고 즐기는 밤낚시가, 스리랑카 특히 이곳 암파라에서 얼마나 위험한 행동인지 짧은 생각만에 도 상기해낼 수 있었다 추수가 끝난 요즘  밤마다 코끼리 무리가 정글에서 나와 논바닥에서 잠을 자고 있었고 낚시터 악어는 밤에 더욱 활발하게 움직인다고 했다


월초에 박철순 감독님이 스리랑카에 오셔서 스리랑카 야구 국가대표 선수들을 지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영어도 현지어인 싱할라어도 어렵지 않았고 특히 야구의 행정과 기본을 이해하고 있으니까 반드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잘못 판단한 것인지 대한야구협회 프런트에서 잘못 판단한 것인지 나를 찾는 연락은 결정의 상황이 임박 해서야 당도했다 결과적으로 해비타트에 참가하게 되었지만 연락에 혼선이 오고 기약없이 기다리게 된 것은 모두에게 아쉬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코이카 봉사단은 많은 분야에 걸쳐 단원을 파견하고 있는데 나처럼 직업과 밀접된 '생계형 기술'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분야와 유아교육이나 초등교육처럼 '인성의 토대'가 되는 분야로 큰 카테고리를 분류할 수'도' 있겠다 생계형 기술이 수업의 낭만이나 학생과의 유대관계를 교사 스스로 부지런히 찾아야 한다면 인성의 토대는 보다 수업 자체로 아기자기하고 낭만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용접 수업은 지루 할 수 있고 힘들 수 있지만 생계가 달린 일이고(그래서 동기부여가 확실한 반면) 유치원 음악교육은 천진난만한 영혼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지만 봉사가 끝난 이후에 삶에 미치는 영향은 구체적으로 계측하기가 어렵다 


이런 분류를 떠나서도 대부분 무형의 가치를 전파하고 있는 코이카 단원의 성과는 본질적으로 계측해내기가 매우 어렵다 어떠한 평가지표를 가지고 평가해야 하는지 조차 애매하다 그래서 이런 무형의 가치를 전파하고 있는 코이카 단원들 스스로 역시 자기가 가고 있는 방향이 옳은 방향인가에 대한 확신을 찾고 싶어 한다 나 역시 그랬다 용접을 가르치고 있지만 학생들이 졸업해서 과연 현장에 효과적으로 적응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고  이렇게 된다면 최악의 경우 내가 스리랑카에서 보낸 2년 스스로가 어떠한 색으로도 정의될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반면 노력봉사는 깔끔하다 내가 움직인 만큼 아침과 저녁의 현장 모습이 달라지고 짊어지고 나른 벽돌만큼, 몸이 고된 만큼 보람을 찾게 되는 게 바로 노력봉사다. 타인을 위한 삶을 위해 여기에 왔음을 상기하고 또 그 넘치는 결과를 눈으로 보고 행복한 마음으로 임지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해비타트와의 인연은 그렇게 깔끔하지 못했다 스리랑카 이전에는 네팔에서 집 짓는 것 때문에 한국해비타트에서 연락을 시도했다가 엄청나게 과도한 조건으로 포기했었고 네팔 해비타트에서도 거절을 당한 아픈 경험이 있었기때문이다 스리랑카 해비타트 역시 연락과 설명이 쉽지는 않았지만 평소에 오며 가며 했던 NGO들과의 꾸준한 연락의 성과가 다행히 이번 방학에 나타나 주었다   


사실 개도국 현장에서는 선진국 봉사자의 봉사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편이 아니다. 이들이 왔다 가서 남기는 기념사진 촬영이나 현지인들과의 직접적인 교류는 해비타트에 대한 홍보와 이해도 상승으로 펀딩에 대한 거대한 밑바탕 정도가 될 수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봉사자들이 현지에 와서 얻게 될 리스크가 훨씬 더 크다 이들의 건축작업 숙련도 여부를 떠나 일하다가 다치거나 혹여 열대 풍토병에 걸리기라도 한다면 봉사자를 핸들링하는 단체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머리가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인건비가 저렴한 개도국일수록 검증 안된 봉사자가 와서 직접 몸으로 봉사하는 것보다 확실히 검증된 기술자를 고용할 수 있는 성금을 더욱더 선호하는 편이다


나는 지난 1월에 사용한 개인 휴가 말고 사용한 개인 휴가가 없었기 때문에 휴가를 사용해서 떠나라는 사무소의 방침에 별다른 불만이 없었다 되려 나의 봉사활동 중에 휴가를 사용해서 다른 봉사활동을 한다면 군대있을때 휴가나와서 다른부대 에서 경계작전을 하는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사무실에서 어떻게 판단하든 원해서 한 선택 이었기때문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2004년 쓰나미 이후 많은 구호단체 및 NGO가 스리랑카에 동부에 많이 상주해있으며 동부 연안 바티 깔로아 인근을 포함해서 세 곳에서 해비타트가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첫날 이 사무실에서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을 받았다 요즘 한국에서도 흔히 말하는 노가다 알바를 하려면 건설안전교육 이수를 받듯 해외에서도 인덕션이라고 불리는 현장 안전교육을 받아야 한다 현장 안전에 대한 주의사항 (6피트 이상 위로 올라가지 말 것) 외에 해비타트 만의 특성이 가미된 '현지인들에게 개인 기부 금지' 같은 주의사항들을 교육받았다 그 외 해비타트의 사업현황과 정책들을 소개받는데 놀랍게도 바티칼로아 해비타트 지부장님은 한국인의 일하는 스타일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우리에게 "한국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 줄 안다" 면서 "더운 날씨에 천천히 일해줄 것"을 당부했다 


첫번째 공사현장은 바티깔로아 읍내에서 칼무나이 방향으로 카탕구디라는 무슬림 마을을 지나면 나오는 '아르헴버기'라는 마을이었다 뚝뚝으로 12킬로미터 정도 거리. 오리엔테이션을 마치고 내일 우리가 투입될 현장에 대해서 직접 방문해보고 제일 중요한 식사 추진과 식수 보급에 대한 보급선 정리, 금보다 귀한 냉장된 콜라를 구매할 수 있는 냉장고가 있는 동네 슈퍼 위치 그리고 정확히  어떤 일을 어떻게 진행하게 될지 확인했다 내일 우리의 작업은 쌓아 올린 벽돌 위로 거푸집을 만들고 콘크리트를 타설 해서 벽돌을 하나로 단단하게 묶어 지붕을 올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새벽에 현지인들이 출근하기 전에 먼저 출근해서 거푸집을 만들 나무에 못을 뽑았다 그리고 목수들이 출근하고 나서 함께 거푸집을 만들었다 아침 일찍은 작업하는 곳이 응달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시원할 때 최대한 작업이 진행되길 바랬는데 스리랑카 스타일 아니랄까 봐 작업은 오후가 되어서야 거푸집이 완성되고 콘크리트를 비빌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은 손으로 비비는 것이 생소하지만 여기는 스리랑카. 기계로 비비는 콘크리트가 생소하다  온도는 30도 초반 정도밖에 안되는데 열대지방이 무서운 것이 바로 습도다 강한 직사광선과 80퍼센트에 육박하는 석호의 습도 또 그 태양을 받으면서 땀수건이 척척히 젖을 정도로 콘크리트를 비볐다 


생각해보면 첫날이 가장 힘에 부쳤다 오랜만에 하는 삽질인 데다가 평소에는 뜨거운 날씨에 밖에 나다니지도 않는데(용접교육은 대부분 그늘에서 한다) 밖에서 일을 했으니 나름 고된 하루였다 현지인 작업반장으로부터 콘크리트 타설이 다 끝나면 집으로 가도 좋다는 것을 아침에 허락받았는데 죽을힘을 다해 타설을 마친시각이 오후 네시 반이었다 이 사람들 한국사람을 너무 잘 안다 

 

둘째 날은 아침부터 비가 오고 하루 종일 비가 오락가락했었다 더구나 하도 땀을 많이 흘려서 몸에 전해질 불균형이 왔는지 몸이 손목시계를 못 찰 정도로 부었었다 둘째 날 주요 작업은 건물의 파운데이션(주춧돌)을 만들 자재를 나르는 작업이었다 스리랑카는 대부분의 벽돌이나 시멘트 블록을 손으로 만든다 배합비율이나 말리는 과정이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고른 품질관리가 어렵다 시멘트 블록이 흙과 직접 맞닿게 되면 몇 달 안에 블록은 부식되어 손으로도 부서지는 강도를 갖게 되고 이것이 파운데이션을 만드는 중요한 이유중에 하나가 된다


정확히 파운데이션은 집을 짓는 토대를 만드는 일이다 벽돌과 땅이 직접 맞닿지 않게 해 주면서 벽돌이 수평으로 쌓일 수 있도록 집의 기틀을 잡는 일이다 큰 돌과 시멘트를 섞어 벽돌이 올라갈 토대를 만드는 것이 주된 작업인데 문제는 여기가 스리랑카 동부 시골마을이며, 공사현장까지 큰 돌과 모래, 벽돌을 운반하는 차량이 접근하기에 길사 정이 매우 좋지 못했고, 대부분의 운반 차량은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자재를 그냥 부리고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무념 무상으로 하루 종일 모래와 돌을 날랐다 어쩌면 이런종류의 일이 우리와 잘 맞는일이고 필요한 일인지도 몰랐다 길가에서 공사현장까지 50미터쯤. 스리랑카 스타일로 자루를 활용해보기도 하고 바구니를 활용해 보기도 했는데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어쨌든 벽돌과 돌 모래를 나르고 3시경 일을 마쳤다 아침에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도 한번도 안 쉬고 일을 하니까 현장감독관이 걱정이 되었는지 나를 끌고 다음 현장을 미리 보여줬는데 아름다운 벽돌의 향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벽돌과 현장의 거리가 족히 백 미터 이상은 되어 보였다 평소에는 마른땅이라 차가 들어올 수 있는데 운명과도 같이 벽돌이 배달되는 그 순간 비가 많이 와서 차가 빠질까 봐 벽돌을 큰 길가에 그냥 부려놓고 그냥 갔다고 했고 운명과도 같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었다 인샬라 - 신의 뜻대로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퇴근길에 자재상을 들렀고 한국식으로 벽돌 지게를 만들었다 벽돌 지게를 만드는데 한국돈으로 이천 원정도 들었다 현지인들은 포대로 정리해서 나르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었는데 한국식으로 지게를 만들어서 한결 편해졌고 더 많이, 더 빨리, 더 편하게 나를 수 있었다 현지인들이 하는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는것들이 대부분이지만 우리에게는 또 우리만의 방식이 유용했기때문에 절충하기로 했다


처음하는 해비타트는 아침과 저녁을 직접 만들어 먹었는데 이것도 일이라면 일이었다 현지에서 조달가능한 재료로 메뉴를 짜고 현지식을 못먹는 사람 (특히 나)을 배려해줄 필요가 있었다 하루 이틀 해보면 루틴이 어느정도 고착화 된다 퇴근 하자 마자 대충 씻고 밥짓는사람, 봉사 장비 정리하고 씻는사람, 바로씻고 집안일하는 사람 알아서 잘들 했다 이정도 고통과 불편은 선택으로 이곳에 온사람들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못했다 스스로 원해서 선택한 사람들이 모인 그룹이었다 목표를 확실하게 설정하고 공유한다면  '더 잘하고 싶은' 고민들은 참가자 스스로 자연스럽게, 그리도 또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낭만을 찾아 코이카를 찾았든, 열대의 라군(lagoon)이 주는 낭만을 와서 이곳을 찾게 되었든 어쨌든 매일이 낭만적이었다 우리도 고된 일을 했으니 술을 마셔야 한다는 합리적인 이유와, 격일로 있었던 참가자의 생일과 저녁을 먹다 불현듯 찾아오는 정전, 그리고 랜턴과 색색의 플라스틱 컵으로 이루어진 낭만의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열대의 더위에 벽돌 나르느라 많이 지쳤는데 모여서 한잔 먹으면 또 그렇게 좋았다 이 낭만이 모이고 나아가 입소문이 났고 자이카 교류행사로 친해진 인맥을 원동력으로 규모가 커진 2차 해비타트의 원동력이 되었다 



나를 보고 군인 같다고 생각했는지 아이들은 내 앞에서 각개전투를 했다 내전의 참혹함을 책으로 접했기 때문에 과연 이런 놀이가 아이들의 정서함양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순간 생각이 들었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아이들과 딱히 해줄 수 있는 게 많이 없었다 각개전투라도 해준다면, 함께 바닥에 누워줄 수 있다면 내가 아는 신께서 늘 말씀하셨던 낮은 곳에 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 것만 같았다 더불어 소처럼 벽돌을 나르는 와중에도 아이들과 놀아줄 수 있다는 체력에 대해 부모님께 감사함을 느꼈다


몸으로 하는 노력봉사는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의 명확한 답을 준다 정확하게 쌓아 올린 벽돌의 높이만큼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정리된다 봉사하러 왔고 남을 도우러 왔는데 쌓아 올린 벽돌이 어마어마하다 나는 딱 그만큼의 행복을 만나고 임지로 돌아간다 휴가를 이렇게 꽉 채우기도 쉽지 않다 유형의 벽돌무더기와 무형의 충만함. 심지어 온몸 마디마디에 근육통마저 채워서 나는 임지로 돌아갔다





2015. 4월 바티칼로아 해비타트 전투 종료 기념


잊지 못할 이 순간을 기억하며 전우들과 함께


먼 훗날 돌아갈 스리랑카에서 내 땀이 배인 집을 손으로 다시 한번 만져볼 수 있기를


타인을 위한 봉사를 한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봉사를한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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