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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May 25. 2021

정들었던 갑상선을 떠나보내며 3


수술 다음날 아침의 시작은 피 뽑으러 온 간호사의 유쾌하지 못했던 모닝콜이었다. 피를 뽑는게 번거로울수 있다고 하지만 환자가 잠결이고, 더불어 뽑는사람이 기술적으로 잘 뽑으면 금방 다시 잠들 수 있을 만큼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이걸 스리랑카에 있을 때 앓았던 뎅기열 입원과정을 통해서 몸소 체득했기 때문에 그러려니 하고 팔을 내어 드렸다 불행하게도 이날 아침 내 팔뚝의 혈관들은 나도 간호사도 도와주지 않았고 대학을 졸업한지 오래 보이지 않는 간호사는 진땀을 흘리면서 당황했고 나는 그런 간호사를 응원했다.


채혈용 바늘 다섯 개 정도를 손등과 팔뚝 여기저기를 찔러서 겨우 피를 가져갔다 무슨 연유로 피검사를 하는지 따로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갑상선 커뮤니티에서 예습한 결과로 혈관 내 갑상선과 칼슘 수치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임을 짐작했다. 다행히 입술이 떨리거나 하지 않는걸 보니 부갑상선들이 기능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칼슘 약은 안 먹어도 되겠다.’라는 감사한 아침이었다. 피를 뽑아가는 분을 응원하다가 아침이 그만 너무 일찍 맑아져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공복에 먹으라고 내 인생 첫 신지로이드가 나왔다. 수술 다음날 부터 이미 떨어져버린 갑상선에 대한 미련을 지우는 마음가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는데 작고 노란 그 녀석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있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이 작은 녀석과 앞으로 평생 함께 해야 한다는 기분이 이상하다 ‘평생 함께’는 결혼식에서나 쓸 수 있는 말인줄 알았는데 일체의 프러포즈 같은 것도 없이 나는 지금 왼손에 신지를 오른손에 물 컵을 쥐고 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핸드폰으로 인생 첫 신지를 사진으로 남길까 하다가 얼핏 서글플 수도 있는 순간에 이런 재미난 고민을 하고 있는 내가 웃겨서 신지로이드 대신 내 셀카를 찍었다.


갑상선 절제 환자 누구나 그렇듯 매일 먹는 호르몬제가 나중에는 일주일에 한 알로 줄어든 다거나 혹은 한 달에 한 알로 줄어든 다거나 혹은 갑상선을 대체할 인공 갑상선이 개발되는 상상을 해봤을 줄로 안다. 미래는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거니까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신지를 매일 먹는 것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기로 했지만 그 작은 알약하나가 넘어가는 첫 목 넘김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다 생에 첫 갑상선 호르몬약은 그렇게 묵직하게 가슴에 와 닿았다


 수술 후에는 모든 어려운 것들에서 벗어날줄만 알았는데 배액관이 거슬렸다. 아침에 약을 나눠준 간호사는 운이 없으면 배액관을 매달고 퇴원 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집이 꽤나 멀리 떨어진 나는 이 주머니를 매달고 집까지 가는 길과, 체액 주머니들을 달고 이루어질 집에서의 생활, 또 다시 병원으로 돌아오는 그 길이 머릿속에 단번에 상상이 되었기에, 하루 이틀 더 입원을 하더라도 배액관을 꼭 빼고 집에 가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언제나 그렇듯 그런 것은 의사를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매뉴얼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아침 일곱 시 반쯤 수술 후 첫 외진을 갔다. 병상으로 회진이 올 줄 알았는데 내가 먼저 내려갔다. 수액팩 이랑 항생제 팩을 머리위로 매달고 가슴팍에 보무도 당당하게 배액관 두 개 매달고 외진을 가는데 엘리베이터 앞 거울에서 내 얼굴을 보고 웃음이 났다. 씻지도 못해서 퀭한 얼굴에 떡진머리, 주렁주렁 매달린 수액들과 배액관을 보면서 영락없는 환자 한명이 거울 속에 있었다 꾀죄죄한 모습이 웃기기도 참 웃겼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더니 병원이 환자를 잘만들었다 거울속에 있는 사람이 이제는 정말로 환자가 맞다


첫 진료는 별게 없었다. 교수도 아니고 처음 보는 의사였는데 의국에서 연륜이 좀 되는 듯 나이가 좀 있어보였다. 허리를 앞쪽으로 숙인 다음 고개를 세우고 쭉 내민 혓바닥을 의사가 거즈로 꽉 잡고  목구멍으로 내시경을 넣은 채 간단한 소리를 내어 성대가 살아있음을 확인했다. 너무도 간단하게 성대가 살아 있는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지만 혓바닥을 너무 세게 잡아서 혀가 아팠다. 조심스럽게 배액관이 어떻게 될지를 물었는데 액이 나오는 양을 보아하니 왼쪽은 오늘 저녁쯤 오른쪽은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간단한 검사를 마친 의사는 나에게 병실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지만 나는 젊은 의사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마지막 궁금증이 있었다.

 

“선생님 저 마지막으로 질문이 하나 있는데요.......”


“네 말씀하세요.”


 선생님께서 제 경우였어도 이렇게 바로 수술을 하셨을까요?”


“음.............. 그렇죠. 수술밖에는 방법이 없는 겁니다 잘하신 거예요”


어떤 위로와 안도를 찾으려고 질문했는지 스스로생각해도 참 웃긴 질문이었지만 '갑상선 수술하면 평생 약을 먹어야되느냐'는 질문만큼 바보같게 느껴졌다 이미 헤어져 버린 인연에 대해서 구질한 미련이 미련만큼 독이 되는것처럼 냉정하게 떨쳐내야만 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다


 아침 아홉시가 되자 다시 교수외진으로 내려갔는데 수술이 잘되었다는 간단한 말과 혓바닥 잡고 성대 내시경을 한 번 더 한 다음 양쪽 배액관을 다 빼버렸다 원래 나오는 양이 일정 양 이하로 내려가야 빼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교수님은 그냥 살살 빼버린 다음에 양쪽 구멍에 밴드 한 개 씩 붙여주었다 배액관은 생각보다 깊숙이 몸속에 들어 있었는데 오늘 배액관을 제거했기 때문에 샤워가 다음날로 미뤄진다고 했다. 나에게는 소중한 갑상선인데 이곳 모두에게는 단지 ‘누군가’의 갑상선일 뿐인 것 같았다 네일샵의 손톱과 이곳의 갑상선이 받는 취급이 크게 다르지 않다.

 

병실에 돌아와서 걱정해주시는 분들을 위해 물티슈로 얼굴을 대충 닦고 셀카를 보내드렸다 내가 굉장한 고민을 하고 있는 모습보다는 아무것도 아니고 씩씩하게 이겨내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데 연락을 받으신 분들도 내가 번거로울 걸 아셨는지 나 대신 엄마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주셔서 깊은 속내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점심을 먹고 오후에 성대 검사를 하러 음성검사실로 내려갔는데 검사해주신 선생님께서는 목소리는 잘나오는 편이라고 안심하라고 했지만 스스로 느끼는 불편함은 정도가 좀 높은 수준이었다. 고음과 큰 목소리가 아예 불가능했고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영화 '옹박'에 나온 휠체어를 탄 악당이 내는 저음 단음으로만 이루어진 목소리였다 우리말을 할 때, 특히나 궁금한 의문문 형태의 대화를 할 때 말의 마무리를 살짝 올리게 되는데 단음으로 쭉 뻗기만 하니까 의문형의 대화가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의도를 살짝 벗어나게 되는 것 같아 대화가 조금 조심스러워 졌다 목운동을 열심히 하면 빨리 돌아온다고 했기 때문에 대안이 없었다. 배액관을 빼고 나서는 일상에서 틈만 나면 계속 목운동을 하려고 노력했다

 

성대검사를 마치고 암환자를 위한 교육을 받으러 갔다 나랑 엄마 그리고 갑상선 수술을 앞두신 아주머니한분 이렇게 세 명이서 교육을 받았다 아무래도 나는 전 절제를 했으니까 퇴원 이후 할 확률이 높은 동위원소 치료에 관심을 두고 질문을 했고 아줌마는 특별한 질문 없이 교육을 받았던 것 같다 내용은 갑상선 수술이후 주의점이나 갑상선암에 대한 소개 같은 거였는데 인터넷 갑상선 커뮤니티에서 소개되는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다. 다만 교육장소가 암센터 였는데 ‘암’ 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가 확실히 다가온다. 같이 갑상선을 절제하더라도 암때문에 절제하는것과 그냥 절제하는것은 정말이지 큰 차이가 있는것 같다

 

별로 한 게 없는데 하루가 금세 지나가 버렸다 힘든 일을 할 때는 하루가 그렇게 길더니 사부작 사부작 놀게 되니까 하루가 흘러가는 감흥이 없다 여기까지 와버린것, 될대로 되라는 심정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저녁에는 면회가 안 되는데 친구가 와서 커피 한잔을 하고 갔고 또 다른 친구가 찾아와서 위로를 해주고 갔다 어차피 없는 갑상선에 깊은 고민을 하기 보다는 퇴원 이후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때인 것 같았다.


퇴원하는 마지막 날도 아침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서 약을 먹고 피검사를 한 다음 이른 아침 외래에 다녀왔다. 무난한 퇴원의견. 모두가 긴장한다는 퇴원 후 첫 외진은 일주일쯤 뒤인 23일로 잡혔다

이때 조직검사 결과를 통한 암 확진과 중증환자 등록을 해준다고 했다. 어차피 떨어진 갑상선인데 이제부터 정신을 바로차려 보험처리라도 확실히 해야지 싶었다

 

대학병원은 퇴원하는 데에도 절차와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점심시간을 넘길지도 모른다고 했다. 퇴원도 몇 군데 부서조율이 필요한 것 같았는데 열시 반쯤 간호사가 와서 퇴원해도 좋다고 가서 수납하면 된다고 안내해줬다 아침밥을 먹을 때 퇴원을 축하한다는 병원장 문구가 간단히 적힌 인쇄된 카드와 잘게 자른 몇 가지 과일을 컵에 담아 퇴원 축하식으로 줬다 이렇게 퇴원은 축하받아야 마땅한 일임에도 화장실 가기전과 후처럼 그토록 바랬던 퇴원이 지금은 큰 감흥이 없다 집인 포천까지 어떻게 갈 것인가를 두고 엄마와 잠시 고민을 했지만 그냥 택시를 타기로 했다 밖에는 비가 왔다


 퇴원 후 집에서의 생활은 별다를 게 없다 나이에 맞지 않게 모으는데 의미를 뒀던 비디오 게임을 하거나 역시 모으는데에 의미를 뒀던 책을 읽거나 가벼운 집안일을 했다 갑상선이 없는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수술 전과 똑같이 살 수 있을 것 인가?에 대한 고민을 했지만 이런 건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마음한구석 박스에 담아 잠시 넣어두기로 했다 수술 후 입맛을 순간 잃었는데 먹고 싶은 대로 다 먹었다가 감당 안될 만큼 불어날 체중이 걱정되기도 했고 수술 후에 잘 먹지 못해서 회복이 늦어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해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입맛은 삼일정도 뒤에 돌아왔다.


단지 갑상선 수술을 마쳤다는 우울한 감정이 나를 그렇게 만든 것 이라고 생각한다.


 첫 외진을 가기 전에 보험회사와 준비해야할 서류에 대해서 매듭지어야만 했고 신경쓸 일은 단지 그뿐이었다 집에서 정말 마음 편히 게임하면서 책 읽으면서 외진까지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첫 외진을 맞이했다. 서울까지 차를 끌고 갈까 하다가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탔다 아직 핸들이 부담스러웠는지도 모르겠다 2호선 전동차, 조금은 붐비는 그 전동차 안에서 ‘이제 장애인 노약자 석에 얼마간은 앉아도 되지 않을까’ 라는 귀여운 생각을 해봤다 신당역을 지날 때 전만큼 가슴이 답답해지거나 막연하지 않는다. 덤덤해지는 내가 조금은 대견스럽다. 6호선 안암역은 꽤나 역 바닥이 깊은 곳이다 심지어 병원쪽 출구에는 에스컬레이터도 없는 곳이기 때문에 잠시 망설이다가 살면서 처음으로 노약자용 승강기를 타봤다 함께 타신 분들이 눈치를 주면 어떡하나 잠시 고민했었는데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나의 존재란 세상에서 그런 것 이었다 다가오는 운명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게 안명(安命)이라면 어떻게든 좋게 생각하는게 자본주의사회를 사는 사람의 정신건강을 위해 이롭다는 생각을 해봤다 슬프고 힘들더라도 이로워야했고 이득을 봐야 했다


외진은 너무나도 무난했다 수술은 잘되었고 전이도 없었고 앞으로 수술을 집도한 이비인후과 의사와는 외진을 실시할 일이 없을 거라고 했다 앞으로 나는 내분비 내과 환자가 되는 거였다 수술한 양쪽 모두 암이라는 진단서 한 장과 중증환자 등록하시라고 서류 한 장을 줬고 간호사가 밖에서 보험 청구에 필요한 서류를 다시 한 번 정리해줬다. 그리고는 갑상선 수치를 관리하는 다른 교수님에게 진료를 했는데 예후가 좋아 동위원소 치료는 불필요 하다고 했다.


갑상선 수치가 낮아 복용할 호르몬제 용량을 늘렸고 다음달 14일에 혈액검사를 21일에 수치에 따른 외진을 하기로 했다. 친구 졸업식이 19일 토론토에서 있어서 쉬는 김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물 건너갔다. 쉬는 동안 토론토 낚시를 검색하면서 힘을 냈는데 아쉽게 되었다.


수납을 하면서 중증등록을 하고 진료비를 환급받은 다음 병원 앞 약국에서 약을 받는데 칼슘약이랑 신지로이드 한 뭉텅이가 천 백 원이었다. 약국 수납창구에서 중증 등록 한 거 맞으시냐고 물었고 그 순간 문자로 한정특례 선정 문자가 왔는데 기분이 묘했다 약값을 적게 내면 감사해야 하는데 꼭 감사한 마음이 안 드는 그런 기분. 당연히 감사해야했는데 감사하지가 않았다.


백수의 진단서에는 얼마간의 근로능력이 제한되는지 얼마간의 병가가 요구되는지 적혀있지 않고 적을 필요도 없기 때문에 무척이나 심플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찬찬히 다시 읽어봤는데 ‘얼마간의 근로능력 제한’이 명시되지 않는 소견서가 주는 의미에 대해서 - 의사와 내가 서로 번거롭지 않아서 좋다는 생각과 내가 사회로 돌아가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더욱 막연해지는 것 같아서 더 막연해지는건 아닌지 생각을 해봤다


집에서의 일상은 무료하다 아침을 먹고 쉬다가 잠을 자고 점심을 먹고 쉬다가 책을 보거나 낚시를 갔다 가평으로 철원으로 임진강으로 낚시를 다녔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물고기에 대해서 마치 물고기가 인생의 답이라도 되는 양 물고기를 잡아야만 되는 사람처럼 물고기를 쫒아 다녔다 잘 잡지 못하게 되니까 더 잡고 싶어졌고 못 잡을 때의 아쉬움이 더 커졌다 그나마 다행인건 물고기는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물어보고 조언을 구할 사람이 주위에 너무나도 많이 존재한다는 거였다. 내 인생과 다르게


실수를 하고 또 그 실수를 고치고 그러면서 커가는 거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리고 내 인생도 그렇게 되기를 바랐다. 외진 후 며칠 뒤 친척 동생의 결혼식이 서울 남쪽에서 있었는데 장거리 운전으로 다녀왔고 운전한 다음날 크기가 커져버린 거위의 집을 만든다고 무리를 했더니 저녁을 먹을 때 목구멍이 죄어드는 느낌이 났다 목 넘김도 굉장히 불편한 기분이었다. 급하게 동네 큰 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수술한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한밤중에 서울병원 응급실에 갔지만 기도가 약간 부었을 뿐 특별한 응급상황은 아니라고 했다 퇴원 후 목소리가 돌아오지 않는 것을 빼면 큰 불편함이 없었기 때문에 목운동에 대해 방심했던 것은 아닌지 후회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연락 오는 지인들에게 일일이 병과에 대해 설명하는 것에 대해  지쳐갈쯤 SNS에 수술 후에 찍은 셀카를 올림으로서 나의 수술 사실을 한 번에 그리고 만방에 알렸다. 수많은 위로가 도움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더 막연함을 줄때도 있었다. ‘언제 낫느냐? 언제 정상(사회)으로 돌아오느냐?’는 질문이었는데 진단서에도 없고 의사도 언급 한 적이 없으므로 나도 대답하기 어려웠다. 인터넷에 누구는 한 달을 쉬었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구는 두 달을 쉬었다고도 했다 거울 앞에서 스스로 바라보는 흉터는 그냥 절개를 했고 봉합을 한 외과 환자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원래부터 갑상선은 보이지 않았고 지금도 있는지 없는지 눈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흉터가 말끔히 사라져 버린다면 내가 다시금 이 순간을 기억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다

 

수술 후 보름쯤 뒤에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는 대부분 이별의 이유를 찾거나 묻는데 익숙해져 있지만 관계가 의미하는 것과 결별이 의미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둘이서 만나서 연인이 되듯 둘중에 하나만 변해도 틀어지는게 인연이었다 잡는다고 잡아지는 것도 아니고 미련에 엉엉 운다고 돌아선 마음이 돌아서는 것도 아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내 갑상선처럼


나는 이로서 갑상선 암을 통해 실직과 이별, 건강의 3관왕을 한 번에 해낸 사람이 되었다 암에 걸린 30대 백수는 내가 생각해도 매력적인 이성이 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할 수밖에 없었던 거다. 한 친구는 이제 더 이상 나빠질 일이 없다며 좋은 일만 생길 것이라고 위로했고 많은 사람들이 좋은 말들을 해줬지만 거울 속 목 언저리에 난 상처를 보고 깨닫는다.  나이를 먹으니 상처가 쉽게 아물지 않는다.


 쉬는 김에 확실히 쉬고 무언가 성취한다는 성취의 기쁨을 만나기 위해 모터보트 운전면허랑 누구나 조금만 노력하면 손에 쥘 수 있다는 대형운전면허를 공부하고 인생에 도움이 되는 것과 별개로 당장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마음가짐으로 몇 개의 자격증에 대해서 공부했다.  대전에서 포천 집까지 스리랑카에서 함께한 선배가 병문안을 와줬는데 까미노 순례길에 대해서 그리고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주위 인연을 정리하는 법에 대해서 조언을 해주고 갔다. 이렇게 내가 어려운데 따듯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는 사람과 같이, 그리고 오래 함께 같은 길을 갈 필요가 없는 것 이었다. 인생의 울타리가 이렇게 좁아들지만 울타리 안이 더욱 견고해지는 계기가 되라는 충고가 가슴에 와 닿았다.


제주도에 광어도 잡으러 가고 싶고 블라디보스톡에  게도 먹으러 가고 싶다 네팔 안나푸르나도 다시 가고싶고 까미노 순례길도 가고 싶어졌다. 30대 백수 암환자지만 주머니에 돈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사는게 정말 별게 없는데 스스로 뭔가 아는 양 나름 부지런히 살아왔던 그동안의 시간이 참 재미있다 아직은 추억을 되돌리면서 사는 나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에 잠기는 시간이 많아서 일까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오늘이 행복해야 내일도 행복할 수 있는 거고, 만원으로 행복하게 놀 수 있어야 십 만원으로 행복하게 놀 수 있는 거다. 다시금 삶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두 행복하시길!


자 나도 여러분도 모두 건투를 빈다. 인생이 뭐 있던가. 모쪼록 암과의 인연은 이생에 여기까지이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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