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31
처음 8월 해비타트를 준비한 건 6월 말쯤이었다 이미 스리랑카 해비타트 사무소와는 지난 4월 해비타트 활동으로 서로가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4월에 헤어지면서 한 달 전쯤에 미리 준비를 하면 서로 행사를 진행하는데 매끄럽지 않겠느냐는 의견을 확인하고 다음 행사를 미리 염두에 두고 헤어졌던 터라 큰 걱정없이조금 일찍 준비를 시작했다
아쉽게도 4월 해비타트 역전의 용사들 중에는 이미 귀국했거나 귀국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주축이었던 나를 비롯한 바티칼로아 식구들이 있었기 때문에 7월 무렵의 준비단계는 큰 어려움 없이 잘 진행되었다 전보다 참가자 수가 곱절 이상이 늘어난 만큼 구체적인 계획들이 명확해야 했고 보다 체계적이어야만 했다
자이카와의 활동 공유회에서 쌓인 신뢰와 친목을 바탕으로 자이카 친구들도 스리랑카의 반대쪽인 골과 콜롬보를 포함해서 여섯 명이 참가신청을 했고 논의끝에 나는 이들의 참가비를 할인해주기로 결정했다 당시 코이카 생활비는 한 달에 주거비 빼고 500불을 받았는데 자이카 단원은 275불을 받았다 받은 만큼 낸다 "생활비 비례형 참가비"제도는 코이카 단원들과 자이카 단원 모두의 호응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교민 참가자 중에 한국에서 사업을 하시는 부모님을 둔 고등학생이 있었는데 코이카랑 같은 참가비를 냈다 나이는 고등학생이었지만 용돈이 코이카 단원보다 많았고 무엇보다 해비타트를 마치고 받게 되는 봉사활동 확인서가 이 친구 진로에 큰 도움이 되지 싶었다
4월 1회전의 낭만은 코이카 단원들에게 입소문이 났고 자이카와 교민까지 참가한다는 스케일에 '님도 보고 봉사도 해보자'는 판이 깔렸다 뭐라도 좋았다 봉사활동하러 와서 님을 만나는 것은 옵션이었으므로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 입장에서 호재가 분명했다 옵션은 본인이 행사하기 나름. 천천히 스리랑카 드림팀이 준비되었다
에초에 해비타트 활동에 앞서 코이카 단원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인 기능대학 방학시즌을 고려했기 때문에 4월과 8월 방학을 활용하기로 한 것인데 기관 학사일정은 "원래" 8월 15일부터 30일까지가 방학이었고 기관 활동에 영향을 주지 않는 24일부터 28일까지, 해비타트 현지 사무소와 논의를 할 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해비타트는 너무나도 무난했기 때문에 긴장에 끈 같은 것은 아예 생각지도 않았다 우리는 봉사를 하러 한국과 일본에서 온 사람 들이고 나름 업계의 프로를 자처했으며 국가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프로의 세계는 봉사 역시 남다르다 뭐 그렇게 될 줄만 알았다
첫 번째 파도 - 스리랑카 총선으로 인한 학사일정 변경
지난 5월 콜롬보에서 대한민국 대사배 태권도 대회를 하면서 의회가 해산되어 스리랑카 총선이 예측되었지만 그 시기가 8월 17일이 될 줄은 몰랐다 당시 스리랑카 코이카 단원들은 급변하는 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임지 대기를 실시했으며 총선 일정이 변경됨에 따라서 방학이 한주 앞당겨졌다 (15일부터 29일 -> 8일부터 22일) 애초에 코이카 사무소에 이번 해비타트 활동을 개인 휴가를 사용하지 않는 공무 처리 요청을 하게 되는 가장 큰 근거가 "단원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범위" 였기 때문에 방학이 변경된 지금 해비타트 일정을 변경하던지 꼼작 없이 개인 휴가를 사용해서 이번 해비타트 봉사활동을 참가해야 했다 총선 이전은 평상시보다 불안한 정국으로, 총선 직후는 바티칼로아 힌두 지역행사로 일정조절의 변수를 잃었다 또한 12월 방학은 스리랑카의 기나긴 우기 시즌으로 작업이 어렵기 때문에 날짜는 이번 24일부터 28일까지로 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엎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개인 휴가로 강행해야 하는 것인지를 두고 행사를 준비한 사람으로서 큰 고민을 했지만 모두의 깊은 고민 끝에 우리는 그냥 이번에도 개인 휴가처리로 진행하기로 했다 해비타트 하러 스리랑카에 온 것은 아니지만 하기로 한 해비타트를 엎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첫 번째 파도를 함께 넘었다
두 번째 파도 - 정말 소소한 휴가 문제
이번에 참가신청을 한 신규단원들 몇명이 스리랑카 파견기간이 6개월이 안되어 국내 휴가를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국내 휴가 규정이 해외사무소마다 다르고 사무소장의 재량권이 존재한다) 이 정도 문제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분과 연락 가능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비교적(?) 작은 파도를 잘 헤쳐 넘었다. 코이카는 휴가에 대한 규정이 좀 까다로운 편이고 제약이 많지만 자이카는 그냥 현지 코디네이터에게 해비타트 하러 간다고 하고 전화 보고하고 해비타트 참가했다. 반면 코이카는 기관장 허가서 및 본인 휴가 공문등 이래저래 준비할 일이 많았다 공적인 일로 진행하는 휴가인데도 절차는 쉽지 않았다
세 번째 파도- 이제부터 바티칼로아
행사 시작 삼일전 타타(대우자동차의 그 타타)에서 만든 조그만 트럭을 빌려서 연장을 싹 다 챙긴 다음 베이스캠프인 바티칼로아 시니어 선생님 댁으로 올라갔는데 짐을 풀고 있는 중 부재중 문자가 와있는 걸 봤다. 해비타트 사무실이었는데 어차피 짐 풀고 바로 현장 보기로 했으니까 사무소에 연락하기보다 짐을 빨리 풀어야지 하는 순간 문자가 하나 더왔다 "급한일이 생겼으니 빨리 이메일을 확인하라" - 짐 풀다 말고 해비타트 사무실로 가면서 이메일을을 확인했는데 원래 공사하기로 했던 '아이양가니'라는 마을의 두 집주인이 우리의 도움을 거절한다면서 우리 보고 세 시간 거리의 트린코말리로 이동이 가능한지 묻는 이메일이었다 미팅을 하게 되니 참 재미있는 상황이었다 이번 행사는 코이카 자이카 그리고 교민까지 함께하는 행사에다가 운송수단 및 숙소가 이미 준비가 되어있는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게 되면 모두가 곤란할 수 있다고 찬찬히 설명했다 한편으로는 트린코말리 단원에게 급하게 연락해서 숙소를 타진했는데 워낙 트린코말리가 관광 시즌이기 때문에 숙소는 매우 비쌀 것으로 예상되었고 이래저래 암파라에서 바티칼로아로 차를 빌려 연장까지 준비해온 나에게는 진퇴양난이었다 그나마 재미있는 것은 멀리서 오는 자이카나 코이카 단원들은 어차피 오랜 시간 버스를 타고이미 이동했기 때문인지 준비팀을 응원해주기 위해서였는지 바티칼로아나 트린코말리나 상관없다면서 긍정의 에너지로 행사 준비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런데 이 두 집주인이 우리의 도움을 거절한 이유가 재미있었다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듣고 온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외국인들이 봉사현장을 사진 촬영하고 이것을 인터넷에 올려서 돈벌이에 사용한다는 이상한 소문이 바티칼로아에 돌고 있었고 그럴 바에 그냥 차라리 도움을 거절하겠다면서 집주인들이 해비타트 사무실에 직접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해비타트 담당자 역시 해비타트를 하면서 처음 생긴 이 일에 당황을 했고 그래서 우리에게 트린코로 가거나 행사를 엎자고 제한했던 것이었다 담당자에게 행사를 준비하는 나의 어려움이나 우리가 무엇을 하러 이곳에 왔는지 상황과 신분을 차근차근 설명했다 2년의 봉사활동을 하는 와중에 개인 휴가를 봉사활동에 소진하는 열정을 이해해준 해비타트 담당자 푸시 바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우리를 이해한 그는 직접 자기가 현장이 될만한 집들을 급하게 섭외했고 우리가 투입해서 일할수 있도록 공사일정을 조절하여 자재 수급을 도와줬다 그래서 엎기로 한 바티칼로아가 살아났고 다시 우리는 다시 희망을 가지고 바티칼로아를 준비할 수 있었다
세 번째 파도를 넘고 현장답사를 실시했다 바티칼로아 공항 근처 비치칼무나이 마을이었는데 1회차와 마찬가지로 식사 추진장소와 루트, 냉장고 보유 인근 구멍가게 위치확인을 했고 참가자가 늘어난 만큼 현장 배분을 효율적으로해야 했으며 여기서 님도 볼 수 있고 봉사도 할 수 있는 인원 배치의 정수가 녹아들어야만 했다(누군가에게는 옵션행사가 메인보다 중요할수 있었고 양국간의 막후에서 사전 로비도 있었다) 인원 배치까지 마치면 대절한 버스회사 사장에게 위치 설명까지 마침으로서 투입 준비를 마쳤다 사람도 많고 현장도 많아서 일정상 다섯 군데의 현장이 한 번에 돌아갈 때도 있었다
부지런히 파도를 넘었기 때문에 여유가 있는 줄 알았다 그래서 숙소로 사용하게 된 시니어 선생님 댁 근처 바다에서 잠깐 짬을 내서 낚시를 했다 걸어서 3분 거리에 이런 라군 포인트가 있는데 새우 미끼로도 잘 잡히고 오징어로 해도 잘 잡혔다 선생님은 맨날 퇴근하면 여기에 낚싯대를 던져놓고 게를 잡거나 물고기를 잡아서 해물 된장찌개를 끓여 드신다고 했다 손맛도 보고 별미도 먹고 이래저래 앞으로 남은 파도는 생각지도 못한 채 해물 된장찌개를 기대하면서 잠깐의 낚시를 즐겼던 것 같다
네 번째 파도 - 생각지도 못한 파도가 원래 더 크고 무서운 것
낮에 나를 쥐고 흔들었던 미팅과 답사를 마치고 아름다운 마무리의 낚시까지 마치고선 이제 집에서 본격적으로 짐을 편성하려고 는 순간이었는데 시니어 선생님이 살고 있는 집 집주인이 찾아왔다 그리고 잠시 시니어 선생님과 면담을 하더니 이내 충격적인 발언이 이어졌다 "너희들이 스무 명 정도가 온다고 들었다 요새 바티칼로아의 호텔 가격은 최소 하룻밤 3000 루피다 우리 집은 그냥 한 사람당 하룻밤에 500루피만 받겠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아직 당시의 감정을 정리하기 쉽지 않다. 이미 1년 치 임대차 계약이 끝나고 그 대금지급마저 끝난 집에 손님이 왔다고 추가 요금을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아예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한두 명도 아니고 스무 명 정도의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멀리 사는 집주인에게 조금의 혼잡스러움이 있을 테니까 일주일에 행사기간에 대해 다만 얼마간이라도 지불할 의사가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숙박업소처럼 지불하게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트린코말리가 아닌 바티칼로아로 봉사지를 정한 큰 이유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숙소 때문이었다 시니어 선생님 댁은 화장실도 두 개에 방도 넓어서 스무 명까지는 무리더라도 기존 바티칼로아 단원 숙소를 활용한다면 단체가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집주인이 터무니없는 요구를 한다 한 달에 집세로 2만 루피 내외를 내고 있는데 집주인은 이번 행사로만 5만 루피 이상을 요구했다 스리랑카 공무원 한 달 월급이 2만 루피가 채 안된다 아무래도 이 행사를 통해 한몫 단단히 잡으려는 심산이 눈에 보인다
정확히 '너희들이 지금 이 집 아니면 어디서 숙소를 구할 수 있겠는가' 라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던 것 같다 외국에서 영어 못하고 현지어 못하면 결국은 만나는 인간관계가 좁아지고 대안 없는 선택을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집주인은 나를 한참 잘못 이해했다 우리의 상황에 대해서 (봉사 중에 또 다른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점)과 스리랑카에서 싱할러 인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진행하지 않고 소외받는 동부지역 타밀 사람들을 도우러 왔는데, 같은 타밀 사람인 당신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감정 어린 호소도 통하지 않았다 되려 자기들이야말로 차와 넓은 집이 있지만 은행에 부채가 많은 사람이기 때문에 불쌍한 사람이니까 자신을 도와 달라고 했다
집한구석 전에 살고 간 미국인 선교사 부부 사진이 영정사진처럼 걸려있는데 미국으로 돌아 갈 때 티브이와 세탁기를 주고 갔다고 했다 그 미국인 선교사들이 어떤 생각에서 세탁기와 티브이를 두고 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의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기서 가장 큰 문제는 원래 집에 살고 계시던 시니어 선생님의 입장이었다 우리야 현지인들과 트러블이 있어도 해비타트 종료 후 임지로 복귀하면 그만이지만 남은 사람에게는 일상생활이 바뀌게 되는 큰 변화임에 틀림이 없다 집주인 가족들은 시니어 선생님을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가족같이 대했다고 하셨는데 마음을 이만저만 상하신 게 아니다 현지인과 엄마 아빠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친하게 지내도 결국 돈이 오고 가야 할 때는 할아버지고 엄마 아빠고 없이 당신은 그냥 외국인인 점을 잊지 말길 바란다 이틀 밤을 술로 지내고 방법을(현지인과의 관계에 대한 생각) 생각해보았지만 뾰족한 수가 없다 섣부른 참견이 관계를 더 악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머물지 않을 것이라면 빨리 이동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암파라 학교 기관장의 도움을 얻어 봉사현장 근처 지역 무슬림 사회복지시설 비슷한 곳에 숙소를 정했다
숙소를 옮기고 나니 차라리 더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룻밤 300루피라는 저렴한 가격부터 샤워장, 세면장도 넓고 더욱이 식사 가격과 조건도 좋았다 군대의 막사 같기도 했다 따로 떨어진 한적한 공간에 한 번에 다 같이 잠들 수 있었다 이게 모두 다 그나마 차량을 안정으로 미리 섭외했기 때문에 숙소가 변경되어도 무리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안도할 수 있었던 바탕이라고 생각한다
다섯 번째 파도 - 큰파도 뒤에 항상 따라오는 작은파도
숙소에 짐을 풀고 청소가 되기를 기다리는 순간 차량을 예약해주기로 했던 현지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한 시간 반 거리 쌈만뚜라이에 사는 사람인데 바티칼로아로 직접 찾아올 정도면 일이 틀어진 것이 틀림없다 점심도 못 먹고 함께 길을 나섰다 내용인즉슨 차량 섭외가 되었던 회사 측에서 우리가 외국인인 것을 알고 사전에 협의된 금액인 하루 5천 루피에 못해주고 추가 금액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친구인 바티칼로아 지역 경찰서장을 만나러 가서 조언을 구하기로 했다 워낙에 시작 전부터 여러 파도가 왔기 때문에 참가자들에게는 사기를 위해 별도로 말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버스문제 확인한다고만 하고 나와서 상담을 시작했는데 되려 트랙터에 매달린 화물용 추레라가 운송료가 높았다 경찰서장에게 긴긴 하소연 끝에 일정이 맞는 병원 출퇴근 통근버스를 구했고 이렇게 다섯 번째 파도도 넘길 수 있었다
모이게 된 동기도 참 재미있다 코이카 봉사단 자이카 봉사단 한인회 학생까지 우리는 참 여러 곳에서 다른 삶을 살다가 2015년 8월 바티칼로아에서 만났다 다른 사람들처럼 만나고 헤어지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만나서 함께 뜨거운 땀을 나누었기에 우리는 다른 인연보다 조금 더 진하다 무엇보다 퇴근하는 버스에서부터 냄새가 너무 심하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근육통을 달랜다는 핑계로 맥주와 아락을 마셨는데 여자단원들이 함께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시간을 건의했다 결론은 오이를 잘라서 얼굴에 오이마사지를 다 같이했는데 처음에 내가 붙여 주다가 못 잘못붙인다고 구박받고 결국 전문단원이 붙여줬다 코이카는 공식 파견 단원 직종에 '미용' 단원이 존재하고 자이카와의 교류는 주말에 수도 유숙소에 모여 서로 머리를 하거나 손톱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골에서 축구를 가르치는 준페이의 가장 큰 매력은 홍콩 누아르나 일본 야쿠자를 연상시키는 얼굴에서 영구 같은 행동이 나온다는 것, 마지막 날 아껴둔 회비 총출동해서 피자 치킨 맥주 신나게 먹었던 것 같은데 나는 일주일 피로가 한 번에 몰려오는 관계로 열시도 안되어서 일찍 잠들어버렸다
해비타트를 하면서 시원한 콜라만큼 매력적인 음료가 없다는 걸 다시금 깨달았다 지치고 목마를 때 콜라만큼 한 번에 청량감과 포만감에 젖게 해주는 음료가 없지 싶다 특히 스리랑카 여름의 해비타트 행사를 진행하면서 소소한 파도들이 몇 개 있었지만 서핑의 명소 스리랑카 답게 또 코카콜라 한잔 마시면서 멋지게 넘었다
스리랑카 현지인에게 콜라를 얻어먹는 것은 엄청 특별한 경험이다 하루 임금이 천 루피(우리 돈 팔천 원)가 안되고 한 달 월급이 2만 루피(우리 돈 16만 원 정도)가 안 되는 사람이 태반인 시골마을에서 한 병에 200루피(1600원) 짜리 콜라가 지니는 의미가 어떠한 것인지 스리랑카에서 살아본 사람은 안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박살 나는 땀방울을 서로 마주 보면서 살짝 피로감을 느낄 때 현지인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돈을 꺼내 손주에게 심부름시키는 그 시원한 콜라는 어쩌면 내가 이 뜨거운 적도의 복판에서 고통을 찾아 헤매에게 만드는 이유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봤다 콜라 먹고 눈물이 맺혔는데 땀 때문에 안 걸렸다 대장의 눈물은 끝까지 걸릴 수 없었다
행사 시작 전 북한의 로켓포 도발이 있었는데 이것을 두고 여섯 번째 파도로 인식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하다가 내가 할 수 없는 일은 과감히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여기 있는 나를 믿듯, 여기 있는 나도 한국을 믿었다
마지막 날 건배를 하면서 다들.. 멋진 우리의 8월 기억을 나눴다 행사 초반 힘들다던 단원들도, 오기는 왔는데 오게 된 이유를 잘 모르겠다던 단원들도 모두 제각각 해비타트의 의미를 찾은 것 같아서 행사를 준비한 사람으로서 큰 보람을 느낀다 기쁨은 나누면 크다는데 스무 명이 나누게 되니까 너무나도 기분이 좋은 것 같다
금요일 오후에 행사를 마치고 근처 등대에 가서 땀에 절은 몸을 담갔다 사진 속 자이카 친구들은 말이 백 퍼센트 통하지 않았음에도 행사의 취지를 이해하고 잘 따라와 준 형제 같은 사람들이다 모두 고생이 많았다
행사를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다 자이카 두 명 후배 단원 세명과 암파라로 내려와서 고기 구워 먹고 쉬다가 일요일 밤이나 되어야 나 혼자만 남고 모두 헤어졌다 월요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목에서 더욱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활력 절반. 힘들어서 지치는 피곤한 마음 절반 그보다 더 채워지는 충만함 가득을 느꼈다
잊을 수 없는 2015년 8월 바티칼로아. 친구들이여 모두 평안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