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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Jun 12. 2021

포카라 잠시만 안녕1

2020.04.24


포카라에 홍텔이라는 게스트하우스를 오픈하고 어느덧 자리가 잡혀가고 있었다.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입소문은 찾아왔고 블로그와 여행기에 등장하는 "홍텔"이라는 글자에 감사하고 행복한 날들이 분명했다. 매주 성당에 가고 상추를 키워 음식점에 배달했다 페와호에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낮잠을 자며 설산으로 오토바이를 끌고 히말라야 산바람으로 콧바람을 채워 넣었다 집에 찾아와준 길거리 강아지 아이샤가 덩치가 많이 커져서 이제 어른 개가 되었다

 

네팔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또 크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순응" 이나 "섭리" 같이 물 흐르는 삶에 대해서 하루하루가 감사한 하루였다. 일요일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미사를 하면 오후 네 시 반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빛나는 햇살이 주일을 잊지 않고 찾아온 나에게 주시는 신의 광채이기도 또 나의 삶에 축복인 것 같기도 했었다.


네팔에 찾아오시는 분들은 간혹 방송을 보고 또 입소문으로 꼭 우리 집에 묵지 않아도 여행용 가방 한가득 헌 옷을 가져다줬다 학용품도 많았고 드물게 힘내라면서 소주도 몇 병 들어있었다. 오토바이 한가득 헌 옷을 싣고 제로 킬로미터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는 설산으로 향하는 그 넓은 길이 지금 이 순간 너무나도 사무치게 그립다


처음 코로나가 발병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깊은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언론이 늘 해오던 과대포장인 것만 같았고 사스나 메르스가 그러하였듯 시간이 지나면 그 혼돈이 쉽게 가라앉고 금방 일상으로 다시 돌아갈 것만 같았다 포카라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한인 업체 사우지(사장)들끼리 한 잔씩 기울이는 저녁 자리에서도 코로나는 큰 안줏거리는 아니었으며 아쉽지만, 이번 봄 장사는 어렵게 되었으니 비수기 여름을 잘 대비해서 가을을 준비하자는 중론 같은 게 있었다. 중국에서의 확진자가 늘어나고 이어서 한국에서 확진자가 늘어남에 따라 2월 3월 예약들이 줄줄이 취소되었다. 누구를 원망할 수도 없는 취소이기에 다음 기회에 꼭 만나길 바란다는 기약 없는 말로 그렇게 예약취소를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사업주로서도 코로나가 큰 문제지만 여행자로서도 코로나는 큰 문제였다. 세계여행이라는 약방에서 감초였던 포카라에 묶인 여행객들 역시 이후 행보에 대해서 고민하고 결심해야만 했다. 한국으로의 귀국, 인도를 포함한 주변국으로 이동, 이집트로의 이동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인생에서의 모든 선택이 이후에 일어날 미지수에 대한 예측이라지만 특히 코로나가 온 이후에 선택은 이전과 달리 더욱더 깊은 고민을 요구했다. 어쩌면 목숨이 달린 선택이 될수도 있었다. 포카라에 묶인, 정확히 다음 행보를 고민하는 손님들을 데리고 성당 상추밭에 가서 돌을 고르고 고랑을 만들었다. 


대학교 봉사팀이 와서 함께 토대를 이룬 상추밭이었고 이후 오기로 한 고등학교 봉사단이 코로나를 이유로 오지 못하게 되었다 밭의 크기가 텃밭의 수준은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일손이 많이 필요한 일이었다 고민하는 손님들을 데리고 매일 밭일을 하거나 손님들을 위해 밥을 해줬다. 어차피 큰돈 벌자고 포카라에 사는 것이 아니기도 했고 고민하는 이들에게 이 정도 도움은 게스트하우스 사우지(사장)로의 도의적인 책임 같은 것이라고 느꼈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남을 돕는 선의 아래 익숙지 않은 밭일을 즐기는 서울 출신 여행객들에게 너무 고마웠다.

 

네팔 정부에서는 여행객들에게 많은 신호를 줬다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코로나가 유행한 8개국 대상으로 입국할 때 코로나에 걸리지 않았다는 증명서를 요구했고 그러다가 도착비자 발급을 중단했으며 전 국가 대상으로 그 범위를 확대했다. 한국어로는 봉쇄인 락다운(Lock-down)을 시작하기까지 첫 신호로부터 채 3주가 걸리지 않았다 마지막 손님 중의 하나였던 세계여행 커플이 봉쇄 직전에 한국으로 떠났고 드디어 네팔에도 봉쇄가 찾아왔다. 우리가 네팔로 여행을 떠나는 이유와 정확히 같은 정도로 네팔은 한국과 다르다. 히말라야에는 장엄한 설산이 펼쳐지지만 산 아래 사람들은 장엄하게 솟아난 봉우리 만큼이나 깊게 가난하고 궁핍하다. 의료시스템이라고 불릴 만한 것들이 네팔에는 또 포카라 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봉쇄 직전 중고 주스기계를 사러 간 자리에서 판매자는 WHO 지역 사무소 의사였고 주스기계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도 없이 나는 포카라 그리고 네팔 대책에 관해 물었으며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그는 어디에선가 계속 전화가 왔다. 그는 가진 것이 없는 나라에서는 면역에 모든 것을 걸어야만 한다고 했다.

 

나 역시 판단의 기로가 왔음이 분명했다 정확히 판단의 갈림길에 몰리게 되었다. 2년 전 갑상샘암 수술 이후 매일 약을 먹어야 했는데 남은 약이 얼마 되지 않았다. 인생사 새옹지마 그마저도 작년 9월 오진으로 한국에 가서 검사를 받을 때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두 달 치 약을 미리 더 받아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네팔 병원에 연락해서 호르몬제를 문의하고 구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들에게 갑상샘암은 질병이 아니었다. 애초에 갑상샘을 제거하는 경우가 손에 꼽는다고 했다. 인터넷 검색창에 약을 먹지 않으면 얼마 만에 죽는지 검색도 해보고 두 알 먹던 약을 하루에 한 알로 줄여서 기간을 늘려볼까 고민도 해보았다 한국에 가지 않고 포카라에서 버티는 카드들의 대안들이 하나같이 나에겐 너무 치명적인 것들뿐이다. 한국으로 가야 한다.


그렇게 결정했다.


귀국을 결정하고 가장 큰 걱정은 소리내어 말하지 않을 주변의 시선이었다 네팔에 와서 빈민가 사람들과 가족처럼 지내면서 또 그만큼 가까이 지낸다고 했으면서 코로나로 네팔이 어려워지니까 네팔을 바로 떠나게 되는 이방인의 태생적 한계에 상황이 너무나도 맞게 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포카라에 일곱 개의 한인업체 중에 귀국을 결정한 것은 나와 수녀님 둘뿐이었다. 고령자와 기저 질환자라는 사유가 비겁해 보일까 두려웠다. 커다란 덩치에 커다란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고 큰 목소리로 사람들을 대하면서도 코로나가 오니까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람. 소리내어 말하는 평판보다 스스로 비겁자가 되는 것만 같아 가슴이 쓰렸다.


암수술 경력자로서 나는 1년에 한번 추적검사를 해야 했고 무엇보다 약이 떨어져 가고 있었다. 줄어드는 약통을 보면서 아침마다 피가 말리는 순간을 겪었다. 수녀님 역시 오랜 지병으로 병원에 가는걸 더 이상 미루기가 어려운 순간이 오게 되었다. 무엇보다 부모님에게서 오는 안부 연락이 남아야 한다는 저울에 남은 깃털 같던 작은 추마저 날려버렸다. 매일같이 한국에서는 확진자를 발표하고 상황의 심각성을 뉴스로 내보내고 있었고 ‘밥은 잘먹느냐’는 엄마의 일상적인 안부 뒤에 담긴 무게를 더 이상 고통스럽게하고 싶지 않았다.

 

떠나기로 결정하는 와중에도 복잡한 마음과 별개로 몸 역시 준비로 가볍지 않았다. 한국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는 3월 23일 대한항공이었고 그 이후 네팔 봉쇄의 서막이 올랐다. 티브이에서만 보던 봉쇄, 지역 간 이동과 모든 상점의 영업이 중단되었다 다행히 오랜 개도국 생활에서 오는 경험으로 소금 설탕을 비롯한 생필품을 비축해 두었고 라면과 쌀을 비축했다. 오토바이로 카트만두에 올라갈 수 있는 상황이 올 수도 있었기 때문에 기름도 적당량 비축해 두었다


먹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봉쇄된 네팔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할 거리였다. 비디오게임기는 최신형 모델이었고 게임 씨디는 한팔에 감지못할 한아름이었으며 외장하드에 담겨진 보지못한 드라마는 몇천 기가바이트가 되었다. 누군가 인생에서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소중한 것을 낭비할 때 온다고 했었는데 이렇게 나는 누구보다 완벽히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준비를 마치게 된 것이다.


상추를 납품해서 밥을 먹이던 빈민가 급식소도 운영을 중단했다. 평소에도 외국인이 네팔 빈민을 데리고 밥을 먹이는 것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활동의 눈치 같은 것이 존재했는데 이제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체가 불법이 되어버렸다. 급하게 쌀을 주문하고 고기를 주문해서 봉쇄를 버텨보자면서 집마다 분배해주었다. 나누어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네팔 정부에서 예고한 2주간의 봉쇄가 공표한 시간에 끝날지 코로나가 네팔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분명한 것은 코로나가 포카라 빈민가에 오게 된다면 기저 질환자나 노인뿐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큰 위협이 되리라는 것이었다. 문득 쥬스기계를 구매하면서 네팔의사로부터 들었던 ‘면역’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면역이 중요하고 대단한 키워드임에는 분명했으나 끼니를 못 채우고 제때 밥을먹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코로나를 이길만큼의 면역이 생길지는 누가봐도 고개를 가로 저을일이 분명했다


봉쇄 첫날 길거리에서는 차와 오토바이가 사라졌고 조용한 적막만이 거리를 감쌌다 거리를 걷는 외국인이나 네팔사람들이나 마스크를 착용하고 정해진 시간에만 식료품과 의약품을 구매하기 위해서 이동이 가능했다. 오토바이로 채 1분이 걸리지않는 시내 마트에 십분을 더 걸어가서 먹을 것을 더 구매했다. 비축해놓은 것은 어디까지나 비상식이었으므로 움직일 수 있는 순간을 최대한 활용해야만 했다. 여행자의 성지 포카라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지만 저 높은 산위에 마차푸차레는 마치 무슨일이 있느냐는 듯 맑은날씨에 당당한 위용을 뽐냈고 산란철을 맞은 페와호 물고기들은 퍽퍽 수면위를 뛰어올라 잔잔한 호수에 파동을 만들어올렸다.


정말 마지막 손님이 카트만두로 상경하는 버스에 탑승하기로 했다. 대사관에서 준비하는 한국인 전용버스로 암묵적으로 대사관에서는 모두 버스에 탑승해 주기를 요청했고 수녀님역시 카트만두로 상경하시기로 했다. 게스트하우스에 오는 손님 하나 하나가 기억에 남지만 이 손님은 동생같고 후배같은 손님이었다. 산을 좋아했고 데우랄리에 올라가는데 하루 반나절이 안걸릴정도로 체력이 좋았으며 지난겨울 데우랄리에서 눈사태 사고가났을 때 사고현장에서 구조 일손을 도왔던 청년이었다. 


떠나는 사람을 잡을수도, 그렇다고 같이 발걸음을 떼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대사관에서 조사하는 전세기 탑승신청은 했지만 언제 전세기가 출발할지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카트만두로 올라가게 된다면 카트만두 숙소에서 한발짝을 움직일수가 없는 가택연금에 놓이게 되는것이었다. 그러다가 만약 전세기 운항이 안되기라도 한다면 포카라로 돌아올수도 없이 꼼작없이 카트만두에 발이 묶이는 오리알이 되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불안해했다. 그나마 희망적인 것은 한국에서는 전세기 운용을 시도 한다는것이었다 포카라에서 카트만두 그리고 자국으로 대피하는 전세기를 운용하는 국가는 미국 호주 프랑스 독일 중국이 전부였으며 이어서 한국이 그 자리를 이어갔다. 독일대사관에서는 EU의 대장으로 유럽국가의 영주권이나 시민권을 가지고있으면 모두 다 비행기에 태워주었다. 영주권제도가 존재하는 나라에서는 영주권자들도 귀국을 시켜주었는데 호주에서 3년 가까이 살았는데 영주권 취득을 안한것에 대해서 처음으로 아쉬운 감정을 가지게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국은 아직 전세기가 계획중이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비행기 요금이 비싸다고 포카라에 체류하기로 결정한 외국인 여행자들이 생각보다 많다는것이었다. 숙박업소 업주입장에서도 음식과 장기투숙을 하는 손님을마다할 이유가 없었으며 남기로 결정한 여행객 역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표에 비해 포카라의 체류비는 너무나도 저렴했다. 무엇보다 고국으로 돌아가도 봉쇄고 남아도 봉쇄라면 네팔에서 봉쇄가 더욱 낭만적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떠나는 수녀님을 위해 도시락을 쌌다. 저장식품으로 얼려두었던 떡갈비를 꺼내어 굽고 김치를 볶았다. 당뇨에 걸린 노쇠한 몸을 이끌고 상경하는 카트만두 가는 길에 혈당이 떨어질까봐 걱정이 되었다. 수녀님과 마지막 손님 그리고 카트만두로 올라가는 한국인들을 위해 생수 두박스를 버스에 실었다. 가는길에 휴게소가 영업을 하는지 미지수였고 물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도움을 주고싶었다 몇주전 미리 귀국한 코이카 단원에게 넘겨받은 물이 좋은데 쓰였다 남을 위한 발걸음은 이렇게도 여운이 깊고 짙다.


나도 떠날 준비를 해야하는데 상추밭이 걱정이었다. 가진게 없을때는 걱정거리가 없는데 가진게 많아서 걱정거리가 늘어난다. 청상추는 씨앗을 맺는 절정으로 향해갔고 고수는 거의 끝물이었으며 열무와 쑥갓은 조금더 자라면 먹기 딱 좋을만큼 자랐다 포카라에 남은 한인들을 위해 야채를 배달하기로 결심했다. 전날 저녁 카카오톡으로 신청을 받고 이른아침 오토바이에 시동을 걸었다. 봉쇄였기 때문에 오토바이에 식료품이 없으면 경찰한테 최악의 경우 회초리로 맞을수도 있었다. 그런데 탁트인 그리고 차없는 길을 달리는게 너무나도 좋았다. 첫 번째 검문소를 샛길로 돌아서 야채를 싣고 눈사태 가족이 머무는 호텔, 집에 계시는 한인 목사님, 다른 게스트하우스에 야채를 배달했다. 포카라에서 그동안 쌓은 연륜은 경찰이 없는 샛길을 너무도 잘 알았고 혹여 경찰이 붙잡더라도 어눌한 네팔어로 ‘야채를 호텔에 배달하지않으면 나는 큰일난다’ 정도는 할수있었다 어눌한 네팔어와 마스크, 후즐그레한 복장, 오토바이에 가득 실린 야채들은 통행증을 요구하는 경찰에게 너무나도 귀찮은 존재가 분명한 것 같았다. 그리고 코로나보다 돈많은 호텔을 무서워하는 경찰이 야속했다.

 

씨앗을 파종할 때 수녀님을 강하게 말렸었다 코로나로 네팔도 중국처럼 봉쇄가 될수있으며 그렇게 된다면 자라난 상추를 어떻게 하실거냐고 말리는 조로 말씀을 드렸는데 결국 수녀님을 말릴수는 없었다 파종의 계절이 왔는데 씨앗을 들고 빈땅을 바라봐야만 하는 농부의 심정을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하기 쉽지않다. 더우면 옷을 벗고 추우면 옷을입듯 계절이 오면 농부의 땅은 응당 씨앗을 품어야만 했다

 

빈민가에도 상추와 고수를 배달했다 원래는 이걸 팔아서 쌀을 사다줘야되는데 그냥 상추를 줄 수밖에 없었다. 네팔사람들은 상추를 생으로 먹지않고 볶아먹는다 그래서 상추를 많이 줘야한다. 빈민가에 상추를 나눠주는날에도 치사하게 날씨는 맑았고 안나푸르나 산군들은 너무나도 선명했다. 빈민가 사람들도 봉쇄에 오토바이를 타고다니는 나를 걱정해주었다. 경찰하고 싸우지말라고 당부했고 또 길에 차가없다고 너무 빨리 달리지 말라고했다. 보편적 네팔 문화와 달리 만나면 반갑다고 두손을 잡고 말도 안통하면서 한참을 바라보기만 하는 아저씨에게도,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땀을 닦아주는 부녀회장 아줌마도 문앞에 상추를 두고 눈인사로 전달할뿐이다. 이들이 위험해서 그러는것보다 시내 마트에서 장을본 내가 위험해서 그랬다. 인간이 인간의 존재만으로 걱정거리가 되다니 네팔인사는 두손을 합장하고 ‘나마스떼’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악수를 청하는 네팔사람은 보통영어를 잘하거나 해외에서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네팔의 인사습관 하나가 걱정거리를 조금 덜어준다는 생각을 해봤다. 신체 접촉없이 상대의 평화를 빌어주는 인사는 어쩌면 코로나 시대에 가장 필요한 인사가 아니겠는가?


아이샤 밥을주고 내 밥을챙겨먹고 식료품을 살 수 있는 시간에 식료품을 사고 돌아오는길은 호숫가로 돌아왔다. 봉쇄된지 몇일 되지도 않았는데 페와호로 들어가는 하수구의 물이 맑아졌고 물고기들이 부쩍 늘어난 것 같았다.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거나 가만히 앉아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거의 일을 순차적으로 돌이켜보지는 않았지만 순서없는 단편들로 회상해보고 바둑에 복기를 하듯 기억을 곱씹었다. 그때의 나는 어떠했는가? 그리고 지금의 나는 어떠한가? 적어도 코로나로 어두워진 앞날을 예측하는 것 보다는 훨씬 재미있고 느끼는 감정들이 새로웠다. 일상에서 하는 명상 같기도 난봉꾼의 회개 같기도 했지만 


어찌되었든 시간은 잘 갔다. 봉쇄된 포카라에서 미래를 예측하기에는 너무도 막연했고 또 우울한 감정에 빠지기 쉬웠다. 오토바이로 배달을 하던 와중에 산이 너무 예뻐 잠시 세우고 사진을찍었다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으니까 돌아가야하는데 지금 눈앞에 펼쳐진 산아래 상추오토바이가 언제 다시 이길을 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아예 안돌아올수도, 생각보다 빨리 돌아올수도 있다 욕심을 내려두는 것이 쉽지는 않은데 내려둘 수 있게 되어서 너무 감사하다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는 것이 대책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지금순간은 대책없어 보이지않는다 평화로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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