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7
마지막 손님이 카트만두로 올라가고 열흘 정도를 더 포카라에서 보냈다. 상추배달은 조금 더 능숙해져서 봉쇄된 와중에도 포장 손님을 상대로 영업하는 네팔 식당에도 그냥 가져다주었다. 엄브렐라 카페라고 여행객으로부터 중고장비를 기부받아 판매하고 얻은 이익으로 지역사회 아이들을 먹인다고 포스팅을 읽은 기억이 났다. 상추가 도움이 된다면 이왕이면 남을 돕는 곳에 가져다주고 싶었다. 여기에 상추를 주고도 남으면 레이크사이드 시내 마트 앞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무료로 나눠주었다. 오토바이에 실린 채소를 권할 때 처음에는 안 산다고 하던 사람들도 무료라고 하면 좋아하면서 다들 하나둘씩 들고 갔다. 나에게 왜 상추를 무료로 나누어주냐고 궁금해하는 외국인들이 많았는데 처음에는 내가 원래 상추를 키우는 이유와 목적을 설명하고 나눠주다가 나중에는 같은 말 반복하기가 지쳐서 그냥 돈이 많아서 그런다고 했다. 나에게 한사코 돈을 주려고 했던 외국인이 있었는데 나 역시한시 한사코 ‘나는 부자’라면서 돈 받기를 거부했다. 돈이 많아서 부자도 있지만 나는 마음 부자가 되고 싶었다.
상추와 채소를 배달하면 많은 분으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게 되는데 사실 내가하는 일은 오토바이 타는일뿐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포카라를 떠나기 전 마지막 수녀님의 전언과도 같은 말씀이 ‘밭에서 나는 채소를 나누라’였는데 나는 그저 말씀대로 사는 것뿐이었다. 종교적인 이유 안에서 그리고 종교적인 이유를 떠나서도 반드시 지키고 싶은 말씀이었고 잠시 포카라를 떠나시는 ‘포카라 해피홈 주식회사 회장’님의 지시사항이기도 했다. 코로나로 떠나는 지금, 나도 수녀님도 언제 돌아올지 기약이 없는 상황이고 최악의 상황에 어쩌면 유훈이 될 수 있는 말씀이기도 했다. 해피홈 주식회사는 작년 여름 덥다고 모여서 냉면 먹는 자리에서 나온 농담이었는데 농담도 자주 하다 보니까 무게감을 가지게 된 것 같다. 무한도전 무한상사여도 좋고 포카라 해피홈 주식회사여도 좋았다. 나는 내심 영업부장 정도 생각했었는데 생각지도 못한 임원이 되었다.
4월 2일. 아침 열 시에 문을 여는 마트에서 꼭 살 것이 없었으면서도 마스크를 끼고 마트에 갔다. 마스크를 끼고 생필품을 사는 다른 외국인을 보면서 포카라에 묶여있는 것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안도감을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좀 걷고 싶었다. 평소에 걷기를 별로 안 좋아했는데 거리의 조용함 속에서 온전히 포카라를 느낄 좋은 기회라고도 생각했다. 콜라 한 캔을 사서 호숫가로 돌아오는 와중에 4월 3일 이후에는 외국인을 포함한 네팔 내부에서 이동이 전면 제한될 거라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평소에 인사하고 지내던 대사관 영사님이었는데 이번 기회가 아마도 카트만두로 떠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것 같다 고도 했다. 비행기 일정이 확정되었다면 망설일 필요가 없었겠지만, 혹여 올라갔다가 카트만두에서 발이 묶이는 상황을 걱정했다.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
오토바이로 카트만두에 가는 방법과 다른 외국인들이 카트만두로 올라가는 방법에 대해서 수소문해봤지만 결국은 대사관 협조가 필요했다. 대사관 직원은 죄가 없다. 공무원의 직업적 한계로 인해 정해지지 않은 미래에 대해 확답을 섣불리 내려주기도 어렵다. 저녁에 영사님과의 통화에서 전세기는 언제가 되어도 뜰 거라는 이야기와 카페에 달린 댓글들까지 영사님이 읽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나에 대한 개인적인 걱정을 해줬다. 민원인과 주무관의 관계를 넘어 인간적인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 대사관 직원은 죄가 없다. 누군가 피곤해야 한다면 내가 조금 더 피곤하면 세상은 보통 평화롭지 아니한가?
카트만두로 떠나는날 포카라에 거주하는 지인께 홍텔을 부탁하고 집결 장소인 바라히 사원 앞으로 갔다. 집결시간은 아침 8시였다. 걸어서라면 30분 정도 걸리는 레이크사이드 초입이었는데 캐리어를 끌고 이동하는 게 수월치 않았다. 더구나 카트만두에서 먹어야 할 비상식량도 어느 정도 챙겨가야 했다. 평소 연락하던 택시들에 연락했지만, 봉쇄를 모두 두려워했고 운행을 거부했다. 길에서 만난 생수 배달 차량에도 부탁했는데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위험을 감수하기 어렵다고 했다. 주차해 두었던 상추배달 오토바이를 다시 끌고 나와 캐리어를 나르고 도로 지인의 집에 오토바이를 가져다 두었다. 차들이 다니지 않는 레이크 사이드는 낙엽이 쌓여가고 있었고 내린 비로 흙먼지가 쌓여가고 있었다. 오래전 보았던 좀비 드라마가 떠올랐다. 아무도 살지 않는 도시, 인적의 왕래가 잦아드는 도시 포카라 그렇게 되어가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기 전 모든 탑승객의 체온을 측정했다 지금 이순간 네팔에서 할수있는 유일한 검사가 체온측정이었다 프랑스 일본 한국 캐나다 그리고 국적을 알지 모를 몇몇 사람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카트만두로 출발했다. 평소에 여덟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는데 거리에 차가 없어서 조금 일찍 도착하지 싶었다. 배고플까 봐 달걀을 삶고 과자를 챙겼는데 아주 유용했던 것 같다. 가는 길에 두 번 쉬었는데 휴게소 한곳이 영업하고 있었다. 달걀에 먹을 소금을 얻고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었지만, 그보다 재미있었던 건 ‘네팔에는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라는 말이 떠오른 것이었다. 카트만두로 가는 길은 봉쇄되었지만, 휴게소는 성업중이었다
카트만두에 도착한 이후 카트만두 체류에 도움을 주신 지인의 집으로 들어갔다. 아파트 3층에 있는 집이었는데 캐리어를 움직이는 소리가 나자마자 1층과 2층 주민들이 나와서 무슨 용무로 이곳에 온 것인지 자세히 물어봤다. 적대적인 감정까지는 아니었지만, 분명히 평소에 느끼던 호의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포카라에서 온것이며 한국에 가는 비행기를 대기하고 있는 것이고 일주일이 안 걸릴 것이라고 자세하게 설명해야만 했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8시에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고 마스크를 쓴 경찰 다섯 명이 와서 어제 주민들에게 했던 카트만두 체류 목적에 대해 다시 설명해주어야 했다. 카트만두는 분명히 공기가 달라졌다. 이동이 허가된 저녁 시간에 식료품을 구하고자 밖으로 나왔는데 포카라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경찰들의 태도나 주민들의 분위기 자체가 달랐다. 조금 더 경직되어있고 외국인임에도 네팔인과 같은 강압적인 태도로 대했다. 불쾌감을 느낀다거나 불편함을 느꼈다기보다는 코로나로 피곤해진 네팔 사람들이 안타까웠다. 네팔은 봉쇄 말고는 코로나에대한 뾰족한 대안이 없었으며 이 결정은 코로나로 걸려서 죽게되거나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해야만 하는 절망의 선택지로 몰려가고있던것이다.
카트만두 골목에서 구매한 동네 버터는 살면서 먹었던 버터중에 최고로 맛있었고 어렵게 구한 삼겹살은 냄새가 나고 질겼다 카트만두 특산물중에 '왕의 커드'라는 요구르트도 구해서 먹었는데 정말 맛이있었다 양을 넉넉히 가져왔다고 생각했던 포카라에서 가져온 비상식량 대부분을 먹었다. 카트만두에 있는 일주일 동안 걸어서 30분이 걸리는 마트에 용기 내어 간 적이 있었다 주차장에 동그란 원형을 일정 간격으로 그려두고 사회적 거리 두기를 요청했으며 1인당 장보는 시간도 20분으로 제한했다. 코로나로 이렇게 된 게 너무 억울해서 비싼 코로나 맥주를 두 병이나 사서 마셨다.
카트만두에서 일주일은 이틀에 한 번 밖에 나가 물과 식료품을 사는 것을 제외하고는 집안에 틀어박혀 있었다. 드라마를 보고 지치면 게임을 하고 게임을 하다 지치면 드라마를 봤다. 이것저것 관심 가지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개인의 취향에 스스로 감사했다. 유튜브 동영상도 많이 봤는데 유튜브의 알고리즘은 나를 신천지 교주의 사주를 봐주는 클립으로 이끌었고 덕분에 나는 역술에 대한 유튜브 채널이 꽤나 있는 것도 알았다. 순수한 호기심에 연락을 해봤는데 지금 예약금 10만 원을 내도 5월 20일이 넘어서 전화 상담이 가능하다고 했다.막연하고 어려울수록 미래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성을 생각해보고 이런 상황에 사주에 관심을 가진 나 역시 그 범주 안이라는 것이 재미있었다. 경기가 어려울수록 돈을 버는 직업이 간판 집이라고만 알고 있었는데 한국의 경우 역술인도 거기에 해당하는 걸 새삼 깨닫는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연락해서 집으로 가는 절차를 확인했다. 수녀님 역시 버스에 태워드려야 했으므로 절차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했다. 공항에서 광역버스로 지역거점으로 이동한 뒤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버스로 환승 해야 한다고 했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야 했고 나의 존재가 남에게 폐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카트만두에서 정말로 아무것도 안 했는데도 4월 10일이 되었다. 대사관에서 운영하는 픽업 버스는 한 시에 데리러 온다고 했고 큰길 픽업 포인트까지 나와 있으라고 했다. 짐을 챙겨 큰길로 나가는데 역시나 경찰들이 길을 막아섰고 상황을 설명하려던 순간 경찰 뒤로 대사관 버스가 나타났다.
약속 시각보다 20분 정도 일찍 나가서 20분 일찍 버스가 출발했는데 이후에 탑승하는 한국분들 모두 예상시간보다 일찍 나와 있어서 생각보다 공항에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그만큼 모두 한국에 빨리 가고픈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텅 빈 트리부반 공항에서 대한항공, 한국 사람들만을 위한 탑승 절차가 시작되었다. 언제나 그렇듯 낚시가방은 보안검색에서 걸렸고 가방을 열어 낚싯대를 보여주고 얼마짜리 낚싯대 인지까지 일일히 설명해주었다. 한국에 낚시꾼들에게 유명한 주석으로 된 무게추가 꼭 총알 모양이었다. 천천히 가방을 열어 설명해주면 된다. 비행기는 늦게 탄다고 자리가 없거나 서서 가지 않는다. 세관을 지나 출국 절차를 마치고 수녀님과 먼저 올라온 홍텔 마지막 손님을 만났다. 간식을 나누어 먹으며 비행기가 오기를 기다렸다. 두 시 반쯤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고 비행기는 아직 미얀마를 지나 카트만두로 오는중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공항에서라도 기념품을 좀 샀었어야 하는 건데 그냥 온 게 못내 아쉽다. 비행기 착륙 30분 전쯤에 마지막 보안검사를 마치고 사람들은 게이트 앞에 천천히 줄을 서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길이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원래가 예측이 어려운게 앞날인데 이 끝을 아무도 알수없었다
게이트가 열리고 탑승 절차가 시작되었다. 비행기를 빨리 탈 수 있는 자격이 있었고 심지어 좌석도 비행기 맨 뒤였으므로 빨리 타는 것이 모두를 위해 이로울 수도 있지만 지금 떠나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제일 늦게 비행기를 타기로 했다. 활주로를 돌아 이륙하는 비행기에서 가볍게 몸이 뒤로 쏠리는 얼마간의 불쾌한 느낌. 그리고 그렇게 네팔 땅을 떠났다. 막상 이륙하고 나니 네팔에 대한 걱정보다는 도착해서가 걱정이었다. 보통의 입국절차와는 많이 다를 테니까 조금은 긴장했던 것 같다. 카트만두에서 지내는 일주일 동안 열이 날까 봐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코로나 감염 여부를 떠나 열이 나면 비행기에 태워주지 않는다고 했다. 해열제를 먹고 비행기를 타게 된다면 누군가를 속이게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단지 열이 나서 해열제를 먹었는데 이것이 남을 속이는 일이 되고 무척이나 무거운 나쁜 행동이 되는 것이다.
인천에 착륙하고 서둘러 정지해둔 유심을 갈아 끼웠다. 세관신고서 외에도 검역을 위한 서류도 두 장 작성해야만 했다. 한국에 도착했다는 안내방송이 나왔지만 의외로 감정은 덤덤했다. 해결해야 할 남은 관문이 많았다. 평소에는 20분도 안걸려서 튀어나가던 공항을 검역을 위해 길게 줄을 섰는데 한국은 새벽 두 시 반이었다. 빨리 나가도 교통편이 없다. 비행기를 타고 나서 처음으로 착륙하고 서둘러 무빙워크를 타지 않는 여유를 부렸다. 급할게 하나도 없다
검역은 청바지를 입은 군인들이 하고 있었다. 카트만두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안내받았던 자가격리 보호 앱을 까는 법을 알려줬고 체온을 측정했다. 한국에서 자가격리가 진행될 곳을 신고하고 전화번호도 확인했다.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불친절하지도 않았다. 기다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평소라면 누군가가 목소리를 낼지도 모르겠다는 정도의 피곤함과 번거로움이었지만 입국한 사람들은 한무리 양떼처럼 조용히 통제에 따랐다. 자동입국 심사도 대면심사로 변경되었다. 이분들은 죄가 없다 되려 코로나를 가져왔을 수도 있는 수많은 잠재적 보균자들을 대하면서 직업의 소명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하니 괜시리 검역과 입국심사가 숙연해졌다.
게이트 밖으로 나왔지만, 방역복을 입은 안내원들이 광역버스를 대기하는 곳으로 안내해주었다. 새벽 네 시쯤 자리에 앉았는데 네팔에서 온 일행들의 목적지가 다 달랐고 버스가 다 달랐다. 일행 중 첫차는 지방으로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광명역행 6시 버스였고 막차는 경기 북부로 떠나는 내가 타야 하는 7시 50분 버스였다. 그 와중에 대기실이 분주해졌고 미국에서 오는 승객이 대기할 공간을 만든다고 했다. 확진자가 증가하는 미국에서 오는 두 대의 비행기라니 일순간 긴장이 감돌았다. 일행들에게 빨리 화장실에 다녀오고 이동을 최소한을 삼가자고 했다. 먼저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하고 수녀님 짐을 차에 실어드렸다. 내 버스가 왔는데 1터미널로 가는 길에서 잠들어서 의정부까지 한 번에 와버렸다.
의정부예술의 전당에 도착하니 경기 북부 지방자치단체에서 운영하는 귀국 지원 버스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두천은 승합차였고 의정부와 양주는 미니버스였는데 포천시 버스는 운영 중인 노선버스를 방역 버스로 개조했다. 고향 포천에 대해서 별다른 감정이 없었는데 버스가 큰 걸 보고 또 이 큰 버스에 혼자 타고 가는 나를 생각하니 헛웃음이 났다. 코로나 덕분에 노선버스 한 대를 전세 내서 택시처럼 이용하고 있었다. 심지어 무료로. 의정부 예술의전당 앞 꽃나무 이름은 모르겠는데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자가격리가 끝나는 2주가 지나면 꽃이 남아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건소에 들러 검사를 받으려고 했는데 네팔에서 온 입국자는 증상이 있을 때만 검사를 한다고 했다. 기사님과 멀리 떨어져 함께 바람을 쐬고 집으로 출발했다.
집에 도착해서 먼발치에서부터 반갑다고 짖어대며 꼬리 치는 개들을 봤지만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엄마는 집안 창문에서 손만 가볍게 흔들고 있었다 코로나가 만들어준 신파 드라마가 되는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집 옆 텃밭 비닐하우스에 텐트를 쳐두셨다. 평소에도 손님이 오면 비닐하우스에서 많이들 놀다 가고 그랬으니까 가스레인지도 있고 싱크대도 있고 전기도 잘 들어왔다. 한국은 네팔이 아니니까 정전이 되지 않는다. 감사할 따름이다.
짐을 풀고 찬물로 샤워했다. 샤워에 대한 대안이 없었다. 우리 집은 지하수였는데 코로나가 아니라 감기에 걸리지 싶었다. 다행히 텐트 안에 전기장판이 있었고 작은 라디에이터도 있었다. 그래도 밤에는 영하였고 낮에는 땀이 날 정도로 더웠다. 비닐하우스가 그랬다.
비닐하우스에서의 일과는 카트만두보다는 덜 단조로웠다. 수녀님을 포함해서 주변 분들에게 귀국했다고 연락을 하거나 게임을 하거나 드라마를 봤다. 이틀에 한 번 하우스에 심은 감자와 시금치 상추와 부추, 꽃 화분에 물을 줬다. 하우스 옆 거위 한 쌍이 있는데 알이 다섯 개나 있었다. 보일러실에 부화기를 설치했다 한 달이 지나면 부화가 될 텐데 내가 거위 알을 품는 기분이 났다. 알에서 태어난 새 생명이 희망의 상징이 되길 바랐다.
설거지는 3일에 한 번 몰아서 하고 빨래는 몰아서 일주일 만에 손빨래했었는데 찬물에 손빨래하고 살짝 열이 났다 두 번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위문품도 많이 도착했다. 포천시에서 보내는 비상식량과 농림식품부에서 보내준 채소 꾸러미 그리고 주변 친구들과 선배들이 보내준 위문품들이었다. 직접 탕수육을 가져온 동네 형이 있었는데 먼발치에서 탕수육을 내려두고 피식 웃고 그냥 갔다. 맨날 놀려먹던 대학 동기가 있었는데 아이스크림을 가득 사 와서는 웃으면서 발로 봉지를 툭툭 치고 갔다. 소리치면 침방울이 튄다고 그랬다. 이런 희망과 배려들이 자가격리 동안 함께했다. 한국에 있고 동네에 있으면 혼자 있어도 혼자 있는 게 아닌 것 같아서 감사했다.
가끔 보건소에서 오는 전화를 받고 가끔 담당 공무원이 전화했다. 증상은 있는지 확인하는 안부 연락이었는데 배려해줘서 참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 공무원이 내가 발생시킨 쓰레기까지 걷어간다고 했다. 분리수거도 하지 말고 음식물쓰레기마저 물기를 짜서 함께 담으라고 했다. 기다렸다가 음성이면 알아서 처리하겠다고 양성이면 그때 부탁드리겠다고 했다. 이 시국에 해외에서 온 것도 송구한데 쓰레기 수거까지 부탁할 염치는 없었다. 같은 비행기를 타고 온 일행들과도 많은 연락 했다. 자가격리가 지자체마다 조금씩 다 달랐다. 어느 지역에서는 보급품을 과도하게 많이 줬고 어느 지역에서는 얻어먹는 처지에서도 민망한 수준의 보급품이 왔다. 얻어먹는 처지임에도 카톡에 올라오는 사진을 보고 부럽기도 또 안도하기도 했다. 어느 지역에서는 도착해서만 검사를 했고 어느 지역에서는 도착과 자가격리 종료 전에 검사했으며 포천은 자가격리 종료 전에만 검사했다.
격리되고 얼마 안 있어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는데 역설적으로 재외국민 부재자 투표를 신청하는 바람에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코로나가 없었다면 네팔에서 시행될 선거였고 선거 경비원으로 채용되어 나름 국가 공동체를 위해 봉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네팔에서 선거는 시행되지 않았고 이를 이유로 한국에서 투표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선거관리 위원회와 네팔 대사관에 문의했지만, 대답은 같았다. 선거가 가능하다고 해도 걸어서 20분이 걸리는 투표소까지의 논길을 나는 걷고 담당 공무원은 뒤에서 차를 타고 따라올 생각을 하니 민폐가 따로 없었다. 조용한 시골 투표소에서 자가격리자가 투표한다면 모두 얼마나 긴장할지 생각해보니 이번 참정권 행사는 모두를 위해 긍정적으로 단념하는 편이 마음 건강에 이롭겠다는 생각을 했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운 황태 생활을 하면서 그동안 캠핑에 등한시했던 나를 반성했다. 그리고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캠핑할 일이 없겠다는 다짐도 했다. 밤과 아침에는 영하로 입김이 났고 낮에는 하우스의 열기로 땀이 났다. 미세먼지가 높은 날에는 포카라가 너무 그리웠다. 포카라에서는 차 꽁무니만 따라가지 않으면 공기는 항상 맑았다. 특히 봉쇄되고 난 이후에는 훨씬 더 공기가 맑았다.
격리를 마치고 무엇을 할지도 고민했다. 남은 기간 알바를 구할 수 있을까? 응시 가능한 자격증시험을 마무리 짓고 가는 편이 좋을까? 낚시는 언제 어디로 가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을까? 목욕탕에 가서 때를 밀면 얼마나 시원할까? 집근처 순댓국 집에서 순댓국 한 그릇에 소주를 먹으면 대리운전비용이 얼마나 나올까? 그냥 생각해도 막연할 수 있는 질문에다가 코로나를 더하니 고민의 끝이 더 아득해지는 것만 같다.
자가격리가 해제된 지금 자가격리 동안 무엇을 했고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학교 다닐 때 시험 전에 집중해서 시험을 보고 시험지를 덮자마자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기분이다. 많은 분이 응원해주셨지만, 생각만큼 힘들지 않았고 어렵지 않았다. 가끔 네팔 소식을 들었고 네팔에서 산사태 사고 포터 한 분을 찾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지금 내가 네팔에 있다면 도움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생겼다. 누군가 잘 마무리 해주는 것으로 믿고 또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홍텔을 부탁한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부고였다. 나를 만나면 반갑다고 말도 안 통하면서 손을 잡고 한참을 말씀하시던 포카라 빈민가 엉클 미스테리(기술자)께서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함께 학교를 짓고 집을 두 채를 더 지었다. 그런데 그분이 돌아가셨다.
포카라에서 마지막으로 상추를 나눠줄 때 손을 못 잡아 드린 게 마음에 걸렸다. 그때 손을 잡아 드렸더라면 지금 느끼는 감정이 조금은 가벼워질 수 있었을까?
자가격리를 마쳤다. 결과는 음성이었고 수녀님을 포함해서 함께 온 모두가 음성이라고 했다. 코로나 때문에 네팔을 떠나왔지만, 분명히 네팔에 남아있는 한국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한국으로 온 이유로 코로나는 핑계가 될 수 있었다. ‘코로나 끝나고 보자’라는 말처럼 의례적이고 그렇고 그런 핑곗거리가 되기에 너무 쉬웠다. 깊게 고민하지 않기로 정했다. 코로나가 음성이니까 부모님과 저녁을 먹고 개들과 집 마당을 산책했다. 내일부터 내가 보고 싶다고 지인들이 집으로 찾아오기로 했다. 낚시를 함께할지 나물을 따러갈지 아직 정하지 못했다. 당장 내일 뭘 할지부터 정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