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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Feb 11. 2024

두번째 암_첫번째

지나온 이야기

볼이 부었다 전부터 피곤하고 힘들면 볼이 살짝씩 붓는다는건 알고있었지만, 누구나 좌우의 얼굴은 정대칭이 아니라는 사실로 위로를 삼으려고 했는지 아니면 피곤하면 누구나 일시적으로 붓는 가벼운일로 생각하고 싶었던 것인지 코로나를 통해 평소에 마스크를 쓰고다니는 사회적 습관에 힘입어 미루고 미루다 작년(20년) 11월에 '이제는 병원에 한번 가봐야 겠다'고 생각했고 동네병원과 고대안암병원을 거쳐 서울대병원까지 가게되었다.


처음 동네병원에서는 혈액검사와 CT촬영을 했는데 지방종,아데노이드, 면역질환이 의심된다고 했다 병원에서는 소염제를 처방해줬는데 아무런 차도가 보이질 않았다 그도 그럴것이 이때까지만 해도 병원에 다니면서 주사맞고 약을 타먹는 주제에 간간히 술을 마시고 담배를 끊어내지 못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태의 심각성에 대한 생각 자체 깊지 못했다 약좀 먹으면 금방 끝나버릴 그런 상황으로 생각했던것만 같다 어릴적부터 인연이 깊은 동네병원 간호사 아줌마는 정확한 병명을 모를수록 술담배를 끊어야 한다고 했는데 고대병원에 다니기 시작할무렵 술과 담배를 끊기로 결정했다 걱정이 동네왕복수준 에서 서울 통원급으로 커지면서 삶의 낙이 그만큼 또하나 툭하고 떨어져 나갔다. 나이를 먹고 인생이 지나는건 가지고 있는걸 놔주는거라고 누가 그랬다.


고대병원 이비인후과에서 외진을 두어 차례하고 쉽사리 정리가 되기 어렵다는 서막을 살며시 엿봤다 두번째 외진에서 갑상선을 떼어냈던 교수는 잘모르겠다면서 솔직히 자기 의견을 말해줬다 쉽지않은 병인것 같다면서 오래갈것같다고 했다 많이배운 의대 교수 입에서 너무나 솔직히 나온 대답이 충격이기도 했지만 또 그만큼 고마웠다 시간을 아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내분비내과 교수를 만나 볼이 커진 원인이 갑상선때문은 아닌지 확인했고 부종 근처 초음파와 피를 또 뽑았다 해외에서의 생활 이력이있으므로 감염내과에도 가서 피를뽑고 검사를 했으며 피부과에가서 조직검사를 하고 또 피를 뽑았다 하루에 의사를 다섯명씩이나 만난적도 있지만 아무도 정확한 가이드를 주지못했다 피부과의사는 혀가 갈라지는것을 보고 면역질환이 의심된다면서 신경과로 진료과를 옮겨줬다


신경과에서 MRI와 볼에 전기자극 검사를 하고 또 피를 뽑았다 대학병원 MRI는 순서가 많이 길었는데 나같이 응급환자가 아닌사람에게는 더욱더 긴 것만 같았다 나는 가장 오래 기다렸지만 또 양보를 해줘야 한다면 가장먼저 양보를 해줘야만 했다 가장 길게 찍는다는 머리사진을 한 시간동안 찍으며 MRI기계 안에서 발가락 조차 움직이지않았다 어떻게든 빨리 끝내는데 내 인내심이 도움이 된다면 그냥 빨리 끝내고 싶었다 땀이 비오듯 쏟아졌고 판독결과는 얼굴 근육부위에 염증이 의심된다는 소견이었다 이곳 신경과 교수조차 나에게 선택지를 줬다 고대병원에 입원해서 바로 스테로이드를 맞을지 서울대나 부산대로 전원을 갈지 결정하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차피 결론은 어딜가나 스테로이드 일거라고 넌지시 귀뜸해줬다 집이 서울근처인데 부산에 갈이유가 없었다 서울대로 전원을 신청했다 


고등학교때 풀던 수학문제가 떠올랐다 수학문제는 답이라는것이 있으니까 아무리 계산과정이 복잡하고 어려워도 답이 '있다'는 믿음으로 답을 향해 가는 고통이 어렵지 않았는데 이건 완전히 다른 문제같았다 책 뒷편에 답지가 없는 수학문제인것같으면서도 이과의 최고인 '의과대학'에서 논술시험으로 점수를 평가하는 막연함마저 느꼈는지 모르겠다. 나중에야 알게되었다 면역이라는게 이렇게 어렵고 복잡하다는것을


짧았던 봄날 고려대 통학 5개월을 마치고 서울대에 입학하기가 좀처럼 쉽지않았다 진료의뢰서를 받자마자 서울대예약을 신청했지만 3개월 뒤에나 시간이 난다면서 그때 오라고했다. 사정해서 일정을 당기고 몇일있다가 또 사정을 했다. 6월 4일로 서울대 첫 외진 일정이 잡혔다 


서울대에 가기전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경희대 의료원에 찾아간적이 있었다 볼이 붓는와중에도 허리가 아팠고 우리동네 용하다는 한의원 원장님은 얼굴이 틀어졌다면서 구완와사같다고 했다 이미 시간이 오래되었으니 동네병원에서 해결할일이 아니라 대학한방병원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전국에서 구완와사들이 침맞으러 다닌다는 용하다는 경희대 교수님을 만났는데 구완와사의 종류는 맞으나 자기가 손을 써볼수있는 상황이 아닌것 같다고했다 나름 대학병원 교수인데 그분 역시 나같은 환자 앞에서 무력감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원래는 외진이 6월4일 두시 이십분으로 잡혀져 있었는데 이틀전에 전화가와서 학회가 있으니 오후 네시에 올수있냐고 물었다 나는 되려 더빨리 갈수있으니 최대한 빨리가고싶다고 의견을 전했다 오후 네시 예약이 밀리면 여섯시가 넘게될거고 상황에 대해서 설명할 체력도 의사가 집중할 여력도 부족해 질것만 같았다 새벽같이 올라간 서울에서 첫 외진이 시작되었다 벌써 고대에서부터 수많은 의사를 만날때마다 새로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시간이 지쳤던 나는 증상에 대해 소상히 글로 옮겨적어 두었다 거주이력이나 습관 투병이력까지 모든것을 적어서 처음만나는 신경과 의사에게 제출했다 의사는 그자리에서 외진으로 해결될 일은 아니며 입원할것을 권했다 입원이 빨리 진행되기는 어렵겠지만 입원해서 검사하고 그에 맞는 치료를 해야한다고 했다 예상을 안한것은 아닌데 착잡했다 연건동 서울대 기숙사 생활이 목전에 다가왔다


입원 대기창구에서는 한달을 기다려야한다고 했다 1인실부터 6인실까지 요금표를 주면서 어떤등급의 병실부터 예약을 원하는지를 물었다 특실 하룻밤 150만원부터 6인실 하룻밤 2만원까지 요금은 다양했다 특실을 제외한 1인실부터 6인실까지 모두 예약을 원한다고했다 이왕 시작한만큼 이 고리를 어떻게든 빨리 끊어내고 싶었다 빨리 끊어낸만큼 일상으로 돌아갈수 있다고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와 입원을 기다리는 한달을 어떻게 보낼지 고민이 깊을새도 없이 다음날 전화가 왔다 자리가 났으니 일요일인 내일 입원이 가능하겠냐는거였다 몇인실인지 묻지도 않았고 가겠다고 대답부터했다 동네에서 코로나 검사를 급하게하고 일요일 입원준비를 해서 서울로 올라갔다 

   

4인실이었는데 룸메이트들은 하나같이 심각했다 신경과는 뇌와 관련된 환자들이었고 환자의 상태가 중증인경우가 많았으며 평균연령대가 높았다. 옆자리 할아버지는 포항에서 오셨는데 거기서도 병명을 모른다고 했다 틈만나면 밖을 걸었다 걸어야 산다고 믿으시는것 같았다 앞자리 할아버지는 이미 두번의 수술을 마치셨는데 의식이 없다가 하루에 5분정도씩 의식이 돌아오면 보호자인 부인에게 술집마담이라고 불렀다 그외에는 고통의 신음소리를 내거나 아니면 코를 심하게 골았다 더이상의 치료를 포기하고 호스피스병원으로 간다고 했다 대각선방향 할아버지는 수술이 잘되서 곧 퇴원을 한다고했다 


서울대병원은 갈곳없는 환자들의 최후의 집합소같았다. 3층부터 11층까지 많은병동에서 희귀병 난치병 환자를 찾기가 너무쉽다 나 역시 사지는 멀쩡했으나 볼이 왜 붓는지 아무도 몰랐으며 옆자리 할아버지는 두번이나 쓰러졌지만 왜쓰러졌는지 이유를 몰랐다 앞자리 의식없는 아저씨가 신음소리를내고 코를골면 잠을자기가 많이 힘들었다 이 아저씨는 하루중에 절반을 신음소리를 내고 나머지 절반을 소리지르듯 코를 골았다 일반병원이었다면 진작에 컴플레인을 걸고 불편한 감정선이 수없이 오고갔을텐데 오갈데 없어서 모인 이곳이라서 그런지 아무도 그 환자나 보호자에게 불편한 감정을 비추지 않았다 포항 할아버지랑 나는 앞자리 아저씨의 발작이 제일 심해지는 새벽 두시쯤 일어나서 병동을 하염없이 걷다가 정말 피곤하면 자리로 돌아가 조용히 잠을 청했다 이것이 오갈데 없는 사람들의 배려같은거라고 생각했다 


검사의 연속이었으므로 엄마를 도로 집으로 내려보냈다 혼자서도 충분히 감내할수있는 검사들이었고 수술같은게 아니었으니까 혼자서 지내볼 자신이 있었다 일단 나는 사지가 멀쩡해서 정맥주사도 꼽지않고 병원 여기저기를 산책했다 병원에 입원할때 게임용 노트북을 가져갈지 넷북을 가져갈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게임용 노트북의 소음이 걱정되서 넷북을 가져왔는데 게임용을 가져와도 될뻔했다 앞자리 아저씨 소리는 간호사실 데스크까지 들려서 간호사들이 복도입구 우리방 문은 꼭 잘닫아줬다 


어차피 결과는 스테로이드 아니면 면역글로불린이었다 다만 MRI소견이 말초신경이 아닌 근육 중심부에 염증의견을 보였으므로 고용량의 스테로이드 치료가 거의 확정적이었다 내가 찾아본 증상에 따른 모든 귀결은 스테로이드였다 몇가지 다른 치료법이 있었지만 고대병원 신경과에서 말했듯 이곳에서는 스테로이드로 가는길에 시도해볼수있는 모든것을 시도해보는것이었다 이비인후과, 류마티스내과, 감염내과, 안과, 신경과 다섯군데 의사를 만났고 과별로 의사를 만날때마다 피를뽑고 검사를 했으며 결국 류마티스내과랑 신경과가 남았다 


안과에서는 스리랑카 뎅기열이후 오른쪽눈에 남게된 사시가 매우 얕게 남았지만 지금의 증상과는 무관하다고했으며 감염내과는 피를 열통정도 뽑아가더니 그이후에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이비인후과는 가벼운 면담후에 바로 얼굴조직검사로 샘플을 두개나 떠갔다 일요일에 입원해서 금요일까지 검사만하다가 금요일날 저녁부터 고용량 스테로이드 처방이 결정되었다 의사와 간호사에게 부작용을 묻고 나도 나름대로 검색을 해보았지만 학교다닐때 조근조근 설명해주시는 선생님의 차분한말투로 전달되는 부작용의 무서움은 한편으로는 안심이 되었지만 또 그만큼 불안하기도 했다 


고용량 스테로이드의 여러가지 부작용중에 나에게 온 부작용은 혈당이 급격하게 올라간다는것이었다 평소 혈압이나 혈당에 문제가 없었는데 스테로이드를 맞고나니 공복혈당이 160이 넘게 나왔다. 충격이었다 병원에서는 먹는게 낙이라며 냉장고에 채워둔 과일을 룸메이트들에게 돌렸고 투여 직전에 구매한 과자와 빵을 짐가방 깊숙히 집어넣었다 갑상선 수술로 노래를 날리고 겨울에 술과 담배를 날렸으며 오늘또 이렇게 먹을 낙마저 날아갔다 인생에서 '나이를 먹는다'의 현실이 '삶의 낙이 줄어든다' 로 정의되는것같아 정말 슬픈일이 아닐수 없다 입원전날 무슨 이끌림처럼 훠궈집에가서 훠궈를 먹었는데 안먹었으면 정말 땅을치며 후회 할뻔했다 


스테로이드 처방이 시작되고나서 주말을 맞았다 침샘검사는 월요일 조직검사는 월요일에 결과가 나온다고했는데 결과와 무관하게 스테로이드는 진행된다고 했다 별다른 일정없이 하루에 스테로이드 한팩을 맞는게 일정의 전부였다 처음 저녁에 맞았던 스테로이드를 점차 두시간씩 당겨서 맞았고 일요일에는 오전 열한시에 맞았다 퇴원일정에 맞추어 아침에 맞고 퇴원절차를 진행하려고 하는것을 느꼈다 왼쪽팔에 꼽아둔 정맥주사를 제외하고는 큰 불편함도 없었다 포켓몬스터 게임을 하면서 계속 걸었다 주변에 계신 당뇨선배들에게 연락해서 당뇨관리 팁을 얻었다 수치가 400나와도 소주먹고 인슐린 맞는다고했다 스트레스 없는 삶을 강조하는 형님이셨다 요즘 '깡'이 유행이라는데 나는 거기까지 자신이 없었다 걷고 또 걸어야했다 집에가면 개들과 자전거를 타는것도 좋은 방법이 될것같았다 


퇴원후에는 네팔인연으로 세브란스 치과(안면)에 들러봤고 입 내부에서 조직검사를 했다. 치과에서 조직검사를 하니 심리적으로 두배는 더 아픈것 같았다. 이곳에서도 역시 염증 증상이라고 했는데 염증이 차라리 심했더라면 긁어냈을거라면서 이렇게 애매한 염증은 자기들도 방법이 없다고 했다. 이렇게 나는 고등학교때는 꿈만 꾸었던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를 모두 돌았고 그들에게서 답을 얻지 못했다. 스테로이드 장기복용을 통해 증상을 조절하자는 의사의 결정에따라 나는 먹는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기로 했다. 이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부작용이 두려웠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느하나 확실한 대답을 줄수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대답을 바라는 만큼 나만 힘들어졌다. 결론은 정해졌다 약을 먹으면서 일상으로 돌아갈수밖에 없었다. 어찌되었든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때문에 나는 다시 코로나속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틀어막으면 막아질 인생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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