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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천경마 Feb 15. 2024

두번째 암_두번째

오늘까지

서울대 병원을 퇴원하고 나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포카라 게스트 하우스는 코로나로 문을 닫았지만 이 시국에 나만 바라보고있는 현지직원에게 월급을 매달 보내줘야 했고 꼭 그게 아니더라도 보험료를 포함한 각종 공과금 고지서를 보면 숨만쉬어도 한달에 백만원은 그냥 사라지는게 대한민국의 삶이었다 코로나로 다들 가만히 움직이지 않는것이 미덕처럼 되었지만 구멍가게 사장의 책임감은 어떻게든 움직여야만 했다.


동네 벽돌공장에서 지게차를 타면서 만들어진 벽돌을 쌓기도하고 용접일을 따라다니면서 용접일도 하고 철골일도 했다. 야외에서 일을 할수있는 체력과 기술을 가지고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이런 야외일의 큰 단점은 추운 겨울을 어떻게 보내느냐가 관건인데 다행해 집근처 농막회사 용접사 자리에 좋은 조건으로 취직했다. 다행히도 찬바람이 없는 실내 작업장이었다. 코로나의 답답함을 한적한 시골에 농막으로 분출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수도권 농막업체들은 때아닌 호황을 맞고있었고 사람들은 농막을 본래의 취지가 아닌 별장개념으로 쓰고있었다. 장기적인 계획은 몰라도 일단 이번 겨울은 안정적으로 보낼수있을것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8월에 지원한 방글라데시 프로젝트에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나보고 당장 2주뒤에 방글라데시로 출국할수 있으냐는 물음이었고 추운데서 용접을 하는것보다는 따뜻한 방글라데시에서 겨울을 보내는것이 돈도 몸도 경력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지원한걸 잊고있었던 프로젝트였는데 이제서 급하게 연락이 온걸보니 사고 결원이 생긴걸로 짐작했지만 이시국에 방글라데시행의 결정은 쉬운일은 아닌게 분명하다 코로나와 겹쳐진 최빈국 방글라데시는 파견자의 스펙보다는 경험이나 경력 파견의지 까지 생각해봐야 하는 일이었다.


방글라데시로 출국하기 직전에 네팔에 있는 수녀님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안부를 위해 정기적으로 연락하는 세분이 있었는데 세명다 한번에 갑자기 연락이 안됐다. 그리고 구속 사실을 알게되었다. 내가 네팔에 있었다면 내가 감옥에 갔을일인데 나 대신 감옥에 가신것같아 마음이 아팠다. 코로나로 굶고 있는 이들에게 쌀과 빵을 나눠준 수녀님의 죄명은 선교였는데 10년을 네팔에 사신 수녀님이 이제와서 선교라는 죄목으로 감옥에 가는게 말이 안됐다. 역시 되는것도 안되는것도 없는것이 네팔. 서남아는 역시 어렵고 어렵다. 이 사건이 완벽한 무죄로 끝나는데까지 3년정도가 걸린것 같다. 몸고생 마음고생 했을 분들께 다시한번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


나는 방글라데시를 마무리 짓고 스리랑카를 프로젝트로 다녀왔으며 네팔을 프로젝트로 다녀왔다 코로나가 끝나가고있었다. 많은 PM과 프로젝트 인력을 찾고있었다. 볼크기는 점점 줄어드는 느낌 혹은 유지되는 느낌이었으며 간간히 술을먹고 담배를 다시 피웠다. 일이 피곤하고 힘들었다. 이와중에 나는 배필을 만나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았다. 그리고 프로젝트를 하면서 포카라에 살기로 했다. 아이를 키우면서 포카라에 사는것이 신께서 주신 축복처럼 하루하루가 감사했다. 나도 언젠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울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게 이렇게 감사하고 행복한 일인줄 이제 알았다. 


재미있는 나라 네팔은 나에게 프로젝트 인력으로 프로젝트 비자를 발급해줬지만 가족에게는 발급해주지않았다. 원칙대로하면 강제적인 이산가족 같은게 되는상황. 이건 무슨경우인가 싶지만 네팔이 이런식이다. 화나고 열받으면 본인에게만 해롭다. 관광비자 만료가 다가오는 아내와 아이를 위해 게스트하우스 비즈니스 비자를 다시 열었다. 우여곡절 끝에 홍텔을 다시 열고 비자를 열었지만 코로나때 네팔 부자들은 홍텔 건물 주위로 건물을 더 높이 더 높이 올렸고 이제는 더이상 포카라의 목가적이나 시골적인 느낌이 아니라 카트만두 타멜의 도시적인 느낌을 주는 건물들에게 둘러쌓인 건물이 되었다.(누군가는 이곳을 그옛날 홍콩의 구룡성채라고했다) 이곳은 이제 내가봐도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장사할거 아니고 24년에는 투입일수가 많아서 어차피 포카라 생활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래도 트집거리를 없애고자 아내명의로 51% 주식을 넘기고 내가 49%가 되었다. 역시나 연말(23년)에 연락이 와서 "당신 프로젝트 비자 내고 게스트하우스 영업하는것 아니냐?"는 힐난이 코이카로부터 왔다. 카트만두로 이사가기위해 짐을 싸고 있을때였다. 법을 어긴것도 없고 룰을 벗어난것도 없으며 손님이라고 9월부터 오신 장인장모, 아내의 대학원 동기, 아내의 큰이모 큰아들 내외, 아내의 학부 교수님, 그리고 우리 아버지였다.


10월부터 였을까 밤마다 오한이 오고 열이 났다. 현지 해열제를 먹으면 땀을 한번 흘리고 다시 편안하게 잠에 들수있었다. 시골 개도국에서의 생활은 아침에 일어나서 할일이 많다. 아들을 위한 이유식도 만들어야하고 카트만두로 이사갈 짐도 정리해야 했으며 건물관리가 쉬워보여도 그렇지가 않다. 빨리 포카라를 떠나고 싶었지만 그것역시 쉽지 않았다. 온다는 지인들이 많았고 먹여야할 아이들이 있었다. 포카라 보스의 삶이 그랬다.


현지병원에 가서 많은 피검사를 하고 진료를 받았다. 외국인에게 꼭 세배의 요금을 받는 동네에서 제일 좋은 병원에 갔다. 내가 이곳에 현지인들을 위해 직업훈련원을 지으러 이곳에 왔어도 그들에게는 그저 돈을 많이 받아내야하는 외국인에 불과했다. 자기와 직접적인 상관이 없으면 언제나 남의 일이다. 네팔이 늘 이런식이다. 서남아에서 인정을 기대하면 안된다. (한국에 다녀온 현지인만이 한국식의 '인정'이라는 단어를 이해한다) 현지의 자존심 높은 두명의 의사가 내린 진단은 '박테리아' 감염으로 인한 '타이푸스' 같다고 했다. 항생제 처방을 받고 먹었는데 효과가 있는지 항생제를 먹는동안은 편안하게 잠을 잘수있었다. 문제는 항생제 처방이 끝나고 나서 사태의 심각성을 느꼈다. 다시 밤에 열이났고 체중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포카라에 네팔에 있어서 될일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5월에 계약이 만료되는 포카라 집을 서둘러 정리하고 카트만두로 집을 이사하고 설날을 겸해서 가족이 한국에 다녀오는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프로젝트 투입일은 2월 중순이었다. 나는 그전에 네팔에 도착해서 준비하고 있으면 됐다 언제나 그렇듯 계획상으로는 큰 어려움이 없어 보였다.


포카라의 삶을 정리하는건 마음이 쉽지않았다. 홍텔에서 함께 지내면서 학교에 다니던 뿌자에게는 건물 계약이 종료되는 5월까지 홍텔건물에 있어도 좋다고 했고 5월까지 매달 만루피를 보내주기로 했다. 공부하는 학생에게 기회는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뿌자는 보통의 네팔사람 같지않게 나를 위해 싸워줄수있는 배짱을 가진 여고생이었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태도를 가진 친구였다. 포카라에 있는 한국분들에게 인사를 했고 또 정들었던 오토바이도 팔았다. 세탁기나 테이블같이 큰 집기들은 다행히도 아랫집 친하게 지내던 여행사 사장동생이 일괄로 구매해 줬다. 빈민가 아이들을 먹이는 일도 포카라도 이제 잠시 멈춰야 한다. 짐을 챙겨서 차에 실었는데 정리한다고 했는데도 짐이 넘쳐서 그냥 평소에 친한 택시도 불러서 거기에 짐을 실었다. 그리고 우리가족은 카트만두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카트만두집에서 딱 두밤을 잤는데 입식생활을 하던 아이가 좌식 생활을 하면서 더 잘 기어다녔다. 진작에 와야 했던것은 아닌지 후회가 되었다. 1월 16일에 국제선 비행기를 탔고 중국 청두에서 환승했다. 환승을 하면서 아이와 아내와 함께 양고기 수육을 먹었다. 아내는 비린 음식을 잘 못먹지만 이곳 수육은 잘먹었다. 반근을 시켰다가 반근을 추가했다. 네팔에서 사지못한 선물들도 사고 17일 한국에 도착했다. 18일 바로 동탄성심병원에 달려갔다. 신경과 일단 입원하고 면역글로불린을 맞으면서 사태를 보자고했다. 다행히 병동에 빈자리도 있었고 요즘 구하기 어렵다는 면역글로불린도 있었다. 입원해서 면역글로불린을 맞기 시작했다. 처음 온곳도 아니고 처음 맞는 면역글로불린도 아니었다. 단지 몸에 바늘이 있는게 괴롭고 힘들었다. 그뿐이었다. 병원에서도 밤에 열이 났고 원인을 찾기위해 감염내과가 다시 등장했다 감염내과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야간 오한 및 발열 체중감소는 '림프종'의 교과서 적인 신호일수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쪽으로 혈액검사를 다시 했다.


의심이었다 처음에는. 그래서 갑자기 골수검사를 한다고 했을때 많이 당황했지만 '내 인내심이 이것을 빨리 끝내게 할수있다면 내가 또 참는다'는 마음가짐으로 버텼지만 무척이나 아프고 힘들었다. 젊어보이는 여자 간호사 둘과 역시나 젊은 여자 레지던트가 병동 처치실에서 검사했는데 만난 첫마디가 '검사 아파요' 하면서 밝은 목소리로 나름의 위로? 를 전하는것이었다. '얼마나 아프냐' 는 나의 물음에 그들은 밝게 웃으며 자기들은 안해봐서 모른다고 했다. 어쨌든 골수검사에서 뭔가 나왔는지 다다음날 외과 교수가 병실로 왔고 부어있는 림프를 찾아냈다. 사타구니에 있는 림프를 떼어 조직검사를 한다고 했다. 그러려니 했지만 금요일 오후 갑자기 또 인턴이 갑작스레 찾아와서 동의서를 받아갔고 통증으로는 골수검사보다 못했지만 수술실이라는 심리적 부담으로 또 두개의 부어있는 림프를 떼어내고 열다섯 바늘을 봉합했다.


동탄에서의 일상은 단조롭다. 밥나오면 밥먹고 열나면 얼음주머니를 대고 해열제를 먹었다. 글로불린을 세게 맞기 시작한 시점부터 낮에도 고열이 났다. 배정받은 스무병을 빨리맞고 퇴원하고 싶었는데 면역의 부작용같기도 했다. 열여섯병을 맞고 그만두기로 했다. 심하게 오르면 40도까지 올랐고 해열제가 들었다가 안들었다가 그랬다. 열이 안잡히면 퇴원이 어려울것같았다. 열이 떨어지면 지하에 편의점에가서 그동안 먹지못한 간식을 먹고싶었는데 딱히 많이 당기지도 않았다. 정맥주사를 하도 맞아서 이제는 어떤 간호사가 혈관을 잘 찾는지 알게되었으며 나에게 일부러 초보 간호사를 보내서 무언의 패널티같은게 존재 하는것도 깨달았다. (나는 수많은 외국의 서툰 간호사들의 정맥주사 시도를 몸소 경험한 바가 있어서 몸에 바늘 넣고 헤집는걸 잘 참는 편이다)


월요일 회진에서 주치의 선생님은 림프종이 의심된다고 했다. 넌지시 전원을 준비하는게 좋겠다고 했다. 아득해지는 기분이었지만 이때도 고열이었어서 딱히 큰 감흥은 없었다. 전원을 하기위해서는 조직 검사한 슬라이드가 필요했는데 직접 판독하지 못하는 이곳에서는 처리가 늦었다. 그래서 전원하기로한 강남 성모병원에 제출하는 시기가 늦어졌다. 설날연휴가 끼어있었다. 돌이 지나지 않은 아들이 온가족의 재롱이 되는것은 좋았지만 설날 아침에도 오한이 왔다. 집에 있으면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는게 너무 좋았지만 밤에 열이나면 자주 오가는 화장실과 물먹는게 엄마한테 미안했다. 우리엄마는 거실에서 자는걸 좋아한다.


2월 19일에 병원에 간다 전원 하기전 병원의 중간 결과는 호지킨이었다가 T세포 림프종 3-4기라고 했다. 네이버에 검색해보니 암담한 결과들이 많다. 덤덤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차피 인생은 물처럼 흐르는것. 아내는 장인 장모 그리고 아들과 카트만두 집을 정리하기 위해 다시 네팔로 갔다. 적금과 예금이 잘 정리되었으면 좋았을텐데 역시나 쉽지않다. 나는 포천 집에서 매일 열과 싸운다. 하루에 이렇게 글을 쓸수있을정도로 맑은 정신을 가지는데 채 여섯시간이 안되는것 같다 유튜브를 보고 책을보다가 열이나면 약을먹고 버티기에 들어간다.


둘째를 위해 정자를 냉동하기로 했는데 정말 어렵게 찾은 노원의 난임병원에서 채취한 정자는 활동하는 정자가 거의 없다고 했다. 코로나때 지원금으로 한 검사에서는 50%넘는 활동력을 가지고있었던 녀석들이었는데.. 토요일에 재시도. 잘 되었으면 좋겠는데 이게 또 쉽지 않다. 엄마와 아빠는 나보고 뭐가 먹고싶냐고 항상 묻고 그걸 해줄려고 한다. 한때 115키로에 육박했던 몸무게는 이제 90키로인데 이것도 무언가를 엄청 먹어서 이정도 항암과 방사선을 하려면 체력말고는 뭐가 없다고 했다.


살고싶다 무척이나

아들이 유치원에서 가지고올 무언가

아들이 초등학교에서 틀릴 받아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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