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보고싶다
2월 19일 외진에서도 결국 결론은 나지 못했다. 경과가 좋은 호지킨 림프종과 머리가 아픈 T세포 림프종을 두고 병리과에서 아직 결론을 내지리 못하고 있다고 했다. 중간결과에서 동탄 병원에서는 처음에는 호지킨으로 판단했다가 T세포로 결과를 바꾼적이 있었다. 전원한 병원에서는 병원 나름대로 추가 검사를 하고 다시 또 추가검사를 했다. 여기에 전공의 파업과 겹쳐져서 일정이 녹록치 않다. 림프종인건 맞는데 정확히 뭔지를 알아야 거기에 맞춰서 항암치료가 가능하다고 했지만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렇게 매일 열과싸우면서 버텨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건 열에 대한 체력이었다. 동탄병원에 있을때 39.8도에서 한번 기절한적을 제외하고 그나마 잘 버텼다. 39도면 힘들었지만 38도면 얼음주머니도 대고 그나마 맑은 생각을 할수가 있었다.
가슴에 케모포트를 박았다. 중심정맥관과 가슴을 바로 연결하는 줄인데 다행히 전공의 파업과 무관한 교수님께서 직접 시술을 해주신다고 했고 담당 교수님의 배려로 일정때문에 3월초나 되어야 받는 시술을 당겨서 2월 25일에 받았다. 시술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침대에 누웠고 피부마취를 한다음 수면내시경을 하는것처럼 수면제가 들어왔다. 그리고 깨워서 일어나서 나갔다. 어려운것은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본격적인 암환자로서의 일상이 시작되려 하고있었다. 케모포트 시술이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포천으로 데려가고 싶었지만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매일같이 시달리는 고열에 응급사태에 대비하려면 서울에 있는편이 낫다고 판단했고 항암도 포천보단 서울이 낫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서울 처갓집에서 도대체 무슨 림프종인지를 기다리기로 했다.
가슴에 포트를 박으니 아들을 안을수가 없다. 3월 27일이 첫돌인 아들을 안을수가 없다. 실밥을 풀지 못한 몸에서는 포트를 박은자리가 아직 불안했고 팔에는 계속되는 오한으로 힘이 빠져가고 있었다. 하루에 한번씩 꼭 열이 났는데 새벽이 될때도 있고 아침이 될때도 있었다. 열이나면 꼭 정상컨디션으로 오는데까지 다섯시간이 걸렸다. 오한과 함께 열이 오르고 해열제와 진통제를 먹으면 오한은 멈추고 열만 올라갔다. 38도.. 39도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 머리에서 땀이나면서 온도가 내려갔다. 버티는 순간이 너무 괴롭고 힘들지만 버티는 데까지 버텨보기로했다. 조금만이라도 더 아이와 아내와 함께 있고 싶었다.
대학원에 휴학을 하려고했는데 아내의 강력한 의지로 등록했다. 삶에 영속에 대한 명분을 이어나가는 고리 같은게 되고싶었는지도 모른다. 지난학기에는 수업이 비교적 수월했다면 이번학기는 수업하나가 녹록치 않다. 삶이 녹록치 않아 졌는데 수업도 녹록치 않아진것 같아서 그동안 얼마나 행복했는가를 반성하게 되었다. 이런 어려운 상황을 버텨내는 것중에 하나가 행복 총량제인데 이런 삶의 어려움을 겪게되는 이유를 명확히 해야 다가오는 인생의 쓴맛을 견딜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동안 달게 살았다 그래서 쓴맛이 오는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야만 한다.
문득 첫번째 암을 돌이켜 본다. 나는 7년전 갑상선 암으로 갑상선을 떼어냈는데 그때는 궤도에 오르려다 힘들어진 인생의 굴곡을 더욱 힘들어했지 지금처럼 생사의 기로에서 흔들리지는 않았다. 지금은 늘어난 가족만큼이나 또 늘어난 인생의 행복 만큼이나 생각이 많아졌다. 그래서 생각을 덜하려고 많이 노력한다. 고열로 힘들때에도 추운겨울 야외에서 캠핑하는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버틴다. 나도 밖에서 캠핑하던 시절을 그리워하고 또 내가 오한으로 추운 지금 추운곳에서 떨면서 캠핑을 하는 그들에게서 동질감을 느끼는것일수도 있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우습지만 이런게 큰 힘이 된다.
버티는 삶이 쉽지않았다. 하루에 한번 꼭 열이 왔는데 그 열의 지속시간이 길어졌고 버티기 힘들어졌다. 전공의 파업으로 힘들어진 응급실에 부담을 주기도 싫었을뿐더러 나보다 더 급한 사경을 헤메는 사람이 우선이라고 생각했고 아들과 아내와 되도록 함께 있고 싶었으며 결정적으로 몸에 수액줄을 감고사는 답답함은 더더욱 싫었다. 그런데 그 한계가 다가오고 있었다. 수요일에 고열이 나서 힘들었는데 목요일에 그 열이 너무 힘들었다. 금요일에도 열이나면 입원하기로 했는데 금요일에 나는 열이 39.7도가 넘었다. 어느때부터인가 외진가면 교수님과 PA간호사님이 '정 힘들면 응급실로 입원하라'고 했었는데 지금이 그 순간인것 같았다. 짐을 챙겨서 장모님과 아내와 병원으로 왔다.
의료대란중에 응급실에서는 정말 응급한 사람만 모인다는 말이 맞는것같았다. 병원은 전보다 적은 사람들로 한산해 보였지만 응급실 대기실에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는 환자 한명 한명이 무겁고 급해보였다. 안타깝게도나역시 그중에 하나였다. 대기실에서 삼십분정도 기다린다음 엑스레이를찍고 CT를찍고 피검사를 하고 응급실 기본검사인지 입원을 위한 검사인지를 모를 여러 검사를했다. 다행히 전문의 선생님이 두어시간 있다가 와서 포트 실밥을 풀고 수액관을다 케모포트로 몰아줬다. 이제 본격적인 암환자로서 생활의 시작이었다.
모든검사를 마치고 나를 진료해준 전문의 선생님은 오늘 당연히 입원한다고 했는데 문제는 그 입원의 위치가 응급실 한켠에 있는 입원 대기 공간이었다. 보호자인 아내와 걸어서 배정받은 대기공간으로 갔는데 이동하면서 힐끗 바라본 다른 환자의 커튼너머의 짐이 무척 많은걸보니 대기기간이 생각보다 길어지겠다고 판단했다. 배정받은 공간은 겨우 몸을 누일수있는 침대하나와 보호자가 앉을수있는 의자하나가 전부였다. 밥도 알아서 구해다 먹어야 하는 조건이었다. 나도 힘들지만 보호자가 될수있는 아내와 부모님이 힘들것이 너무나도 뻔했다. 응급실에서 환자에게 안내해주시는 직원분 말로는 혈액내과는 특히나 자리가 나지않아 최소 오일은 기다려야 된다고 했다.
중증환자를 위한 1인실 VIP 병동이 운영된다고 했다. 하룻밤 64만원. 고통스러웠던 그리고 고통스러울 나의 시간과 누가 되었든 보호자의 고통스러울 나와의 시간을 생각한다면 1인실로 가야 된다고 생각했다. 돈과 고통의 선택에서 돈을 선택할만큼 너무 힘들었다. 주말을 여기서 버티면서 다인실로 내려가는걸 노려보기로 했다. 입원중에 열은 여전히 났지만 차츰 안정되어갔고 검사결과는 늦어도 수요일에 나온다고 했다. 열이나서 피가 마르기도 하지만 검사결과때문에도 피가 말랐다. 간호사 교수 모두 은연중에 T가 얼마나 무섭고 힘든일인지 꾸준히 말해왔었다. 엄마와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이 되었다. 보호자는 아버지로 바뀌었고 국립중앙 도서관이 보이는 호텔급 병실에서 4일째 밤을 맞는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했다. 어찌 되었든 결과가 빨리 나와야 한다.
월요일 오후 한시반쯤 간호사가 새로운 수액을 걸었다. 내일부터 항암을 한다고 했고 진단명은 호지킨이라고 했다. 나도 모르게 고마워서 소리를 지르고 환호를 했다. 오후 늦게 이루어진 두번째 교수님 회진에서는 호지킨과 T사이에서 살짝 호지킨으로 치우쳐서 호지킨으로 판단했다고 했다. 그래도 좋았다 호지킨 과 T세포 사이의 생존율의 차이가 많이 났기때문인데 담당 교수님 말씀은 또 나이를 제외한 모든 지표들이 안좋으니까 안심하기 이르다고 했다. 가장 좋은건 항암이후 몸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 몸이 항암제에 어떻게 반응하는지가 중요하다고 했다. 항암을 하는 순간까지 안심과 평안의 고리를 잡기가 쉽지않다.
나는 내일부터 항암을 받는다
진단명이 T세포가 아니라서 정말 감사하지만
진단명이 또 뒤끝있는 호지킨이라서 또 불안하기만 하다
1년에 5천명이 혈액암 판정을 받는다는데 모두 힘내길 바란다 내가 희망의 표본이자 불꽃이 되고싶다.
이런 인생의 고비를 넘기고 나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질수 밖에 없다. 오늘 날씨는 흐리고 우중충 했지만 점심에 간호사가 알려준 호지킨 소식에 세상의 명도와 채도가 밝아진것만 같다. 긴 고생 1부를 마쳤다 이제 2부가 남았다.